영하(寧夏)의 반란군 장수 파배(巴拜) 등이 침략하니 총병 이여송(李如松) 등이 패퇴시켰고, 연수 순문 이춘광(李春光)이 포색도(布色圖)의 대비를 상주한 글
[만력] 20년(1592)에 영하의 반란군 장수 발배(哱拜)
주 001
각주 001)

등이 복실토·장독뢰 등과 결탁하여 대거 침략하자, 총병 이여송(李如松)
주 002哱拜(1526~1592): 明朝 蒙古 韃靼部 酋長으로 대대로 寧夏에 거주하였다. 嘉靖연간(1507~1566)에 영하守備 鄭印에게 투항한 이후 戰功을 쌓아 萬曆초년에 遊擊將軍에 임명되었고, 만력17년(1589)에 副總兵이 되었다. 만력19년(1591)에 火落赤 등이 洮河에 침범하였을 때, 직접 부하 3,000명을 이끌고 가서 도와주었는데, 당시에 巡撫 黨馨이 매번 그를 제제하고 ‘冒餉之罪’로 탄핵하자 불만이 쌓였다. 이에 만력 20년(1592) 2월 18일에 발배는 그의 아들 哱承恩 등을 규합하고 軍鋒 劉東暘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켰다. 순무 당형 및 副使 石繼芳 등을 죽이고 符印을 탈취하고 죄수를 석방하였다. 明軍의 진압 노력에도 불구하고 河套 蒙古 首領 著力兔 등의 원조를 받아 세력이 더욱 강성해졌다. 4월에 李如松이 寧夏總兵이 되어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펼쳤다. 명군의 포위로 외부 원조가 끊긴 반란군은 결국 내부 지도자들 사이에 불화가 일어나 戰力이 쇠퇴하였고, 이여송이 발배의 집까지 포위하자 자살하였다.
각주 002)

이 그들을 공격하여 패퇴시켰다. [만력] 22년(1594)에 연수 순무 이춘광(李春光)이 상주하기를, “하투부가 귀복한지 이미 오래인데 명안이 피살되면서부터 적의 원한이 깊어졌고, 서하(西夏)
주 003가 무리를 모아 반역하여 공시(貢市)가 끊어져 연진(延鎭)에 매년 일이 많습니다. 지금 동서의 각 부락이 모두 귀순을 청하였지만, 복실토는 헤아릴 수 없는 사심(私心)을 가지고 있는데, 변경이 길고 군대가 적어 제어하기가 어렵습니다. 마땅히 적의 정세를 살펴 시세(時勢)를 자세히 알아야 합니다. 적이 침범하면 혈전(血戰)[이 벌어지니], 우연히 혹 작은 실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마땅히 사법관에게 관대하게 심판하도록 해야 합니다. 적이 진심으로 귀순한다면 실제 정황에 근거하여 안무(按撫)를 건의하여, 전쟁 방비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니, 황제가 병부에게 명하여 각 변경에 전달하여 단단히 타일러서 경계하도록 하였다. [그해] 가을에 복실토가 고원(固原)을 침입하여, 유격 사견(史見)이 전사하였다. 연수 총병 마귀(麻貴)가 이를 방어하니, 1개월 만에 비로소 물러갔다. 섬서 전체가 진동하였다. 그해에 동부(東部)의 초화(炒花)가 진무보(鎭武堡)를 침범하여, 총병 동일원(董一元)이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이듬해(1595) 봄에 송부(松部)의 재승(宰僧) 등이 섬서를 침범하였는데, 총독 섭몽웅(葉夢熊)이 군대를 지휘하여 그들을 물리쳤다. [그해] 가을에 해부(海部) 영소복(永邵卜)
주 004이 서녕을 침범하자, 총독삼변(三邊) 이민(李旼)
주 005이 참장 달운(達雲)
주 006·유격 백택(白澤) 및 마기살(馬其撒)·복이가(卜爾加) 등 여러 속번(諸屬番)에 격문을 보내고, 매복을 설치하여 적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공격하여 이들을 크게 패퇴시키고 683명을 베었다. 승리를 보고하자 황제가 크게 기뻐하였으며, 또한 속번(屬番)에게 목숨을 바치게 함으로 인해 전 총제(總制) 정락(鄭雒)
주 007의 공적을 추서(追敍)하였고, 상을 내리는 것 모두가 정락에게 미쳤다.李如松(1549~1598): 字는 子茂, 號는 仰城이며 遼寧省 鐵嶺 출신이다. 그의 高祖인 李英은 朝鮮 理山郡의 사람이었으나 明에 歸附하여 鐵嶺衛 指揮僉事가 된 후, 그곳에 자리 잡게 되었다. 이여송의 부친인 李成梁(1526~1615)은 遼東總兵으로 遼東 지역의 방위에 큰 공을 세웠는데, 누르하치의 부친과 조부를 살해하여 이후 누르하치 세력의 성장에 자극을 주었다. 이여송은 鐵嶺衛 指揮同知의 職位를 세습하였는데, 萬曆 11년(1583)에 山西 總兵官이 되었다. 만력 20년(1592)에 寧夏에서 哱拜의 난이 일어나자 提督으로 토벌군을 이끌고 참전하여 동생인 李如樟과 함께 반란진압에 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都督으로 승진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防海禦倭總兵官에 임명되어 조선으로 파병되었다. 이여송은 조선의 僧軍, 官軍과 연합하여 1593년 1월에 小西行長의 倭軍을 기습해 平壤城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퇴각하는 왜군을 추격하며 平安道와 黄海道, 開城 일대를 탈환했지만, 漢城 부근의 碧蹄館에서 小早川隆景, 立花宗茂 등이 이끄는 왜군에 패하여 開城으로 퇴각하였다. 그리고 咸鏡道에 있는 加藤淸正의 왜군이 평양성을 공격한다는 말이 듣고 평양성으로 물러났다. 그 뒤에는 전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和議交涉에만 주력하다가 그해 말에 劉綎의 부대만 남기고 철군하였다. 귀국 후에 遼東總兵이 되었으나 1598년에 韃靼(Tatar)의 土蠻 정벌에 나섰다가 복병을 만나 전사하였다. 그의 사후, 동생 李如梅가 遼東總兵의 직위를 승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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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哱拜(1526~1592): 明朝 蒙古 韃靼部 酋長으로 대대로 寧夏에 거주하였다. 嘉靖연간(1507~1566)에 영하守備 鄭印에게 투항한 이후 戰功을 쌓아 萬曆초년에 遊擊將軍에 임명되었고, 만력17년(1589)에 副總兵이 되었다. 만력19년(1591)에 火落赤 등이 洮河에 침범하였을 때, 직접 부하 3,000명을 이끌고 가서 도와주었는데, 당시에 巡撫 黨馨이 매번 그를 제제하고 ‘冒餉之罪’로 탄핵하자 불만이 쌓였다. 이에 만력 20년(1592) 2월 18일에 발배는 그의 아들 哱承恩 등을 규합하고 軍鋒 劉東暘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켰다. 순무 당형 및 副使 石繼芳 등을 죽이고 符印을 탈취하고 죄수를 석방하였다. 明軍의 진압 노력에도 불구하고 河套 蒙古 首領 著力兔 등의 원조를 받아 세력이 더욱 강성해졌다. 4월에 李如松이 寧夏總兵이 되어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펼쳤다. 명군의 포위로 외부 원조가 끊긴 반란군은 결국 내부 지도자들 사이에 불화가 일어나 戰力이 쇠퇴하였고, 이여송이 발배의 집까지 포위하자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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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2)
李如松(1549~1598): 字는 子茂, 號는 仰城이며 遼寧省 鐵嶺 출신이다. 그의 高祖인 李英은 朝鮮 理山郡의 사람이었으나 明에 歸附하여 鐵嶺衛 指揮僉事가 된 후, 그곳에 자리 잡게 되었다. 이여송의 부친인 李成梁(1526~1615)은 遼東總兵으로 遼東 지역의 방위에 큰 공을 세웠는데, 누르하치의 부친과 조부를 살해하여 이후 누르하치 세력의 성장에 자극을 주었다. 이여송은 鐵嶺衛 指揮同知의 職位를 세습하였는데, 萬曆 11년(1583)에 山西 總兵官이 되었다. 만력 20년(1592)에 寧夏에서 哱拜의 난이 일어나자 提督으로 토벌군을 이끌고 참전하여 동생인 李如樟과 함께 반란진압에 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都督으로 승진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防海禦倭總兵官에 임명되어 조선으로 파병되었다. 이여송은 조선의 僧軍, 官軍과 연합하여 1593년 1월에 小西行長의 倭軍을 기습해 平壤城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퇴각하는 왜군을 추격하며 平安道와 黄海道, 開城 일대를 탈환했지만, 漢城 부근의 碧蹄館에서 小早川隆景, 立花宗茂 등이 이끄는 왜군에 패하여 開城으로 퇴각하였다. 그리고 咸鏡道에 있는 加藤淸正의 왜군이 평양성을 공격한다는 말이 듣고 평양성으로 물러났다. 그 뒤에는 전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和議交涉에만 주력하다가 그해 말에 劉綎의 부대만 남기고 철군하였다. 귀국 후에 遼東總兵이 되었으나 1598년에 韃靼(Tatar)의 土蠻 정벌에 나섰다가 복병을 만나 전사하였다. 그의 사후, 동생 李如梅가 遼東總兵의 직위를 승계하였다.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색인어
- 이름
- 발배(哱拜), 복실토, 장독뢰, 이여송(李如松), 이춘광(李春光), 명안, 서하(西夏), 복실토, 복실토, 사견(史見), 마귀(麻貴), 초화(炒花), 동일원(董一元), 재승(宰僧), 섭몽웅(葉夢熊), 영소복(永邵卜), 이민(李旼), 달운(達雲), 백택(白澤), 정락(鄭雒), 정락
- 지명
- 영하, 하투부, 연진(延鎭), 고원(固原), 섬서, 진무보(鎭武堡), 섬서, 서녕, 마기살(馬其撒), 복이가(卜爾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