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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토묵특의 수차례 침입을 이성량 등이 모두 패퇴시킨 내용

  • 국가
    달단(韃靼)
[만력] 7년(1579) 겨울에, 토만의 4만 기병이 금천영(錦川營)을 침입하였다. 양몽룡·이성량과 총병 척계광(戚繼光) 주 001
각주 001)
戚繼光(1522~1588): 字는 元敬이고 號는 南塘으로, 산동성 登州 출신이다. 兪大猷와 함께 福建省, 浙江省, 廣東省 등지에서 倭寇의 침입을 물리쳤으며, 이후에는 알탄칸(阿勒坦汗)이 이끄는 韃靼(Tatar)의 침략에 맞서 長城의 防衛를 굳건히 하였다. 이른바 명 중엽의 北虜南倭의 外患을 극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중국인들에게는 특히 抗倭의 民族英雄으로 崇仰되고 있다. 嘉靖 23년(1544)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登州衛指揮僉事가 되었으며, 가정 34년(1555)부터 浙江省에서 왜구 침입에 대한 방어에 임하였다. 그는 浙江省의 金華와 義烏 지역에서 農夫와 鑛夫 등 4,000여 명의 義勇軍을 모아 조련하여 이른바 ‘戚家軍’이라는 항왜주력부대를 양성하였다. 그런가 하면 水軍을 조직하여 남동부 해안 지역에서 密貿易을 하며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를 대대적으로 토벌하여, 1567년까지 10여 년 동안 왜구와 무려 80여 차례나 전투를 벌였다. 1562년에는 福建省의 왜구 근거지를 소탕하여, 그 공을 인정받아 都督僉事가 되었고, 가정 42년(1564)에는 兪大猷, 劉顯과 함께 平海衛에서 왜구를 물리쳐 都督同知를 거쳐 福建總兵이 되었으며, 이후로도 福建省과 廣東省 沿岸에서 왜구를 물리쳐 南東 해안 지역을 평정하였다. 이후 그는 북변방어에도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內閣首輔 張居正이 죽은 뒤 그의 비호를 받았다는 명목으로 萬曆 11년(1583)에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그에 대한 파면 조치는 3년 뒤에 철회되었지만, 失意에 빠진 그는 病苦에 시달리다가 1588년에 登州에서 죽었으며, 『紀效新書』, 『練兵實紀』, 『莅戎要略』, 『武備新書』 등의 兵書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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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 이미 대학사 장거정(張居正) 주 002
각주 002)
張居正(1525~1582): 湖北省 江陵縣 사람으로, 字는 叔大, 號는 太岳이며, 諡號는 文忠이다. 萬曆帝(재위 1572~1620)의 신임을 얻어 황제가 즉위한 직후부터 10년간 首輔의 자리에 앉아 국정의 대부분을 처리하고, 내외적으로 쇠퇴의 조짐을 보이던 명나라의 세력을 만회하였다. 대외적으로는 互市를 재개하여 몽골인의 남침을 막았고, 동북 지방 建州衛를 李成梁에게 토벌하게 하였으며, 서남 지방 廣西의 搖族·壯族을 평정하였다. 대내적으로는 대규모의 행정정비를 단행하여 궁정의 낭비를 억제하고, 黃河의 대대적인 治水 공사를 완성시켰으며, 전국적인 호구조사와 토지측량을 단행, 지주의 부정을 막아 농민의 부담을 줄이는 데 성과를 거두었으나, 이 사업이 완료되기 전에 죽었다. 『書經直解』, 『張太岳集』 등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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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방략(方略)을 받아 함께 힘껏 대비하고 방어하니, 적이 비로소 물러갔다. 이로부터 적이 수차례 침입하였지만 이성량 등이 여러 차례 이들을 패퇴시키고 번번이 그 우두머리(巨魁)를 베었으며, 때때로 변경 밖에서 [적을] 습격하여 참획(斬獲)한 바가 많았다. 적이 그를 두려워하여 점차 잦아들었는데, 이성량은 마침내 그 공으로 영원백(寧遠伯)에 봉해졌다.

  • 각주 001)
    戚繼光(1522~1588): 字는 元敬이고 號는 南塘으로, 산동성 登州 출신이다. 兪大猷와 함께 福建省, 浙江省, 廣東省 등지에서 倭寇의 침입을 물리쳤으며, 이후에는 알탄칸(阿勒坦汗)이 이끄는 韃靼(Tatar)의 침략에 맞서 長城의 防衛를 굳건히 하였다. 이른바 명 중엽의 北虜南倭의 外患을 극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중국인들에게는 특히 抗倭의 民族英雄으로 崇仰되고 있다. 嘉靖 23년(1544)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登州衛指揮僉事가 되었으며, 가정 34년(1555)부터 浙江省에서 왜구 침입에 대한 방어에 임하였다. 그는 浙江省의 金華와 義烏 지역에서 農夫와 鑛夫 등 4,000여 명의 義勇軍을 모아 조련하여 이른바 ‘戚家軍’이라는 항왜주력부대를 양성하였다. 그런가 하면 水軍을 조직하여 남동부 해안 지역에서 密貿易을 하며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를 대대적으로 토벌하여, 1567년까지 10여 년 동안 왜구와 무려 80여 차례나 전투를 벌였다. 1562년에는 福建省의 왜구 근거지를 소탕하여, 그 공을 인정받아 都督僉事가 되었고, 가정 42년(1564)에는 兪大猷, 劉顯과 함께 平海衛에서 왜구를 물리쳐 都督同知를 거쳐 福建總兵이 되었으며, 이후로도 福建省과 廣東省 沿岸에서 왜구를 물리쳐 南東 해안 지역을 평정하였다. 이후 그는 북변방어에도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內閣首輔 張居正이 죽은 뒤 그의 비호를 받았다는 명목으로 萬曆 11년(1583)에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그에 대한 파면 조치는 3년 뒤에 철회되었지만, 失意에 빠진 그는 病苦에 시달리다가 1588년에 登州에서 죽었으며, 『紀效新書』, 『練兵實紀』, 『莅戎要略』, 『武備新書』 등의 兵書를 남겼다. 바로가기
  • 각주 002)
    張居正(1525~1582): 湖北省 江陵縣 사람으로, 字는 叔大, 號는 太岳이며, 諡號는 文忠이다. 萬曆帝(재위 1572~1620)의 신임을 얻어 황제가 즉위한 직후부터 10년간 首輔의 자리에 앉아 국정의 대부분을 처리하고, 내외적으로 쇠퇴의 조짐을 보이던 명나라의 세력을 만회하였다. 대외적으로는 互市를 재개하여 몽골인의 남침을 막았고, 동북 지방 建州衛를 李成梁에게 토벌하게 하였으며, 서남 지방 廣西의 搖族·壯族을 평정하였다. 대내적으로는 대규모의 행정정비를 단행하여 궁정의 낭비를 억제하고, 黃河의 대대적인 治水 공사를 완성시켰으며, 전국적인 호구조사와 토지측량을 단행, 지주의 부정을 막아 농민의 부담을 줄이는 데 성과를 거두었으나, 이 사업이 완료되기 전에 죽었다. 『書經直解』, 『張太岳集』 등을 저술했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양몽룡, 이성량, 척계광(戚繼光), 장거정(張居正), 이성량, 이성량
지명
토만, 금천영(錦川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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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묵특의 수차례 침입을 이성량 등이 모두 패퇴시킨 내용 자료번호 : jo.k_0024_0327_08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