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길(黃台吉)이 금주(錦州)를 침략함에 총병 왕치도(王治道) 등이 적진에서 죽었고, 암달의 셋째 아들 파갈내제(巴噶奈濟)가 수하를 데리고 투항하게 된 설명
[융경] 4년(1570) 가을에, 황태길이 금주(錦州)를 침략하였고, 총병 왕치도(王治道)·참장 낭득공이 10여 기병을 이끌고 적진에 들어가 죽었다. [그해] 겨울에, 엄답에게는 파한나길(把漢那吉)
주 001
각주 001)

이라는 손자가 있는데, 엄답의 셋째 아들 철배태길(鐵背台吉)의 아들로, 어려서 고아가 되어 엄답의 처에게 양육되었다. 커서 부인으로 비길(比吉)을 맞아들였다. 파한나길은 다시 오아도사(襖兒都司)의 딸을 맞이했는데, 곧 엄답의 외손녀로 용모가 아름다워 엄답이 그녀를 빼앗았다. 파한나길이 분개하여 마침내 그의 수하 아력가(阿力哥)
주 002 등 10명을 데리고 와서 투항하였다.주 003 대동순무 방봉시(方逢時)
주 004把漢那吉(1553~1583): Baya ači의 音譯이다. 大成台吉(Dayičing tayiji)이라고도 칭한다. 明代 蒙古 土黙特部 貴族으로, 鐵背台吉의 아들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祖父 俺答汗의 보살핌을 받았으나, 자신의 첩을 빼앗기자 隆慶 4년(1570) 明에 투항하였다. 후에 교섭을 거쳐 토묵특에 거주하는 漢人 首領 趙全 등과 맞교환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듬해(1571)에 和議가 성립되어 파한나길과 明은 得勝堡 등에서 互市를 열었다. 토묵특의 板升地區를 관장했는데 실력이 자못 강성했다. 明朝는 萬曆 4년(1576)에 파한나길을 昭勇將軍에 除授했다.
각주 004)

가 투항을 받고, 총독 왕숭고에게 고하였다. 왕숭고가 상언하기를, “파한나길이 귀부해 온 것은 무리를 이끌고 내부한 것과 비교할 수가 없으니, 마땅히 관작(官爵)을 주고, 관사(館舍)와 양식을 넉넉하게 하고, 수레와 말을 갖추어 엄답에게 보이십시오. 엄답이 급해하면, 판승의 여러 반도(叛徒)들을 결박하여 보내도록 하십시오. 듣지 않으면 파한나길을 죽일 것이라고 위협하여 견제하십시오. 또한 그렇지 않으면 위무(慰撫)하여 받아들여서 한(漢)나라 때, 속국(屬國)을 두어 오환인(烏桓人)주 005을 거주시켰던 고사(故事)와 같이, 파한나길의 옛 부하들을 초무하도록 하여 변방 가까운 곳으로 이주시키십시오. 엄답은 늙어 [머지않아] 죽게 될 것이고, 황태길이 [가한의] 위에 오르면 파한나길을 돌아오게 하여 그 무리와 황태길이 대항하게 하고, 우리 둔병에게 그들을 돕게 하십시오”라고 하니, 조서를 내려 허락하였고, 파한나길에게 지휘사(指揮使)를, 아력가(阿力哥)에게 정천호(正千戶)를 제수(除授)하였다.주 006
方逢時(1523~1596): 字는 行之이고, 號는 金湖이다. 嘉魚(지금의 湖北省에 속함) 사람으로, 嘉靖 20년(1541)에 進士가 되었으며, 宜興知縣·戶部主事·寧國知府·工部郞中·兵備副使 등을 역임하였다. 隆慶 연간(1567~1572) 초에 右僉都御史로 발탁되어 遼東을 巡撫하였다. 융경 4년(1570) 정월에 大同으로 옮겼다. 俺答(Altan)汗이 공격하자 기병 1천 명을 이끌고 지금의 감숙성 靖遠을 공략하였고, 이로 인해 俺答(Altan)汗의 군대는 퇴각하였다. 그해 겨울에 俺答의 손자가 투항하였는데, 이때 方逢時는 俺答 측과 貢市로 和約을 맺어서 변경을 안정시킬 방안을 제안하였다. 萬曆 연간(1573~1619) 초에 대학사 張居正이 方逢時에게 宣府·大同·山西의 군사업무를 맡겼다. 그는 군사적 지략과 변방의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모두 적절한 대책과 계책을 세웠으며, 변방을 순시하면서 龍門盤道墩에서 靖湖堡에 이르기까지 요새를 쌓아 수비할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兵部尙書 겸 右副御史의 직을 담당하였다(『明史』 卷222 「方逢時傳」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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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把漢那吉(1553~1583): Baya ači의 音譯이다. 大成台吉(Dayičing tayiji)이라고도 칭한다. 明代 蒙古 土黙特部 貴族으로, 鐵背台吉의 아들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祖父 俺答汗의 보살핌을 받았으나, 자신의 첩을 빼앗기자 隆慶 4년(1570) 明에 투항하였다. 후에 교섭을 거쳐 토묵특에 거주하는 漢人 首領 趙全 등과 맞교환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듬해(1571)에 和議가 성립되어 파한나길과 明은 得勝堡 등에서 互市를 열었다. 토묵특의 板升地區를 관장했는데 실력이 자못 강성했다. 明朝는 萬曆 4년(1576)에 파한나길을 昭勇將軍에 除授했다.
- 각주 002)
- 각주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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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4)
方逢時(1523~1596): 字는 行之이고, 號는 金湖이다. 嘉魚(지금의 湖北省에 속함) 사람으로, 嘉靖 20년(1541)에 進士가 되었으며, 宜興知縣·戶部主事·寧國知府·工部郞中·兵備副使 등을 역임하였다. 隆慶 연간(1567~1572) 초에 右僉都御史로 발탁되어 遼東을 巡撫하였다. 융경 4년(1570) 정월에 大同으로 옮겼다. 俺答(Altan)汗이 공격하자 기병 1천 명을 이끌고 지금의 감숙성 靖遠을 공략하였고, 이로 인해 俺答(Altan)汗의 군대는 퇴각하였다. 그해 겨울에 俺答의 손자가 투항하였는데, 이때 方逢時는 俺答 측과 貢市로 和約을 맺어서 변경을 안정시킬 방안을 제안하였다. 萬曆 연간(1573~1619) 초에 대학사 張居正이 方逢時에게 宣府·大同·山西의 군사업무를 맡겼다. 그는 군사적 지략과 변방의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모두 적절한 대책과 계책을 세웠으며, 변방을 순시하면서 龍門盤道墩에서 靖湖堡에 이르기까지 요새를 쌓아 수비할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兵部尙書 겸 右副御史의 직을 담당하였다(『明史』 卷222 「方逢時傳」 참조).
- 각주 005)
- 각주 006)
색인어
- 이름
- 황태길, 왕치도(王治道), 낭득공, 엄답, 파한나길(把漢那吉), 엄답, 철배태길(鐵背台吉), 엄답, 비길(比吉), 파한나길, 오아도사(襖兒都司), 엄답, 엄답, 파한나길, 아력가(阿力哥), 방봉시(方逢時), 왕숭고, 왕숭고, 파한나길, 엄답, 엄답, 파한나길, 파한나길, 엄답, 황태길, 파한나길, 황태길, 파한나길, 아력가(阿力哥)
- 지명
- 금주(錦州), 한(漢)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