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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영평(永平) 등지를 침범하니 수비 당천록(唐天祿) 등이 싸우다 죽었고, 토묵특(土默特) 또한 여러차례 요동을 침략한 내용

  • 국가
    달단(韃靼)
이듬해(1557)에 적은 2만 기병을 이끌고 대동 변경을 나누어 침략하여, 수비(守備) 당천록(唐天祿)·파총(把總) 왕연(汪淵)을 죽였다. 엄답의 동생 노파도(老把都)가 다시 무리 수만을 옹유(擁有)하여 하류구(河流口)에 들어와 영평(永平) 주 001
각주 001)
永平: 永平府로, 盧龍縣을 治所로 하여, 撫寧縣·遷安縣·昌黎縣과 灤州를 관할하였다. 지금의 하북성 灤縣·撫寧縣·昌黎縣 등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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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遷安)을 침범하였는데, 부총병 장승훈(蔣承勛)이 힘을 다해 싸우다 죽었다. [그해] 여름에 갑자기 선부마미량(馬尾梁)을 침범하여, 참장 기면(祁勉)이 전사하였다. [그해] 가을에 다시 대동우위(大同右衛) 경내에 침입하여 70여 보(堡)를 공격하여 무너뜨렸는데, 죽고 포로로 잡힌 자가 아주 많았다. [그해] 겨울 엄답의 아들 신애(辛愛) 주 002
각주 002)
辛愛(1521~1586): Sengge의 音譯인데, 僧格·興克으로도 漢譯되며, 黃台台(Qong tayi-ji)라고도 칭한다. 俺答汗의 長子로, 明 宣府 변경 밖에서 유목했다. 16세기 중엽부터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朶顔 諸衛를 침략하고, 남하하여 명조의 변경을 침범했다. 隆慶 5년(1571)에 明朝와 和議 후, 都督同知에 제수되어 大同 新平堡에서 明과 互市했다. 萬曆 10년(1582)에 부친을 이어 汗位에 올라, 圖古隆汗을 칭하고 豊州灘으로 이주했으며, 이듬해에 忠義王을 襲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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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도송채(桃松寨)라는 첩이 있는데, 부락의 두목 수령가(收令哥)와 사통(私通)하여 주살(誅殺)될까 두려워 투항해 왔다. 총독 양순(楊順)이 스스로 [이를] 뛰어난 공로(奇功)라고 과시하고, [도송채를] 조정으로 보냈다. 신애가 와서 [도송채를] 수색했으나 찾지 못하자, 대동의 여러 돈보(墩堡)를 마음대로 약탈하고, 여러 겹으로 [대동]우위를 포위하였다. 양순이 두려워하여, 이에 “적이 우리를 조전(趙全)·구부(丘富)와 바꾸기를 원한다”주 003
각주 003)
『世宗實錄』 卷453, 嘉靖 36년 11월 丁丑條에는 “順恐乃言, 虜願以我叛趙全丘富等, 易其逃婦, 本兵深以爲便, 亟奏許之”라고 나와 있다. 즉 적은 明을 배반한 조전·구부와 도망간 도송채를 바꾸고 싶어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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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거짓으로 말하였다. 병부상서 허론(許論)이 유리하다고 여겨 곧 도송채를 풀어주어 밤에 변경의 요새를 나가게 했는데, [도송채를] 속이고 서쪽으로 달려가 몰래 신애에게 알려주니, 신애가 그녀를 붙잡아 죽였다.주 004
각주 004)
이에 관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60 「俺答封貢」 嘉靖 36년 추8월條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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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 양순이 무능함을 알아채고 [대동]우위를 포위하여 더욱 위급해졌으며, 다시 군대를 나누어 선부·계진을 침범하였다. 서쪽 변강(邊疆)이 진동(震動)하여 [대동]우위의 봉화가 끊어진 것이 6개월이 되었다. 대학사(大學士) 엄숭(嚴嵩) 주 005
각주 005)
嚴嵩(1480~1567): 字는 惟中으로, 江西 袁州府 分宜縣 사람이다. 弘治 18년(1505)에 進士가 되어 庶吉士로 編修에 제수되었으나, 질병으로 고향에 돌아갔다가 다시 侍講에 임명되었으며, 吏部尙書·謹身殿大學士를 역임하였다. 嘉靖 21년(1542)에 夏言을 대신하여 입각하여 機務에 참여하였으나 科道官의 탄핵을 받았고, 후에 또 어사의 탄핵을 받아 실각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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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론과 의논하여 [대동]우위를 버리려고 하였다. 황제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여러 신하에게 조서를 내려 병사를 파견하고 군향(軍餉)을 조달하도록 하였으며, 병부시랑 강동(江東)에게 양순을 대신하도록 하였다. 당시 장수 상표(尙表)가 궤향(饋餉)을 가지고 포위된 성에 들어가서 힘을 다해 방어하였는데, 곡식이 떨어져 소와 말을 먹고, 가옥을 부수어 땔감으로 썼지만 병사들의 의지는 변하지 않았다. 상표가 때때로 출병(出兵)하여 돌진(突進)하여 싸웠는데, 엄답의 손자와 사위, 그 부장(部將) 각 1명을 붙잡았다.주 006
각주 006)
尙表는 4개월간이나 死守하였는데, 兵部尙書 楊博은 그의 功을 上申하였다. 이에 관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60 「俺答封貢」 嘉靖 37년 4월條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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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황제가 시랑 강동과 순무 양선(楊選)·총병 장승훈 등을 파견하여 각각 군대를 잘 정돈하여 진격하니, 곧 포위가 풀렸다. 다시 영창(永昌) 주 007
각주 007)
永昌: 현재는 甘肅省 金昌에 있는 縣의 명칭으로, 武威(옛 이름은 涼州)에서 북서쪽으로 약 70km에 위치하며 秦·漢代부터 西域에 이르는 교통로로서 개척되었다. 현재는 蘭新 철도를 통해 연결되어 있으며, 철도 건설 때 신석기 시대의 유물과 漢代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永昌이라는 명칭이 행정 구역 상에서 나타는 것은 至元 15년(1278)의 기록이 가장 이른데, 당시의 명칭은 永昌路였다. 明代에는 永昌衛를 두었고, 淸 雍正 3년(1725)에 永昌縣으로 변경하였는데, ‘영원히 번성하라’는 의미를 반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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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涼州)선부 적성을 약탈하고, 감주(甘州)를 14일 포위했다가 비로소 물러갔다. 토만 또한 여러 차례 요동을 침략하였다.

  • 각주 001)
    永平: 永平府로, 盧龍縣을 治所로 하여, 撫寧縣·遷安縣·昌黎縣과 灤州를 관할하였다. 지금의 하북성 灤縣·撫寧縣·昌黎縣 등지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2)
    辛愛(1521~1586): Sengge의 音譯인데, 僧格·興克으로도 漢譯되며, 黃台台(Qong tayi-ji)라고도 칭한다. 俺答汗의 長子로, 明 宣府 변경 밖에서 유목했다. 16세기 중엽부터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朶顔 諸衛를 침략하고, 남하하여 명조의 변경을 침범했다. 隆慶 5년(1571)에 明朝와 和議 후, 都督同知에 제수되어 大同 新平堡에서 明과 互市했다. 萬曆 10년(1582)에 부친을 이어 汗位에 올라, 圖古隆汗을 칭하고 豊州灘으로 이주했으며, 이듬해에 忠義王을 襲封했다. 바로가기
  • 각주 003)
    『世宗實錄』 卷453, 嘉靖 36년 11월 丁丑條에는 “順恐乃言, 虜願以我叛趙全丘富等, 易其逃婦, 本兵深以爲便, 亟奏許之”라고 나와 있다. 즉 적은 明을 배반한 조전·구부와 도망간 도송채를 바꾸고 싶어 한 것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4)
    이에 관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60 「俺答封貢」 嘉靖 36년 추8월條에 보인다. 바로가기
  • 각주 005)
    嚴嵩(1480~1567): 字는 惟中으로, 江西 袁州府 分宜縣 사람이다. 弘治 18년(1505)에 進士가 되어 庶吉士로 編修에 제수되었으나, 질병으로 고향에 돌아갔다가 다시 侍講에 임명되었으며, 吏部尙書·謹身殿大學士를 역임하였다. 嘉靖 21년(1542)에 夏言을 대신하여 입각하여 機務에 참여하였으나 科道官의 탄핵을 받았고, 후에 또 어사의 탄핵을 받아 실각당했다. 바로가기
  • 각주 006)
    尙表는 4개월간이나 死守하였는데, 兵部尙書 楊博은 그의 功을 上申하였다. 이에 관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60 「俺答封貢」 嘉靖 37년 4월條에 보인다. 바로가기
  • 각주 007)
    永昌: 현재는 甘肅省 金昌에 있는 縣의 명칭으로, 武威(옛 이름은 涼州)에서 북서쪽으로 약 70km에 위치하며 秦·漢代부터 西域에 이르는 교통로로서 개척되었다. 현재는 蘭新 철도를 통해 연결되어 있으며, 철도 건설 때 신석기 시대의 유물과 漢代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永昌이라는 명칭이 행정 구역 상에서 나타는 것은 至元 15년(1278)의 기록이 가장 이른데, 당시의 명칭은 永昌路였다. 明代에는 永昌衛를 두었고, 淸 雍正 3년(1725)에 永昌縣으로 변경하였는데, ‘영원히 번성하라’는 의미를 반영한 것이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당천록(唐天祿), 왕연(汪淵), 엄답, 노파도(老把都), 장승훈(蔣承勛), 기면(祁勉), 엄답, 신애(辛愛), 도송채(桃松寨), 수령가(收令哥), 양순(楊順), 도송채, 신애, 도송채, 양순, 조전(趙全), 구부(丘富), 허론(許論), 도송채, 도송채, 신애, 신애, 양순, 엄숭(嚴嵩), 허론, 강동(江東), 양순, 상표(尙表), 상표, 엄답, 강동, 양선(楊選), 장승훈
지명
대동, 하류구(河流口), 영평(永平), 천안(遷安), 선부, 마미량(馬尾梁), 대동우위(大同右衛), 대동, [대동]우위, [대동]우위, 선부, 계진, [대동]우위, [대동]우위, 영창(永昌), 양주(涼州), 선부, 적성, 감주(甘州), 토만, 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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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영평(永平) 등지를 침범하니 수비 당천록(唐天祿) 등이 싸우다 죽었고, 토묵특(土默特) 또한 여러차례 요동을 침략한 내용 자료번호 : jo.k_0024_0327_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