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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암달이 연수(延綏) 등을 침범하니 총병 장달(張達) 등이 막아 물리쳤으며, 사신을 파견하여 통공을 청하였으나 황제가 불허한 설명

  • 국가
    달단(韃靼)
[가정] 24년(1545) 가을에, 엄답연수대동을 침범하니, 총병 장달(張達)이 이를 막아 물리쳤다. 또 발합욕(鵓鴿峪)을 침범하였는데, 참장 장봉(張鳳)·지휘 유흠(劉欽)·천호 이찬(李瓚)·생원(生員) 왕방직(王邦直) 등이 모두 전사하였다. 마침 총독시랑 옹만달(翁萬達) 주 001
각주 001)
翁萬達(1498~1552): 字는 仁夫, 號는 東涯로 揭陽 사람이다. 嘉靖 5년(1526)에 進士가 되어 戶部 廣西 淸吏司 主事로 관직을 시작하여, 兵部尙書, 宣大總督 등을 역임했다. 가정 12년(1533)에 廣西 梧州府 知府 재직시절에 “治行第一”이라는 명성이 높았다. 가정 18년(1539)에 安南王 莫登庸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廣西 按察副使로 안남을 평정하여 參政으로 진급하고, 다시 四川 按察使로 발탁되었다. 가정 23년(1544)에 陝西 布政使, 이듬해(1545)에는 陝西 巡撫가 되었다가, 兵部 右侍郞이 되어 宣府, 大同, 山西, 保定 등의 軍務를 總督하였다. 가정 28년(1548)에 부친상을 당했으나 北邊의 상황이 위급하여 조정에서는 그를 다시 임용하고자 했으나 嚴嵩의 반대로 重用되지 못하고 결국 관직에서 쫓겨나 民이 되었다. 가정 31년(1552)에 황제가 그를 兵部尙書에 복직시키고자 하였으나 귀향 도중 사망하였다. 사후 15년인 隆慶 원년(1567)에 太子少保에 追贈되었고, 諡號는 襄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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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병 주상문(周尙文)이 군대를 엄히 정비하여 양화(陽和) 주 002
각주 002)
陽和: 陽和口를 일컫는데, 지금의 山西省 陽高 西北 長城의 隘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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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수비하니, 적이 군대를 이끌고 물러갔다. 이듬해(1546) 여름에, 엄답이 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대동 변방에 이르러 통공을 청하였는데, 변방의 병졸이 그(사신)를 죽였다. [그해] 가을에 다시 와서 청하니, 옹만달이 다시 소(疏)를 올려 보고하였으나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적이 10만 기병으로 서쪽으로 향해 보안(保安) 주 003
각주 003)
保安:지금의 河北省 涿鹿縣을 말한다. 元代에 奉聖州를 두었다가 地震으로 保安州로 바꾸었다. 明 永樂 연간(1403~1424)에 保安衛城을 쌓았고, 景泰 3년(1452)에 衛城을 東北쪽의 雷家站으로 옮겨 ‘新保安’으로 불렀다. 民國 2년(1913)에 保安州를 保安縣으로 바꾸었다가, 陝北의 保安縣과 이름이 겹쳐 涿鹿縣으로 다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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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침입하여 경양(慶陽) 주 004
각주 004)
慶陽: 지금의 甘肅省 東部의 慶陽市를 말한다. 陝甘寧 3省 交界地로, 明代에는 陝西 布政司 소속의 慶陽府였다. 또한 慶陽衛도 증설하고, 寧州와 安化縣·合水縣·環縣·眞寧縣을 관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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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현(環縣)을 약탈하고 동으로 향하여, 1만 기병으로 금(錦)·의(義)를 침범하였다. 총독 삼변(三邊) 주 005
각주 005)
三邊: 漢나라 때에는 匈奴·南越·朝鮮을 일컫기도 했으나 명대에는 延綏·甘肅·寧夏 三地區를 일컬어 三邊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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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랑 증선(曾銑) 주 006
각주 006)
曾銑(1509~1548): 字는 子重으로 浙江 台州 黃岩縣 사람이다. 嘉靖 8년(1529)에 進士가 되어 福建 長樂 知縣이 되었다. 巡按遼東御史로 遼東에 부임하여 遼陽 兵變을 크게 평정하고 大理寺丞, 右僉都御史, 山東巡撫 등에 발탁되었다. 가정 25년(1546)에 兵部侍郞이 되어 陝西三邊의 軍務를 總督하였다. 그해 8월에 증선이 「重論複河套疏」를 올렸는데, 權臣 嚴嵩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가정 27년(1548)에 夏言과 함께 투옥되었다가 죽었다. 隆慶 원년(1567)에 누명을 벗고, 兵部尙書에 追贈되었고, 諡號는 襄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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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참장 이진(李珍) 등을 이끌고 마량산(馬梁山) 뒤에 있는 적의 근거지를 곧바로 공격하여 100여 명을 참하니 적이 비로소 퇴각하였다.

  • 각주 001)
    翁萬達(1498~1552): 字는 仁夫, 號는 東涯로 揭陽 사람이다. 嘉靖 5년(1526)에 進士가 되어 戶部 廣西 淸吏司 主事로 관직을 시작하여, 兵部尙書, 宣大總督 등을 역임했다. 가정 12년(1533)에 廣西 梧州府 知府 재직시절에 “治行第一”이라는 명성이 높았다. 가정 18년(1539)에 安南王 莫登庸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廣西 按察副使로 안남을 평정하여 參政으로 진급하고, 다시 四川 按察使로 발탁되었다. 가정 23년(1544)에 陝西 布政使, 이듬해(1545)에는 陝西 巡撫가 되었다가, 兵部 右侍郞이 되어 宣府, 大同, 山西, 保定 등의 軍務를 總督하였다. 가정 28년(1548)에 부친상을 당했으나 北邊의 상황이 위급하여 조정에서는 그를 다시 임용하고자 했으나 嚴嵩의 반대로 重用되지 못하고 결국 관직에서 쫓겨나 民이 되었다. 가정 31년(1552)에 황제가 그를 兵部尙書에 복직시키고자 하였으나 귀향 도중 사망하였다. 사후 15년인 隆慶 원년(1567)에 太子少保에 追贈되었고, 諡號는 襄毅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2)
    陽和: 陽和口를 일컫는데, 지금의 山西省 陽高 西北 長城의 隘口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3)
    保安:지금의 河北省 涿鹿縣을 말한다. 元代에 奉聖州를 두었다가 地震으로 保安州로 바꾸었다. 明 永樂 연간(1403~1424)에 保安衛城을 쌓았고, 景泰 3년(1452)에 衛城을 東北쪽의 雷家站으로 옮겨 ‘新保安’으로 불렀다. 民國 2년(1913)에 保安州를 保安縣으로 바꾸었다가, 陝北의 保安縣과 이름이 겹쳐 涿鹿縣으로 다시 바꾸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4)
    慶陽: 지금의 甘肅省 東部의 慶陽市를 말한다. 陝甘寧 3省 交界地로, 明代에는 陝西 布政司 소속의 慶陽府였다. 또한 慶陽衛도 증설하고, 寧州와 安化縣·合水縣·環縣·眞寧縣을 관할했다. 바로가기
  • 각주 005)
    三邊: 漢나라 때에는 匈奴·南越·朝鮮을 일컫기도 했으나 명대에는 延綏·甘肅·寧夏 三地區를 일컬어 三邊이라 했다. 바로가기
  • 각주 006)
    曾銑(1509~1548): 字는 子重으로 浙江 台州 黃岩縣 사람이다. 嘉靖 8년(1529)에 進士가 되어 福建 長樂 知縣이 되었다. 巡按遼東御史로 遼東에 부임하여 遼陽 兵變을 크게 평정하고 大理寺丞, 右僉都御史, 山東巡撫 등에 발탁되었다. 가정 25년(1546)에 兵部侍郞이 되어 陝西三邊의 軍務를 總督하였다. 그해 8월에 증선이 「重論複河套疏」를 올렸는데, 權臣 嚴嵩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가정 27년(1548)에 夏言과 함께 투옥되었다가 죽었다. 隆慶 원년(1567)에 누명을 벗고, 兵部尙書에 追贈되었고, 諡號는 襄湣이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엄답, 장달(張達), 장봉(張鳳), 유흠(劉欽), 이찬(李瓚), 왕방직(王邦直), 옹만달(翁萬達), 주상문(周尙文), 엄답, 옹만달, 삼변(三邊), 증선(曾銑), 이진(李珍)
지명
연수, 대동, 발합욕(鵓鴿峪), 양화(陽和), 대동, 보안(保安), 경양(慶陽), 환현(環縣), 금(錦), 의(義), 마량산(馬梁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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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달이 연수(延綏) 등을 침범하니 총병 장달(張達) 등이 막아 물리쳤으며, 사신을 파견하여 통공을 청하였으나 황제가 불허한 설명 자료번호 : jo.k_0024_0327_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