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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제농이 10만 군대를 하란산에 주둔하고 양주(涼州) 등지를 침략하니 부총병 왕보(王輔) 등이 막아낸 내용

  • 국가
    달단(韃靼)
[가정] 15년(1536) 여름에, 길낭이 10만 군대를 이끌고 하란산에 주둔하여 병사를 나누어 양주(涼州)를 침략하니, 부총병 왕보(王輔) 주 001
각주 001)
王輔(?~1626): 遼東 사람으로, 明末 東江軍 將領을 지냈고 參將을 역임했다. 天啓 6년(1626) 2월에 淸의 大軍이 寧遠을 공격했을 때, 毛文龍은 왕보와 參將 林茂春을 파견하여 海州를 습격하여 큰 성과를 올렸다. 그해 3월에 會安堡를 야간에 습격하여 물리치고, 4월에는 鞍山堡를 습격하여 물리쳤다. 淸의 大兵이 포위하여 왕보가 힘껏 싸웠으나 戰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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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이들을 막아내고 57명을 참하였다. 또한 장랑(莊浪) 경내를 침입하였는데, 총병 강석분수령(分水嶺)에서 그들을 만나 세 번 싸워 세 번 [모두] 이겼다. 또 연수영하 변경을 침입하였다. [그해] 겨울에 다시 대동을 침범하고 선부·대동 변경을 침입해 약탈하니, 총제시랑(總制侍郞) 유천화(劉天和) 주 002
각주 002)
劉天和(1479~1545): 字는 養和, 號는 松石으로 湖廣 麻城 사람이다. 正德 3년(1508)에 進士가 되어 南京 禮部主事에 除授되었다가, 후에 湖州 知府가 되었는데 惠政을 많이 베풀었다. 嘉靖 초에 山西 提學副使, 南京 太常少卿 등에 발탁되었다. 右僉都御史로 甘肅의 屯政을 감독하고, 陝西를 巡撫하였는데 성과가 많아 右副都御史로 진급하였다. 黃河가 南徙하여 河道를 맡아 3개월도 안되어 공사를 끝내 兵部 左侍郞이 되어 三邊軍務를 總制하였다. 吉囊이 涼州, 寧夏 등지를 침입했을 때, 수차례 공격하여 물리쳤다. 가정 19년(1540)에 南京 戶部尙書, 가정 20년(1541)에는 兵部尙書가 되어 團營을 提督하였다가, 이듬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사후에 少保에 追贈되었고, 諡號는 莊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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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상서(總督尙書) 양수례(楊守禮)와 순무도어사(巡撫都御史) 초서(楚書) 주 003
각주 003)
楚書: 字는 國寶로 原籍은 南直隸 江都府(지금의 江蘇 楊州)였으나, 후에 寧夏 左屯衛(지금의 寧夏 銀川)로 籍을 바꾸었다. 嘉靖 2년(1523)에 進士가 되어 兵部主事가 되었다. 가정 12년(1533)에 大同鎭에서 士兵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대동성을 수복하는데 공을 세워 太仆寺 少卿으로 진급하였다. 가정 18년(1539)에 右僉都御史가 되어 宣府를 巡撫하였다. 이듬해(1540) 가을, 吉囊이 大同 등지를 침입했을 때, 指揮 總兵官 白爵三을 지휘하여 萬全右衛(지금의 河北 萬全) 경계에서 적을 크게 물리쳐, 그 공으로 右副都御가 되었다. 그러나 가정 20년(1541) 俺答, 阿不孩가 通市를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吉囊部와 연합하여 침입해 와 대동 이래에 큰 피해를 입었다.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초서는 免職되어 寧夏로 돌아갔다. 초서는 文武에 능했으나, 詩文은 失傳되고 〈寧夏按察司創建碑文〉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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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모두 힘을 다해 그들을 막았다.주 004
각주 004)
이와 관련된 내용은 『殊域周咨錄』 卷20 「韃靼」 嘉靖 19년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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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王輔(?~1626): 遼東 사람으로, 明末 東江軍 將領을 지냈고 參將을 역임했다. 天啓 6년(1626) 2월에 淸의 大軍이 寧遠을 공격했을 때, 毛文龍은 왕보와 參將 林茂春을 파견하여 海州를 습격하여 큰 성과를 올렸다. 그해 3월에 會安堡를 야간에 습격하여 물리치고, 4월에는 鞍山堡를 습격하여 물리쳤다. 淸의 大兵이 포위하여 왕보가 힘껏 싸웠으나 戰死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2)
    劉天和(1479~1545): 字는 養和, 號는 松石으로 湖廣 麻城 사람이다. 正德 3년(1508)에 進士가 되어 南京 禮部主事에 除授되었다가, 후에 湖州 知府가 되었는데 惠政을 많이 베풀었다. 嘉靖 초에 山西 提學副使, 南京 太常少卿 등에 발탁되었다. 右僉都御史로 甘肅의 屯政을 감독하고, 陝西를 巡撫하였는데 성과가 많아 右副都御史로 진급하였다. 黃河가 南徙하여 河道를 맡아 3개월도 안되어 공사를 끝내 兵部 左侍郞이 되어 三邊軍務를 總制하였다. 吉囊이 涼州, 寧夏 등지를 침입했을 때, 수차례 공격하여 물리쳤다. 가정 19년(1540)에 南京 戶部尙書, 가정 20년(1541)에는 兵部尙書가 되어 團營을 提督하였다가, 이듬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사후에 少保에 追贈되었고, 諡號는 莊襄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3)
    楚書: 字는 國寶로 原籍은 南直隸 江都府(지금의 江蘇 楊州)였으나, 후에 寧夏 左屯衛(지금의 寧夏 銀川)로 籍을 바꾸었다. 嘉靖 2년(1523)에 進士가 되어 兵部主事가 되었다. 가정 12년(1533)에 大同鎭에서 士兵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대동성을 수복하는데 공을 세워 太仆寺 少卿으로 진급하였다. 가정 18년(1539)에 右僉都御史가 되어 宣府를 巡撫하였다. 이듬해(1540) 가을, 吉囊이 大同 등지를 침입했을 때, 指揮 總兵官 白爵三을 지휘하여 萬全右衛(지금의 河北 萬全) 경계에서 적을 크게 물리쳐, 그 공으로 右副都御가 되었다. 그러나 가정 20년(1541) 俺答, 阿不孩가 通市를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吉囊部와 연합하여 침입해 와 대동 이래에 큰 피해를 입었다.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초서는 免職되어 寧夏로 돌아갔다. 초서는 文武에 능했으나, 詩文은 失傳되고 〈寧夏按察司創建碑文〉만 남아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4)
    이와 관련된 내용은 『殊域周咨錄』 卷20 「韃靼」 嘉靖 19년條 참조.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길낭, 왕보(王輔), 강석, 유천화(劉天和), 양수례(楊守禮), 초서(楚書)
지명
하란산, 양주(涼州), 장랑(莊浪), 분수령(分水嶺), 연수, 영하, 대동, 선부, 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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