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嘉靖) 연간, 감숙(甘肅)과 대동 등을 침범하여 총병 강석(姜奭) 등이 싸워 패퇴시킨 설명
가정(嘉靖)주 001 4년(1525) 봄에, 1만 기병으로 감숙(甘肅)을 침략하였다. 총병 강석(姜奭)이 고수돈(苦水墩)
주 002에서 막았으며, 그 수령을 참하였다. 이듬해(1526)에 대동과 선부를 침범하였는데, 역복랄(亦卜剌)이 다시 하란산(賀蘭山) 뒤에 주둔하여 유목(遊牧)하면서 자주 변경을 소란스럽게 하였다. 이듬해(1527) 봄에 소왕자가 선부를 두 차례 침략하였다. 참장 왕경(王經)·관산(關山)이 차례로 전사하였다.주 003 [그해] 가을에, 수만 기병을 이끌고 영하(寧夏) 변경을 침범하여, 상서 왕헌(王憲)
주 004
각주 004)

이 총병 정경(鄭卿) 등을 이끌고 그들을 패퇴시키고 300여 명을 참하였다.주 005 이듬해(1528) 봄에 산서를 침략하였다. 여름에는 대동 중로(中路)에 침입하였는데, 참장 이진(李蓁)이 이를 막아 물리쳤다. [그해] 겨울에 다시 대동을 침략하여, 지휘 조원(趙源)이 전사하였다.王憲: 생졸년 미상이다. 東平人으로, 字는 維綱이다. 弘治 3년(1490)의 進士로 阜平·滑縣 知縣을 역임하였으며, 이후 御史에 임명되었다. 正德 初에 大理寺丞이 되었고, 右僉都御史로 승진하여 甘肅의 屯田을 관리하였다. 京師에 돌아와 右副都御史에 임명되어 遼東의 巡撫職을 수행하였다. 이후 戶部右侍郞으로 巡撫陝西가 되었으며 다시 兵部右侍郞에 임명되었다. 武宗이 宸濠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 南征을 행할 때, 戶·兵·工 三部의 官員 各 1명을 이끌고 軍餉을 담당하였으며, 이후 곧 兵部尙書에 임명되었다. 世宗 嘉靖帝가 즉위하여, 給事中 史道의 彈劾으로 파직되었으나 가정 4년(1525)에 三邊總制에 추거되었고, 임무를 잘 수행한 공로로 太子太保가 더해졌다. 이후 南京兵部尙書가 되었고, 곧 左都御史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朔州에 변고가 생겨 宣·大總督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를 거부하여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이후 다시 兵部尙書에 임명되었으나 곧 노년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그의 諡號는 康毅이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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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4)
王憲: 생졸년 미상이다. 東平人으로, 字는 維綱이다. 弘治 3년(1490)의 進士로 阜平·滑縣 知縣을 역임하였으며, 이후 御史에 임명되었다. 正德 初에 大理寺丞이 되었고, 右僉都御史로 승진하여 甘肅의 屯田을 관리하였다. 京師에 돌아와 右副都御史에 임명되어 遼東의 巡撫職을 수행하였다. 이후 戶部右侍郞으로 巡撫陝西가 되었으며 다시 兵部右侍郞에 임명되었다. 武宗이 宸濠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 南征을 행할 때, 戶·兵·工 三部의 官員 各 1명을 이끌고 軍餉을 담당하였으며, 이후 곧 兵部尙書에 임명되었다. 世宗 嘉靖帝가 즉위하여, 給事中 史道의 彈劾으로 파직되었으나 가정 4년(1525)에 三邊總制에 추거되었고, 임무를 잘 수행한 공로로 太子太保가 더해졌다. 이후 南京兵部尙書가 되었고, 곧 左都御史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朔州에 변고가 생겨 宣·大總督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를 거부하여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이후 다시 兵部尙書에 임명되었으나 곧 노년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그의 諡號는 康毅이다.
- 각주 005)
색인어
- 이름
- 강석(姜奭), 역복랄(亦卜剌), 소왕자, 왕경(王經), 관산(關山), 왕헌(王憲), 정경(鄭卿), 이진(李蓁), 조원(趙源)
- 지명
- 감숙(甘肅), 고수돈(苦水墩), 대동, 선부, 하란산(賀蘭山), 선부, 영하(寧夏), 산서, 대동, 대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