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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중관 왕직(汪直)의 무리가 권력을 장악하고 변경을 지키는 공을 차지하려 한 일과 적이 물러갔다 다시 침입해와 평안한 세월이 없었다는 글

  • 국가
    달단(韃靼)
그때 중관(中官)주 001
각주 001)
中官: 內職의 官, 京官 등의 뜻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환관을 일컬으며 閹人, 寺人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周代부터 淸末까지 환관이 있었는데, 『明史』 卷74, 「職官志」3 宦官條에 의하면, 명대의 환관기관으로는 宦官十二監이 있었고, 이들 기관에서 政事에 관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특히, 司禮監은 그 중심에 있었고, 각 기관에는 太監(正四品), 小監(從四品), 監丞(正五品), 典簿(正六品), 從六品인 長隨, 奉御 등의 職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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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직(汪直) 주 002
각주 002)
汪直(?~1487): 明朝 成化 연간(1465~1487)의 宦官이다. 廣西 桂平 西北 大藤峽 사람으로 猺族이다. 성화 3년(1467)에 南蠻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襄城伯 李瑾, 尙書 程信이 군대를 이끌고 토벌하였다. 당시 포로로 붙잡은 남녀를 王侯들에게 나주어 주었는데, 이때 포로로 잡혀왔던 왕직도 환관이 되어 憲宗의 寵妃 萬貴妃의 신변에서 일하다가 후에 伺察刺事로 파견되어 황제의 신임을 얻어 마침내 만귀비의 도움을 얻어 朝廷의 大權을 장악하였다. 1477년 정보기관인 西廠이 신설되자 그 장관이 되어 檢察刑獄의 임무를 맡았다. 처음에는 南京鎭監 覃力朋의 비위사실을 적발하여 공이 있었으나, 성화제의 총애를 믿고 무고한 투옥을 하는 등 방자한 행위가 늘어나 면직되었다. 그러나 곧 복직하여 반대자를 물리치고 그 위세는 천하를 좌우하였다. 서창을 관장하고, 御馬監掌印太監을 겸직하여 그 권세가 錦衣衛와 東廠보다도 높았다. 성화 15년(1479) 헌종은 왕직을 訓邊하여 九邊의 兵馬를 통제할 수 있게 하였다. 왕직의 전횡을 빗대어 “天下只識汪太監”이라고 풍자하기도 하였다. 그에 대한 비난이 높아져 황제의 총애를 잃게 되자 실각하였다. 서창도 헌종 사후 폐지되었고, 그 일당도 처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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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황제의 은총을 믿고 권력을 장악하였는데, 변경을 지키는 공을 세워 자신의 권세를 세우려고 생각하였고, 왕월·주영이 그에게 빌붙었다. [성화] 16년(1480) 봄에 변경의 장수가 상언하여, 적장(敵將)이 황하를 건너려고 한다는 말을 전하자 즉시 주영을 장군으로 삼았다. 왕직왕월이 군대를 감독하여 변경에 도착하여, 기약 없이 위녕해자(威寧海子) 주 003
각주 003)
威寧海子: 지금의 貴州省 西部의 彝族·回族·苗族自治縣인 威寧縣 지역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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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적을 습격하여 크게 물리치고, 대동에서 또한 패퇴시켰다.주 004
각주 004)
威寧海子에서의 전투는 成化 16년(1480) 2월의 일로, 이에 관련된 내용은 왕직과 왕월이 올린 승전 보고에 자세하다(『憲宗實錄』 卷201 成化 16년 3월 丙戌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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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은 공작(公爵)으로 승진하여 세습(世襲)하도록 했으며,주 005
각주 005)
주영이 공작으로 승진한 것은 成化 15년(1479) 12월의 일이며, 建州를 토벌한 공적에 따른 조치였다(『憲宗實錄』 卷198 成化 15년 12월 辛未條 참조). 또한 爵位를 세습하도록 했던 것은 成化 16년(1480) 12월에 대동 침입군을 방어한 공으로, 成化 17년(1481) 3월에 일어난 일이다(『憲宗實錄』 卷213 成化 17년 3월 辛卯條: 論大同征進將士功升賞 …… 永世襲公爵, 越加升太子太傅, 歲增祿米四百石, 本色三百石, 折色一百石, 掌前軍都督府事, 總五軍營兵, 提督團營操練, 仍蔭其一子, 爲錦衣衛, 世襲百戶, 領神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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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월은 위녕백(威寧伯)에 봉하고, 왕직은 녹봉을 올려 300석(石)에 이르렀다. 얼마 후, 조서를 내려 왕월에게 주영을 대신하여 군대를 통솔하게 하였다. 이에 역사마인(亦思馬因) 등이 더욱 무리를 모아 변경을 침범했고, 요(遼)의 변경에까지 미쳤다.주 006
각주 006)
亦思馬因은 成化 16년(1480) 12월에는 大同에, 成化 17년(1481) 4월에는 宣府에, 成化 18년(1482) 6월에는 延綏에 침범하였다(『明史』 卷14, 「憲宗本紀」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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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가을에 적의 3만 기병이 대동을 침범하였는데, 연이은 군영이 50리에 이어졌고 사람과 가축을 죽이고 약탈한 것이 수만이었다. 총병(總兵) 허녕이 그들을 막아 군대가 패배했으나 이겼다고 보고하였다.주 007
각주 007)
이때 전투를 지휘한 것은 總兵 許寧·巡撫 郭鏜·鎭守內官 蔡新 등이었는데, 이들은 패배의 책임으로 下獄되었다(관련 내용은 『殊域周咨錄』 卷18 「韃靼」 成化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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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은 이미 이로운 곳을 얻어 멀리 순성천(順聖川) 주 008
각주 008)
順聖川: 지금의 河北省 張家口市 陽原縣에 위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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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말을 달려 침입하고, 분산하여 혼원(渾源) 주 009
각주 009)
渾源: 山西省에 위치한 縣名이다. 西漢 시기에 부근에 崞山(지금의 渾源 恒山)이 있어서 崞縣이라 불렸으나, 唐代부터 渾河가 境內에서 발원한다는 이유로 渾源縣이라 불렸다. 元初 恒陰縣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얼마 후 다시 渾源州가 되었다. 明淸 시기에는 모두 渾源州라고 불렀으며, 大同府 소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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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朔) 등 여러 주(州)를 약탈하였다. 선부순무(宣府巡撫) 진굉(秦紘) 주 010
각주 010)
秦紘(1426~1505): 字는 世纓으로서 山東 單縣 출신이다. 景泰 2년(1451)에 進士가 되었다. 南京御史로부터 官界에 진출했는데, 환관의 탄핵을 받아 驛丞이 되기도 하였다. 天順 연간(1457~1464)·成化 연간(1465~1487)에 각지의 지방관을 역임하였고, 후에는 右僉都御史로서 宣府를 巡撫하였으며, 戶部尙書로까지 승진하였다. 관료로서 일생을 청렴 강직하게 살았고, 비타협적으로 불의에 저항하였다. 사후에 襄毅라는 諡號를 받았다(『山東通志』 卷283 「人物」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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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병 주옥(周玉)이 힘을 다해 싸워 그들을 막았다. 산서순무(山西巡撫) 변용(邊鏞), 참장 지옥(支玉) 등이 모두 힘껏 막았지만 적이 물러갔다가 곧 다시 침입해와 성화 연간(1465~1487) 말까지 평안한 세월이 없었다.

  • 각주 001)
    中官: 內職의 官, 京官 등의 뜻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환관을 일컬으며 閹人, 寺人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周代부터 淸末까지 환관이 있었는데, 『明史』 卷74, 「職官志」3 宦官條에 의하면, 명대의 환관기관으로는 宦官十二監이 있었고, 이들 기관에서 政事에 관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특히, 司禮監은 그 중심에 있었고, 각 기관에는 太監(正四品), 小監(從四品), 監丞(正五品), 典簿(正六品), 從六品인 長隨, 奉御 등의 職官이 있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汪直(?~1487): 明朝 成化 연간(1465~1487)의 宦官이다. 廣西 桂平 西北 大藤峽 사람으로 猺族이다. 성화 3년(1467)에 南蠻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襄城伯 李瑾, 尙書 程信이 군대를 이끌고 토벌하였다. 당시 포로로 붙잡은 남녀를 王侯들에게 나주어 주었는데, 이때 포로로 잡혀왔던 왕직도 환관이 되어 憲宗의 寵妃 萬貴妃의 신변에서 일하다가 후에 伺察刺事로 파견되어 황제의 신임을 얻어 마침내 만귀비의 도움을 얻어 朝廷의 大權을 장악하였다. 1477년 정보기관인 西廠이 신설되자 그 장관이 되어 檢察刑獄의 임무를 맡았다. 처음에는 南京鎭監 覃力朋의 비위사실을 적발하여 공이 있었으나, 성화제의 총애를 믿고 무고한 투옥을 하는 등 방자한 행위가 늘어나 면직되었다. 그러나 곧 복직하여 반대자를 물리치고 그 위세는 천하를 좌우하였다. 서창을 관장하고, 御馬監掌印太監을 겸직하여 그 권세가 錦衣衛와 東廠보다도 높았다. 성화 15년(1479) 헌종은 왕직을 訓邊하여 九邊의 兵馬를 통제할 수 있게 하였다. 왕직의 전횡을 빗대어 “天下只識汪太監”이라고 풍자하기도 하였다. 그에 대한 비난이 높아져 황제의 총애를 잃게 되자 실각하였다. 서창도 헌종 사후 폐지되었고, 그 일당도 처벌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3)
    威寧海子: 지금의 貴州省 西部의 彝族·回族·苗族自治縣인 威寧縣 지역을 말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4)
    威寧海子에서의 전투는 成化 16년(1480) 2월의 일로, 이에 관련된 내용은 왕직과 왕월이 올린 승전 보고에 자세하다(『憲宗實錄』 卷201 成化 16년 3월 丙戌條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5)
    주영이 공작으로 승진한 것은 成化 15년(1479) 12월의 일이며, 建州를 토벌한 공적에 따른 조치였다(『憲宗實錄』 卷198 成化 15년 12월 辛未條 참조). 또한 爵位를 세습하도록 했던 것은 成化 16년(1480) 12월에 대동 침입군을 방어한 공으로, 成化 17년(1481) 3월에 일어난 일이다(『憲宗實錄』 卷213 成化 17년 3월 辛卯條: 論大同征進將士功升賞 …… 永世襲公爵, 越加升太子太傅, 歲增祿米四百石, 本色三百石, 折色一百石, 掌前軍都督府事, 總五軍營兵, 提督團營操練, 仍蔭其一子, 爲錦衣衛, 世襲百戶, 領神槍). 바로가기
  • 각주 006)
    亦思馬因은 成化 16년(1480) 12월에는 大同에, 成化 17년(1481) 4월에는 宣府에, 成化 18년(1482) 6월에는 延綏에 침범하였다(『明史』 卷14, 「憲宗本紀」2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7)
    이때 전투를 지휘한 것은 總兵 許寧·巡撫 郭鏜·鎭守內官 蔡新 등이었는데, 이들은 패배의 책임으로 下獄되었다(관련 내용은 『殊域周咨錄』 卷18 「韃靼」 成化條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8)
    順聖川: 지금의 河北省 張家口市 陽原縣에 위치함. 바로가기
  • 각주 009)
    渾源: 山西省에 위치한 縣名이다. 西漢 시기에 부근에 崞山(지금의 渾源 恒山)이 있어서 崞縣이라 불렸으나, 唐代부터 渾河가 境內에서 발원한다는 이유로 渾源縣이라 불렸다. 元初 恒陰縣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얼마 후 다시 渾源州가 되었다. 明淸 시기에는 모두 渾源州라고 불렀으며, 大同府 소속이었다. 바로가기
  • 각주 010)
    秦紘(1426~1505): 字는 世纓으로서 山東 單縣 출신이다. 景泰 2년(1451)에 進士가 되었다. 南京御史로부터 官界에 진출했는데, 환관의 탄핵을 받아 驛丞이 되기도 하였다. 天順 연간(1457~1464)·成化 연간(1465~1487)에 각지의 지방관을 역임하였고, 후에는 右僉都御史로서 宣府를 巡撫하였으며, 戶部尙書로까지 승진하였다. 관료로서 일생을 청렴 강직하게 살았고, 비타협적으로 불의에 저항하였다. 사후에 襄毅라는 諡號를 받았다(『山東通志』 卷283 「人物」3 참조).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왕직(汪直), 왕월, 주영, 주영, 왕직, 왕월, 주영, 왕월, 왕직, 왕월, 주영, 역사마인(亦思馬因), 허녕, 진굉(秦紘), 주옥(周玉), 변용(邊鏞), 지옥(支玉)
지명
황하, 위녕해자(威寧海子), 대동, 요(遼), 순성천(順聖川), 혼원(渾源), 삭(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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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관 왕직(汪直)의 무리가 권력을 장악하고 변경을 지키는 공을 차지하려 한 일과 적이 물러갔다 다시 침입해와 평안한 세월이 없었다는 글 자료번호 : jo.k_0024_0327_03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