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가 무정후 조보(趙輔)를 장군으로 삼아 제로(諸路)를 지휘하게 하였으며, 문도날(們都埒)이 하투를 침입하여 가한을 칭한 내용
[성화] 7년(1471) 봄에, 주영이 공격하고 수비할 두 가지 책략을 올렸는데,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양식이 부족하고 말이 궁핍하여 진격하여 초무하기 어렵다하고, 변장(邊將)에게 신중하게 방어하여 만전을 도모하라고 명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이부시랑(吏部侍郞) 섭성(葉盛)
주 001
각주 001)

이 변경을 순시하였는데,주 002 연수순무 여자준(余子俊)
주 003葉盛(1420~1474): 字는 與中, 號는 蛻庵, 自號는 白泉으로 또한 涇東道人, 澱東老漁라고 불렸다. 江蘇 昆山 사람으로, 正統 14년(1449) 瓦剌軍이 土木堡에서 英宗을 포로로 붙잡은 후, 北京城 가까이 왔을 때, 섭성은 謙調을 도와 重兵을 모아 瓦剌軍을 격퇴하여 都給事中으로 승급하였다. 그 후 山西 右參政으로 발탁되어 宣府鎭(지금의 山西 大同)의 錢餉을 감독하였다. 景泰 3년(1452)에 巡邊御史 李秉의 추천으로 獨石, 馬營, 龍門, 衛所 4城의 軍務를 보좌하였다. 그가 재직시절에 吏治가 정돈되고 武備가 갖추어지고, 開墾이 잘 되어 풍족해졌다고 한다. 그의 치적은 明代 何孟春이 쓴 『餘冬序錄』에도 나와 있는데, “葉文莊公盛巡撫宣府時, 修複官牛, 官田之法, 墾地日廣, 積糧日多, 以其餘歲易戰馬千八百餘匹. 其屯堡廢缺者, 鹹修複之, 不數月, 完七百餘所”라고 기록되어 있다. 天順 2년(1458)에 都察院 右僉都御史, 兩廣巡撫로 발탁되었다가, 天順 7년(1463)에 左僉都御史가 되어, 宣府鎭을 巡撫하였다. 成化 3년(1467)에 禮部 右侍郞, 성화 8년(1472)에 吏部 左侍郞이 되었다. 諡號는 文莊이었다.
각주 003)

및 왕월과 함께 변장(邊牆)을 수축하고 대보(臺堡)를 설립하는 것을 의논하였다.주 004 [그해] 겨울에, 적이 북방 변경을 침입하였는데, 참장 전량(錢亮)이 연이어 패배했으나 왕월 등은 구원할 수 없었다. 병부상서 백규(白圭)가 파견할 대장군을 택하여 적에 대한 일을 맡기자고 하였는데, 마침 섭성이 돌아오고 왕월 또한 경사에 이르러 일을 계획하니, 이에 조정의 논의를 모아 대규모로 파병하여 하투를 구하자고 청하였다. 황제가 무정후(武靖侯) 조보(趙輔)
주 005余子俊(1429~1489): 字는 士英으로, 四川 靑神 사람이다. 景泰 연간(1450~1456)에 進士가 되어 戶部主事 10년 재직기간 동안 청렴하고 유능하다는 명성을 얻었다. 후에 右副都御使로 발탁되어, 西安 通濟渠 開鑿하고, 延綏에서 동으로 淸水營에서 서쪽으로 花寫池까지 직접 邊牆의 城堡를 축조하였다. 成化 12년(1476) 陝西로 옮겨, 西安城 西北쪽의 餘公渠를 개착하고 涇陰에서 산을 뚫어 田 1,000여 頃에 물을 끌어다 대었다. 성화 20년(1484)에 戶部尙書 겸 右副都御史가 되어 大同과 宣府의 軍務를 總督하였다. 그는 延綏 邊牆의 사례를 선부와 대동에서도 시행하자고 주장하였으나, 당시 災害가 잇달아 발생하여 公私가 피폐하여 言官이 그를 탄핵하였다. 憲宗 말에 兵部尙書를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났다(『明史』 卷178 「余子俊傳」 참조).
각주 005)

를 장군으로 삼아 제로(諸路)를 지휘하게 하고, 왕월에게는 예전 그대로 군대를 감독하게 하였다. 적이 연수를 대거 침입하였는데 조보가 막을 수 없어 마침내 소환하고,주 006 영진백(寧晉伯) 유취(劉聚)에게 대신하게 하였으나, 유취 또한 공을 세우지 못했다. 그런데 모리해·패로내·알라출이 점차 쇠락하고, 만도로(滿都魯, 1438~1478; 재위 1475~1478)주 007가 하투를 침입하여 가한(可汗)을 칭했으며, 가가사란을 태사(太師)로 삼았다.주 008
趙輔: 字는 良佐로, 鳳陽 사람이다. 부친의 직위를 세습하여 濟寧衛 指揮使가 되었다. 景帝가 즉위하여 尙書 王直 등이 천거하여 都指揮僉事가 되어, 左參將으로 懷來를 지켰다. 成化 원년(1465)에 中府 都督同知로 征夷將軍이 되어 韓雍과 함께 兩廣의 蠻夷를 토벌하였는데, 大藤峽을 공격하여 그 공적으로 武靖伯에 봉해졌다. 성화 3년(1468)에 總兵으로 迤東을 정벌하여 都御史 李秉과 함께 撫順에 들어가 공을 세워 武靖侯가 되었다. 성화 8년(1473)에 河套를 정벌할 때 조보는 將軍으로, 陝西·延綏·寧夏 三鎭의 군대를 모두 통솔하였다. 보조가 楡林에 이르렀을 때 적이 이미 깊이 들어와 침략하여 제어할 수 없게 되어 王越과 함께 罷兵을 疏請하였다. 言官이 그 죄를 논하였으나 황제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보는 돌아와 성화 12년(1477)까지 京營을 감독하였다. 사후 容國公이 追贈되었고, 諡號는 恭肅이었다. 조보는 어려서부터 俊辨에 재주가 있고 詞翰을 잘 써서 文士들과 많이 교류하여 거듭되는 탄핵 논의에도 불구하고 큰 어려움이 없었다(『明史』 卷155 「趙輔傳」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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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葉盛(1420~1474): 字는 與中, 號는 蛻庵, 自號는 白泉으로 또한 涇東道人, 澱東老漁라고 불렸다. 江蘇 昆山 사람으로, 正統 14년(1449) 瓦剌軍이 土木堡에서 英宗을 포로로 붙잡은 후, 北京城 가까이 왔을 때, 섭성은 謙調을 도와 重兵을 모아 瓦剌軍을 격퇴하여 都給事中으로 승급하였다. 그 후 山西 右參政으로 발탁되어 宣府鎭(지금의 山西 大同)의 錢餉을 감독하였다. 景泰 3년(1452)에 巡邊御史 李秉의 추천으로 獨石, 馬營, 龍門, 衛所 4城의 軍務를 보좌하였다. 그가 재직시절에 吏治가 정돈되고 武備가 갖추어지고, 開墾이 잘 되어 풍족해졌다고 한다. 그의 치적은 明代 何孟春이 쓴 『餘冬序錄』에도 나와 있는데, “葉文莊公盛巡撫宣府時, 修複官牛, 官田之法, 墾地日廣, 積糧日多, 以其餘歲易戰馬千八百餘匹. 其屯堡廢缺者, 鹹修複之, 不數月, 完七百餘所”라고 기록되어 있다. 天順 2년(1458)에 都察院 右僉都御史, 兩廣巡撫로 발탁되었다가, 天順 7년(1463)에 左僉都御史가 되어, 宣府鎭을 巡撫하였다. 成化 3년(1467)에 禮部 右侍郞, 성화 8년(1472)에 吏部 左侍郞이 되었다. 諡號는 文莊이었다.
- 각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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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3)
余子俊(1429~1489): 字는 士英으로, 四川 靑神 사람이다. 景泰 연간(1450~1456)에 進士가 되어 戶部主事 10년 재직기간 동안 청렴하고 유능하다는 명성을 얻었다. 후에 右副都御使로 발탁되어, 西安 通濟渠 開鑿하고, 延綏에서 동으로 淸水營에서 서쪽으로 花寫池까지 직접 邊牆의 城堡를 축조하였다. 成化 12년(1476) 陝西로 옮겨, 西安城 西北쪽의 餘公渠를 개착하고 涇陰에서 산을 뚫어 田 1,000여 頃에 물을 끌어다 대었다. 성화 20년(1484)에 戶部尙書 겸 右副都御史가 되어 大同과 宣府의 軍務를 總督하였다. 그는 延綏 邊牆의 사례를 선부와 대동에서도 시행하자고 주장하였으나, 당시 災害가 잇달아 발생하여 公私가 피폐하여 言官이 그를 탄핵하였다. 憲宗 말에 兵部尙書를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났다(『明史』 卷178 「余子俊傳」 참조).
- 각주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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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5)
趙輔: 字는 良佐로, 鳳陽 사람이다. 부친의 직위를 세습하여 濟寧衛 指揮使가 되었다. 景帝가 즉위하여 尙書 王直 등이 천거하여 都指揮僉事가 되어, 左參將으로 懷來를 지켰다. 成化 원년(1465)에 中府 都督同知로 征夷將軍이 되어 韓雍과 함께 兩廣의 蠻夷를 토벌하였는데, 大藤峽을 공격하여 그 공적으로 武靖伯에 봉해졌다. 성화 3년(1468)에 總兵으로 迤東을 정벌하여 都御史 李秉과 함께 撫順에 들어가 공을 세워 武靖侯가 되었다. 성화 8년(1473)에 河套를 정벌할 때 조보는 將軍으로, 陝西·延綏·寧夏 三鎭의 군대를 모두 통솔하였다. 보조가 楡林에 이르렀을 때 적이 이미 깊이 들어와 침략하여 제어할 수 없게 되어 王越과 함께 罷兵을 疏請하였다. 言官이 그 죄를 논하였으나 황제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보는 돌아와 성화 12년(1477)까지 京營을 감독하였다. 사후 容國公이 追贈되었고, 諡號는 恭肅이었다. 조보는 어려서부터 俊辨에 재주가 있고 詞翰을 잘 써서 文士들과 많이 교류하여 거듭되는 탄핵 논의에도 불구하고 큰 어려움이 없었다(『明史』 卷155 「趙輔傳」 참조).
- 각주 006)
- 각주 007)
- 각주 008)
색인어
- 이름
- 주영, 섭성(葉盛), 여자준(余子俊), 왕월, 전량(錢亮), 왕월, 백규(白圭), 섭성, 왕월, 조보(趙輔), 왕월, 조보, 유취(劉聚), 유취, 모리해, 패로내, 알라출, 만도로, 滿都魯, 가가사란
- 지명
- 하투, 연수, 하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