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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대동 순무 왕월(王越) 등이 적을 패퇴시킨 공으로 포상을 받은 내용

  • 국가
    달단(韃靼)
[성화] 6년(1470) 봄에, 대동 순무(巡撫)주 001
각주 001)
巡撫: 明淸 시대의 지방장관으로 總督과 함께 ‘督撫’라고 불렸다. 명 초기에는 중앙에서 지방에 파견한 임시직이었으나 宣德 연간(1426~1435)부터 常設化되어 省 또는 그 일부를 관할하였으며, 明말에는 20여 개나 되었다. 원래는 文官으로 주로 民政을 전담하였으나 이후로 軍事職까지 겸직하고, 都御史를 겸하기도 하여 省의 布政使, 按察使, 都指揮使를 지휘하는 지방장관으로서 실권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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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월(王越) 주 002
각주 002)
王越(1424~1498): 字는 世昌이고, 河南省 濬縣人이다. 景泰 2년(1451)의 進士로 御史에 제수되고 이어 陝西巡按이 되었다. 天順 연간(1457~1464)에 山東 按察使를 거쳐 郵副都御史에 발탁되었으며, 成化 연간(1465~1487)에 이르러서는 都御史에 임명되어 西域을 원정하였고, 成化 10년(1474)에는 提督軍務가 되어 延綏·寧夏·甘肅 三邊을 관장하였다. 그러나 성화 말년에 탄핵을 받아 削奪官職되어 安陸에 謫居되었다. 이후 孝宗이 즉위하면서 赦免되었으며, 弘治 7년(1494)에 70세의 나이로 左都御史에 復官되었지만 致仕하였다. 그런데 홍치 10년(1497) 겨울에 番人들이 甘肅에 침범해 오자 조정은 原官을 起用해야한다는 詔書를 내려 왕월에게 太子太保를 내리고 명목상으로 그를 總制甘·涼邊務兼巡撫에 임명하였다. 홍치 11년(1498)에 그는 큰 전과를 올렸지만 그해 겨울 감숙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 太傅가 追贈되었고, 襄敏이라는 諡號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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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격(遊擊) 허영을 파견하여 그들을 패퇴시키고, 양신 등 또한 호시구(胡柴溝)에서 그들을 크게 물리쳤다. 당시 패로내알라출은 별부(別部) 가가사란(癿加思蘭) 주 003
각주 003)
癿加思蘭(?~1480): Bekerisün 혹은 Beg Arslan을 음역한 것이다. 鍥加思蘭, 虯加思蘭으로도 표기된다. 원래 乜克力(Mekri)部의 사람으로 也先의 동생 伯都王 伯顔帖木兒의 아들이다. 也先과 그의 부친이 被殺되자 그는 族兄 阿失帖木兒 및 叔父인 賽罕王의 아들 亦思馬因·拜亦撒哈 등과 함께 土魯番 地帶에 주둔하여 유목을 하였다. 당시 그가 통할하는 부락은 겨우 300~4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天順 연간(1457~1464)에 들어와 그는 哈密을 침략하여 죽은 卜列革의 妻를 강제로 娶하고 왕위를 이으려고도 했지만 이루지 못하고 동쪽으로 이동하여 河套로 갔다. 成化 연간(1465~1487)에 들어와 그는 明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는데, 그 초기에는 韃靼(Tatar)의 여러 부족이 河套地區에 進駐하여 서로 다투는 틈을 타 점차 세력을 강화시켰다. 이후 성화 11년(1475)에 滿都魯가 大汗位에 즉위해서 그는 太師에 임명되었지만 곧 滿都魯汗이 서거한 후 대권다툼 과정에서 族弟인 亦思馬因에 의해 성화 15년(1480)에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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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라홀(孛羅忽) 주 004
각주 004)
孛羅忽: 脫脫不花(Toqto Büqa)의 동생 阿噶巴爾濟의 손자를 말한다. 『黃金史』에 따르면, 成化 3년(1467)에 大位에 올랐다고 한다. 이에 毛里孩와 패라홀은 차례로 명조의 변경을 어지럽혔는데, 『明史』 「憲宗本紀」에 따르면, 모리해는 성화 8년(1472)에, 패라홀은 그 이듬해(1473)에 활동을 멈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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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연합하여 또한 하투를 침범하여 점거하였는데, 오랫동안 머물려고 하였다. 연수가 위급함을 고하니, 황제가 주영(朱永)을 장군(將軍)으로 삼고, 왕월에게 군무(軍務)를 계획하고 돕도록 하여 적을 방어하도록 명하였다. 주영이 이르러서 여러 차례 승전을 보고하니, 왕월 등에게 모두 승진시키고 상을 내렸으며, 공을 논하여 주영을 세후(世侯)에 봉하였으나 적은 여전히 하투를 점거하고 있었다.

  • 각주 001)
    巡撫: 明淸 시대의 지방장관으로 總督과 함께 ‘督撫’라고 불렸다. 명 초기에는 중앙에서 지방에 파견한 임시직이었으나 宣德 연간(1426~1435)부터 常設化되어 省 또는 그 일부를 관할하였으며, 明말에는 20여 개나 되었다. 원래는 文官으로 주로 民政을 전담하였으나 이후로 軍事職까지 겸직하고, 都御史를 겸하기도 하여 省의 布政使, 按察使, 都指揮使를 지휘하는 지방장관으로서 실권을 가지게 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王越(1424~1498): 字는 世昌이고, 河南省 濬縣人이다. 景泰 2년(1451)의 進士로 御史에 제수되고 이어 陝西巡按이 되었다. 天順 연간(1457~1464)에 山東 按察使를 거쳐 郵副都御史에 발탁되었으며, 成化 연간(1465~1487)에 이르러서는 都御史에 임명되어 西域을 원정하였고, 成化 10년(1474)에는 提督軍務가 되어 延綏·寧夏·甘肅 三邊을 관장하였다. 그러나 성화 말년에 탄핵을 받아 削奪官職되어 安陸에 謫居되었다. 이후 孝宗이 즉위하면서 赦免되었으며, 弘治 7년(1494)에 70세의 나이로 左都御史에 復官되었지만 致仕하였다. 그런데 홍치 10년(1497) 겨울에 番人들이 甘肅에 침범해 오자 조정은 原官을 起用해야한다는 詔書를 내려 왕월에게 太子太保를 내리고 명목상으로 그를 總制甘·涼邊務兼巡撫에 임명하였다. 홍치 11년(1498)에 그는 큰 전과를 올렸지만 그해 겨울 감숙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 太傅가 追贈되었고, 襄敏이라는 諡號가 내려졌다. 바로가기
  • 각주 003)
    癿加思蘭(?~1480): Bekerisün 혹은 Beg Arslan을 음역한 것이다. 鍥加思蘭, 虯加思蘭으로도 표기된다. 원래 乜克力(Mekri)部의 사람으로 也先의 동생 伯都王 伯顔帖木兒의 아들이다. 也先과 그의 부친이 被殺되자 그는 族兄 阿失帖木兒 및 叔父인 賽罕王의 아들 亦思馬因·拜亦撒哈 등과 함께 土魯番 地帶에 주둔하여 유목을 하였다. 당시 그가 통할하는 부락은 겨우 300~4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天順 연간(1457~1464)에 들어와 그는 哈密을 침략하여 죽은 卜列革의 妻를 강제로 娶하고 왕위를 이으려고도 했지만 이루지 못하고 동쪽으로 이동하여 河套로 갔다. 成化 연간(1465~1487)에 들어와 그는 明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는데, 그 초기에는 韃靼(Tatar)의 여러 부족이 河套地區에 進駐하여 서로 다투는 틈을 타 점차 세력을 강화시켰다. 이후 성화 11년(1475)에 滿都魯가 大汗位에 즉위해서 그는 太師에 임명되었지만 곧 滿都魯汗이 서거한 후 대권다툼 과정에서 族弟인 亦思馬因에 의해 성화 15년(1480)에 피살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4)
    孛羅忽: 脫脫不花(Toqto Büqa)의 동생 阿噶巴爾濟의 손자를 말한다. 『黃金史』에 따르면, 成化 3년(1467)에 大位에 올랐다고 한다. 이에 毛里孩와 패라홀은 차례로 명조의 변경을 어지럽혔는데, 『明史』 「憲宗本紀」에 따르면, 모리해는 성화 8년(1472)에, 패라홀은 그 이듬해(1473)에 활동을 멈추고 있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왕월(王越), 허영, 양신, 패로내, 알라출, 가가사란(癿加思蘭), 패라홀(孛羅忽), 주영(朱永), 왕월, 주영, 왕월, 주영
지명
호시구(胡柴溝), 하투, 연수, 하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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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 순무 왕월(王越) 등이 적을 패퇴시킨 공으로 포상을 받은 내용 자료번호 : jo.k_0024_0327_03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