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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환이 죽고 아들 액삼(額森)이 이었는데 성질이 사나웠으며 탁극탁포합과 함께 요동(遼東) 등을 노략질하려 침입한 설명

  • 국가
    달단(韃靼)
태환이 죽자 아들 야선(也先) 주 001
각주 001)
也先(?~1454): Esen의 音譯이며, 명대 瓦剌(Oirat)部의 首長이다. 그의 부친인 脫歡(Toghon)은 일찍이 내부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東蒙古를 정복하여 元의 자손인 脫脫不花(Toqto Büqa)를 可汗에 앉히고 太師가 되어 실권을 장악했다. 부친이 죽자 에센은 부친을 이어 太師 淮王이 되었는데, 이때에 瓦剌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는 興安嶺 동쪽 지역 및 滿州의 女眞을 정복하고, 朝鮮에 압박을 가했으며, 이어 무역을 거부한 明朝를 공격하여 1449년 土木堡에서 英宗을 포로로 붙잡기도 했다. 그는 유목민족의 걸출한 인물로 칭기스칸을 모방하고자 했지만 강력한 지지기반을 이루지 못했으며, 여러 제후들은 오히려 칭기스칸의 후예를 존숭하여 에센에 반항하였다. 1451년에 그는 脫脫不花와 不和하여 그를 죽이고, 스스로 칸위에 올라 명실공히 몽골의 지배자가 되었지만 제후들의 세력을 제압할 수 없었으며, 결국 1454년에 그의 부하인 阿剌知院에게 습격을 받아 살해되었다. 이로써 강력한 지도자를 잃은 瓦剌은 이후 쇠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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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뒤를 이었는데,주 002
각주 002)
일반적으로 也先이 淮王을 칭한 것은 正統 4년(1439)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明史紀事本末』 卷32 「土木之變」에는 “英宗正統八年夏四月, 瓦剌太師順寧王脫歡死, 子也先嗣”라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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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성질이 사납고 교만했으며 스스로 웅걸(雄傑)을 칭하였고, 여러 부락이 모두 그의 손아래 들어와 태태불화는 가한(可汗)이라는 칭호만 갖추고 있을 뿐이었다.주 003
각주 003)
이때 也先은 普花可汗과 함께 사람을 보내 말을 조공하였다. 脫歡이 阿魯台를 살해한 후부터 여러 부락을 병합하여 그 세력이 점차 강성하였다. 『殊域周咨錄』 卷17 「韃靼」 正統 8년條에 관련 내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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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태불화가 매년 내조하여 진공하자 천자는 모두 그에게 후하게 보답하였는데, 여러 번(蕃)에 비해 더 많이 주었고 문서에 그를 칭하여 달달가한(達達可汗)이라고 하였으며, 그의 비에게도 아울러 상을 하사했다. [정통] 14년(1449) 가을에, 야선이 대거 들어와 노략질하려고 하였는데, 태태불화가 그를 제지하며 이르기를, “우리들 의복과 식량(服食)은 대부분 대명(大明)의 도움을 받았는데 어찌 차마 이[런 일]을 하려는가?”라고 하였다.주 004
각주 004)
脫脫不花가 에센의 계획을 제지한 말에 대해서 『英宗實錄』 卷160 正統 12년 11월 丁未條에는 “吾儕服用, 多資大明, 彼何負于汝, 而忍爲此天道不可逆, 逆之必受其殃也”라고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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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선이 듣지 않고 말하기를, “가한이 하지 않아도 내가 마땅히 스스로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길을 나누어 태태불화에게 요동을 침입하게 하고, 자신은 무리를 이끌고 대동(大同) 주 005
각주 005)
大同: 고대로부터 군사적·전략적 요충지이다. 명조의 건립 이후 九邊重鎭을 설치하였는데, 그중 하나이다. 이곳은 몽골과의 관계에서 咽喉와 같은 중요한 지역이었고, 이 때문에 많은 군사를 주둔시켰는데 가장 많았을 때는 13만여 명의 병사와 5만 필의 戰馬가 있었다. 洪武 24년(1391)에는 13子인 朱桂에게 이 지역을 분봉하였고, 몽골에 대한 회유와 화친의 일환으로 이곳에 馬市를 개설하여 몽골과의 通貢을 허락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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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침입하였다.주 006
각주 006)
이와 관련한 내용은 『英宗實錄』 卷180 正統 14년 7월 己丑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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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친정(親征)하였으나, 어가(御駕)가 토목(土木) 주 007
각주 007)
土木: 지금의 河北省 懷來縣 土木鎭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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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함락되었다.주 008
각주 008)
이를 ‘土木堡의 變’이라 하는데,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32 「土木之變」 및 『明史』 卷328 「瓦剌傳」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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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황제(景皇帝) 주 009
각주 009)
景皇帝: 명 왕조 7대 황제인 景宗 景泰帝(朱祁鈺)를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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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감국(監國)주 010
각주 010)
監國: 中國 古代 정치제도의 하나로, 보통은 皇帝가 親征·巡行 등의 이유로 京師에 없을 때, 太子와 같은 중요 인물이 궁중에 남아 國事를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君主가 親政할 수 없어 다른 사람이 朝政을 대리하는 것을 일컫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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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가 [황제에] 즉위(卽位)하여, 황제(영종)를 높여 태상황제(太上皇帝)라 하였다. 이듬해(景泰 元年, 1450)주 011
각주 011)
景泰: 명 왕조 7대 황제인 景宗 朱祁鈺의 연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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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상황(上皇, 영종)이 야선이 있는 곳에서 돌아왔다.주 012
각주 012)
관련 내용은 『殊域周咨錄』 卷17 「韃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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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정은 『와랄전(瓦剌傳)』에 기재되어 있다.

  • 각주 001)
    也先(?~1454): Esen의 音譯이며, 명대 瓦剌(Oirat)部의 首長이다. 그의 부친인 脫歡(Toghon)은 일찍이 내부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東蒙古를 정복하여 元의 자손인 脫脫不花(Toqto Büqa)를 可汗에 앉히고 太師가 되어 실권을 장악했다. 부친이 죽자 에센은 부친을 이어 太師 淮王이 되었는데, 이때에 瓦剌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는 興安嶺 동쪽 지역 및 滿州의 女眞을 정복하고, 朝鮮에 압박을 가했으며, 이어 무역을 거부한 明朝를 공격하여 1449년 土木堡에서 英宗을 포로로 붙잡기도 했다. 그는 유목민족의 걸출한 인물로 칭기스칸을 모방하고자 했지만 강력한 지지기반을 이루지 못했으며, 여러 제후들은 오히려 칭기스칸의 후예를 존숭하여 에센에 반항하였다. 1451년에 그는 脫脫不花와 不和하여 그를 죽이고, 스스로 칸위에 올라 명실공히 몽골의 지배자가 되었지만 제후들의 세력을 제압할 수 없었으며, 결국 1454년에 그의 부하인 阿剌知院에게 습격을 받아 살해되었다. 이로써 강력한 지도자를 잃은 瓦剌은 이후 쇠퇴하게 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일반적으로 也先이 淮王을 칭한 것은 正統 4년(1439)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明史紀事本末』 卷32 「土木之變」에는 “英宗正統八年夏四月, 瓦剌太師順寧王脫歡死, 子也先嗣”라 기재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3)
    이때 也先은 普花可汗과 함께 사람을 보내 말을 조공하였다. 脫歡이 阿魯台를 살해한 후부터 여러 부락을 병합하여 그 세력이 점차 강성하였다. 『殊域周咨錄』 卷17 「韃靼」 正統 8년條에 관련 내용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4)
    脫脫不花가 에센의 계획을 제지한 말에 대해서 『英宗實錄』 卷160 正統 12년 11월 丁未條에는 “吾儕服用, 多資大明, 彼何負于汝, 而忍爲此天道不可逆, 逆之必受其殃也”라고 나와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5)
    大同: 고대로부터 군사적·전략적 요충지이다. 명조의 건립 이후 九邊重鎭을 설치하였는데, 그중 하나이다. 이곳은 몽골과의 관계에서 咽喉와 같은 중요한 지역이었고, 이 때문에 많은 군사를 주둔시켰는데 가장 많았을 때는 13만여 명의 병사와 5만 필의 戰馬가 있었다. 洪武 24년(1391)에는 13子인 朱桂에게 이 지역을 분봉하였고, 몽골에 대한 회유와 화친의 일환으로 이곳에 馬市를 개설하여 몽골과의 通貢을 허락하기도 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6)
    이와 관련한 내용은 『英宗實錄』 卷180 正統 14년 7월 己丑條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7)
    土木: 지금의 河北省 懷來縣 土木鎭을 일컫는다. 바로가기
  • 각주 008)
    이를 ‘土木堡의 變’이라 하는데,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32 「土木之變」 및 『明史』 卷328 「瓦剌傳」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9)
    景皇帝: 명 왕조 7대 황제인 景宗 景泰帝(朱祁鈺)를 일컫는다. 바로가기
  • 각주 010)
    監國: 中國 古代 정치제도의 하나로, 보통은 皇帝가 親征·巡行 등의 이유로 京師에 없을 때, 太子와 같은 중요 인물이 궁중에 남아 國事를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君主가 親政할 수 없어 다른 사람이 朝政을 대리하는 것을 일컫기도 한다. 바로가기
  • 각주 011)
    景泰: 명 왕조 7대 황제인 景宗 朱祁鈺의 연호이다. 바로가기
  • 각주 012)
    관련 내용은 『殊域周咨錄』 卷17 「韃靼」 참조.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태환, 야선(也先), 태태불화, 태태불화, 달달가한(達達可汗), 야선, 태태불화, 야선, 태태불화, 경황제(景皇帝), 야선
지명
요동, 대동(大同), 토목(土木)
서명
와랄전(瓦剌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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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환이 죽고 아들 액삼(額森)이 이었는데 성질이 사나웠으며 탁극탁포합과 함께 요동(遼東) 등을 노략질하려 침입한 설명 자료번호 : jo.k_0024_0327_0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