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로태의 노략질을 염려하여 북방 변경에 군대를 주둔시켰는데 왕자 액삼탁우(額森托于)가 투항한 내용
이듬해(1423) 가을에 변방을 지키는 장수가, 장차 아로태가 [변경을] 들어와 노략질할 것이라고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그는 짐(朕)이 반드시 다시 출정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니, 마땅히 먼저 북방 변경에 주둔하고 그를 기다리겠노라”고 하였다.주 001 마침내 부를 나누어(部分) 영양후(寧陽侯) 진무(陳懋)
주 002
각주 002)

를 선봉으로 삼아주 003
숙외산(宿嵬山)
주 004에 이르렀으나 적이 보이지 않고, 왕자(王子) 야선토간(也先土干)
주 005을 만났는데, 처자와 부하를 이끌고 와서 투항하였다. 황제가 [그를] 충용왕(忠勇王)에 봉하고, 성명(姓名)을 하사하여 김충(金忠)이라 불렀다.주 006 충용왕은 경사(京師)에 이르러 [살면서] 여러 차례 적을 공격하여 자신의 정성을 다하겠다고 청하였다. 황제가 이르기를, “잠시 기다리라”고 하였다.주 007
陳懋(1380~1463): 安徽 壽縣 사람으로, 처음에 舍人으로 從軍하여 공을 쌓아 指揮僉事가 되었다. 永樂 원년(1403) 寧陽伯에 봉해졌고, 永樂 6년(1408) 3월에 征西將軍印을 받고 寧夏를 수비하였는데, 이듬해(1409) 가을에 옛 元의 丞相, 平章, 司徒 등이 모두 투항하였다. 永樂 8년(1410) 北征하여, 永樂 11년(1413)에 寧夏 변경을 순시하였다. 山西, 陝西都司와 鞏昌, 平涼 諸衛兵을 거느리고 宣府에 주둔하였다. 永樂 23년(1425)에 陝西, 寧夏, 甘肅 3鎭의 군대를 통솔하여 阿魯台를 정벌하는데 선봉에 섰다. 成祖 사후 京師로 돌아와 수비를 맡았고, 宣德 원년(1399)에 樂安을 토벌하러 갔다가 돌아와 영하를 지켰다. 英宗이 즉위해서 平羌將軍이 되어 감숙을 지켰으며, 正統 13년(1448)에 福建의 鄧茂七의 난이 일어나 당시 都御史 張楷가 토벌을 나갔으나 공이 없자 이를 대신하여 征南將軍에 임명되어 나가 토벌하였다. 이에 太保(正一品)가 더해지고, 이후 宗人府의 일을 맡아보았다. 사후 浚國公에 追封되었고 諡號는 武靖이다.
- 각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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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2)
陳懋(1380~1463): 安徽 壽縣 사람으로, 처음에 舍人으로 從軍하여 공을 쌓아 指揮僉事가 되었다. 永樂 원년(1403) 寧陽伯에 봉해졌고, 永樂 6년(1408) 3월에 征西將軍印을 받고 寧夏를 수비하였는데, 이듬해(1409) 가을에 옛 元의 丞相, 平章, 司徒 등이 모두 투항하였다. 永樂 8년(1410) 北征하여, 永樂 11년(1413)에 寧夏 변경을 순시하였다. 山西, 陝西都司와 鞏昌, 平涼 諸衛兵을 거느리고 宣府에 주둔하였다. 永樂 23년(1425)에 陝西, 寧夏, 甘肅 3鎭의 군대를 통솔하여 阿魯台를 정벌하는데 선봉에 섰다. 成祖 사후 京師로 돌아와 수비를 맡았고, 宣德 원년(1399)에 樂安을 토벌하러 갔다가 돌아와 영하를 지켰다. 英宗이 즉위해서 平羌將軍이 되어 감숙을 지켰으며, 正統 13년(1448)에 福建의 鄧茂七의 난이 일어나 당시 都御史 張楷가 토벌을 나갔으나 공이 없자 이를 대신하여 征南將軍에 임명되어 나가 토벌하였다. 이에 太保(正一品)가 더해지고, 이후 宗人府의 일을 맡아보았다. 사후 浚國公에 追封되었고 諡號는 武靖이다.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색인어
- 이름
- 아로태, 진무(陳懋), 야선토간(也先土干), 김충(金忠)
- 지명
- 숙외산(宿嵬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