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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극초(納克楚)가 저항하다 마침내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자 태조가 봉작을 주고 후한 상을 내린 설명

  • 국가
    달단(韃靼)
당시 왕보보는 이미 먼저 죽고주 001
각주 001)
『太祖實錄』 卷100 洪武 8년 8월 巳酉條에 따르면, 王保保는 洪武 8년(1375) 8월에 사망했다. 같은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8년 8월條에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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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거괴(巨魁)가 대부분 차례로 평정되거나, 혹은 형세를 보아 귀부하였는데, 유독 승상 납합출(納哈出) 주 002
각주 002)
納哈出(?~1388): 원나라 초기 功臣의 후예로서, 대대로 遼東 지방의 군사적 책임을 맡았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원나라 말기에는 瀋陽을 근거지로 스스로 行省丞相이라 칭하며 만주 지방에 세력을 뻗쳤다. 1362년 2월 고려의 반역자 趙小生에 이끌려, 東北面 雙城을 공격하고자 수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으나 東北面兵馬使 李成桂가 이끄는 고려군에게 함흥평야의 大會戰에서 참패하고 달아났다. 北元이 세워진 1368년 이후, 그는 공민왕과 이성계에게 예물을 보내며 화친을 맺었다. 고려에서는 그에게 정1품의 官位인 三重大匡司徒 벼슬을 주었으나 후에 명나라에 항복, 海西侯에 봉해져 雲南정벌에 나섰다가 병으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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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이 20만의 무리를 옹유하며 금산(金山) 주 003
각주 003)
金山: 지금의 吉林省 雙遼의 東北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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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점거하고 있으면서 여러 차례 요(遼) 주 004
각주 004)
遼: 遼河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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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엿보았다. [홍무] 20년(1387) 봄에 [태조는] 송국공(宋國公) 풍승을 대장군에 임명하여 영천후(潁川侯)주 005
각주 005)
傅友德은 洪武 3년(1370) 11월에 潁川侯, 洪武 17년(1384) 4월에는 潁國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洪武 20년(1387) 당시는 潁國公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太祖實錄』 卷100 洪武 20년 춘정월 癸丑條에도 潁國公이라고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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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우덕·영창후(永昌侯) 남옥 등 장병 20만 명을 이끌고 [납합출을] 정벌하였는데, 전에 잡힌 의 장수 내랄오(乃剌吾)를 돌려보냈다. 풍승의 군대가 통주(通州) 주 006
각주 006)
通州: 현재 北京市 東南部의 通州區를 말한다. 金代 天德 3년(1151)에 潞縣에 通州를 두었는데, “漕運通濟”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元代에는 大都路, 明初에는 北平府에 속해 있다가 永樂 연간(1403~1424)부터 順天府가 관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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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주둔하여, 남옥을 보내 큰 눈이 온 틈을 타 경주(慶州) 주 007
각주 007)
慶州: 지금의 內蒙古 巴林左旗 索布力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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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습격하도록 하여 승리하였다.주 008
각주 008)
이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20년 춘정월 壬子朔條, 同 2월 甲申條, 同 3월 辛未條에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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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에 군대가 금산을 넘었는데, 임강후(臨江侯) 진용(陳鏞)이 길을 잃어 적에게 공격을 받아 죽었다.주 009
각주 009)
이와 관련한 내용은 『太祖實錄』 卷182 洪武 20년 6월 更子條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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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랄오가 돌아가 [명] 조정의 무휼(撫恤) 은덕(恩德)을 그 부족들에게 상세하게 다 말하니, 이에 전국공(全國公) 관동(觀童)이 와서 항복하였다.주 010
각주 010)
이와 관련한 내용은 『太祖實錄』 卷182 洪武 20년 6월 癸卯條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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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합출내랄오의 말을 듣고서 이미 마음이 흔들렸는데, 다시 [의] 대군이 압박해 오자 곧 겉으로 사람을 대장군의 군영에 보내 귀순하는 것처럼 꾸며 병력의 정황을 엿보았다. 풍승남옥을 파견하여 가서 항복을 받으라고 하였다. 사자(使者)가 풍승의 군대를 보고 돌아와 보고하자 납합출이 하늘을 보며 탄식하며 말하기를, “하늘이 나에게 이 무리를 거느리지 못하게 하는구나”라고 하였다. 마침내 수백의 기병을 이끌고 남옥에게 가서 항복하였다. 얼마 후 도망가려고 했으나 정국공(鄭國公) 상무(常茂) 주 011
각주 011)
常茂: 생몰연대는 정확하지 않음. 常遇春의 아들이며 馮勝의 사위이다(『殊域周咨錄』 卷16 「韃靼」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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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부상을 입어 갈 수 없었다.주 012
각주 012)
그때 常茂의 휘하에 蒙古語를 하는 이가 있어 納哈出의 움직임을 포착하여 常茂에게 보고하였고, 이에 常茂가 도망가려는 納哈出의 팔뚝에 상처를 입혔다(『殊域周咨錄』 卷16 「韃靼」 洪武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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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독(都督) 경충(耿忠)이 마침내 무리를 이끌고 그(납합출)를 데리고 와 풍승을 알현하니, 풍승이 융숭한 예로 그를 대하고 경충에게 그와 함께 먹고 자도록 했다. 이어서 그의 부하 20여만 명이 항복했는데,주 013
각주 013)
『太祖實錄』 卷182 洪武 20년 6월 丁未條에는 “得其各愛馬所部二十餘萬人”이라고 되어 있다. ‘愛馬’는 蒙古語 ‘aimak’을 音譯한 것으로, 몽골에서는 12~13세기까지 사용되었는데, 일정한 遊牧地를 공동소유로 하는 사회집단을 말한다. 淸朝를 거쳐 몽골인민공화국에서는 지방 행정 단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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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합출이 상해를 입었다는 것을 전해 듣고 놀라 흩어진 자가 4만 명이었고, 노획한 군수품과 가축과 말이 100여 리(里)주 014
각주 014)
里: 明代에 길이를 표시하는 尺度는 裁衣尺·量地尺·營造尺으로 구분하여 사용되었다. 明代 量地尺의 1里는 360步이고, 『算法統宗』 卷3에 의하면 ‘五尺爲一步’로 되어 있음으로 1里는 1,800尺이다. 이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1리는 576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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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어졌다.주 015
각주 015)
이와 관련한 내용은 『太祖實錄』 卷182 洪武 20년 6월 丁未條에 보이는데, “於是其衆, 亦降凡四萬餘, 並得其各愛馬所部二十餘萬人”이라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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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승이 군대를 거느리고 돌아오는데, 도독 복영(濮英) 주 016
각주 016)
濮英(?~1386): 濮眞이라고도 불리며, 安徽 鳳陽 사람이다. 처음에는 西安衛의 指揮였다. 洪武 19년(1386)에 洪武帝가 耿炳文에게 陝西에서 부대를 선발해서 변방수비를 담당하도록 했는데, 유독 복영의 부대가 뛰어나서 그를 都督僉事로 승진시켰다. 北元 納哈出과의 교전에서 포로가 되었으나 자결하였다. 후에 金山侯가 追贈되었고, 諡號는 忠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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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3천의 기병을 이끌고 맨 뒤에서 따라오다가 궤멸되어 흩어졌던 병졸에게 습격을 당해 죽었다.주 017
각주 017)
納哈出의 투항과정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20년 하6월 庚午條 및 丁未條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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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가을에 풍승 등이 표(表)주 018
각주 018)
表: 황제에게 바치는 문서를 表文이라 한다. 洪武 14년(1381)에 進賀表箋禮儀를 정하였는데, 황제의 생일인 天壽聖節과 正旦·冬至에 在外 각 아문은 미리 상주문(표문)을 바치고 賀禮하였다. 天壽聖節인 경우에 在外 5품 이상의 衙門은 단지 表文 1通을 바치고, 正旦·冬至에는 中宮과 皇太子에게 箋文 各 1通을 더 바쳤다. 조선·베트남 등도 명조에 입조할 때 표문을 바쳤다. 명초에 表文 등으로 인해 朝鮮과 明朝 사이에 외교적인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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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납합출 휘하의 관속(官屬) 200여 명, 장교(將校) 3,300여 명,주 019
각주 019)
『太祖實錄』 卷184 洪武 20년 8월 丁丑條에는 “所部官屬將校三千三百餘人”이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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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동인(金銀銅印) 100과(顆), 호부패면(虎符牌面) 125건, 말 290여 필(匹)을 상주하며 경하 드렸다. 태조납합출을 해서후(海西侯)에 봉하고,주 020
각주 020)
이와 관련한 내용은 『太祖實錄』 卷185 洪武 20년 9월 丁亥條에 보이고,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20년 9월 戊寅條에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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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아주 후한 상을 내렸으며,주 021
각주 021)
이때 洪武帝는 納哈出에게 一品의 官服을 하사하였고, 그 부하들에게도 모두 의복과 관대를 내렸다. 얼마 후 納哈出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察罕을 瀋陽侯로 책봉하였다(『殊域周咨錄』 卷16 「韃靼」 洪武 20년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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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내랄오를 천호(千戶)주 022
각주 022)
千戶: 明代 각 지역에 주둔하는 衛所制에서 世襲職인 千戶所의 長으로서 軍戶 1,120명을 통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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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제수(除授)하였다.

  • 각주 001)
    『太祖實錄』 卷100 洪武 8년 8월 巳酉條에 따르면, 王保保는 洪武 8년(1375) 8월에 사망했다. 같은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8년 8월條에도 보인다. 바로가기
  • 각주 002)
    納哈出(?~1388): 원나라 초기 功臣의 후예로서, 대대로 遼東 지방의 군사적 책임을 맡았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원나라 말기에는 瀋陽을 근거지로 스스로 行省丞相이라 칭하며 만주 지방에 세력을 뻗쳤다. 1362년 2월 고려의 반역자 趙小生에 이끌려, 東北面 雙城을 공격하고자 수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으나 東北面兵馬使 李成桂가 이끄는 고려군에게 함흥평야의 大會戰에서 참패하고 달아났다. 北元이 세워진 1368년 이후, 그는 공민왕과 이성계에게 예물을 보내며 화친을 맺었다. 고려에서는 그에게 정1품의 官位인 三重大匡司徒 벼슬을 주었으나 후에 명나라에 항복, 海西侯에 봉해져 雲南정벌에 나섰다가 병으로 사망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3)
    金山: 지금의 吉林省 雙遼의 東北에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4)
    遼: 遼河를 말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5)
    傅友德은 洪武 3년(1370) 11월에 潁川侯, 洪武 17년(1384) 4월에는 潁國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洪武 20년(1387) 당시는 潁國公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太祖實錄』 卷100 洪武 20년 춘정월 癸丑條에도 潁國公이라고 나와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6)
    通州: 현재 北京市 東南部의 通州區를 말한다. 金代 天德 3년(1151)에 潞縣에 通州를 두었는데, “漕運通濟”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元代에는 大都路, 明初에는 北平府에 속해 있다가 永樂 연간(1403~1424)부터 順天府가 관할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7)
    慶州: 지금의 內蒙古 巴林左旗 索布力嘎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8)
    이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20년 춘정월 壬子朔條, 同 2월 甲申條, 同 3월 辛未條에 기재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9)
    이와 관련한 내용은 『太祖實錄』 卷182 洪武 20년 6월 更子條에 보인다. 바로가기
  • 각주 010)
    이와 관련한 내용은 『太祖實錄』 卷182 洪武 20년 6월 癸卯條에 보인다. 바로가기
  • 각주 011)
    常茂: 생몰연대는 정확하지 않음. 常遇春의 아들이며 馮勝의 사위이다(『殊域周咨錄』 卷16 「韃靼」條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12)
    그때 常茂의 휘하에 蒙古語를 하는 이가 있어 納哈出의 움직임을 포착하여 常茂에게 보고하였고, 이에 常茂가 도망가려는 納哈出의 팔뚝에 상처를 입혔다(『殊域周咨錄』 卷16 「韃靼」 洪武條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13)
    『太祖實錄』 卷182 洪武 20년 6월 丁未條에는 “得其各愛馬所部二十餘萬人”이라고 되어 있다. ‘愛馬’는 蒙古語 ‘aimak’을 音譯한 것으로, 몽골에서는 12~13세기까지 사용되었는데, 일정한 遊牧地를 공동소유로 하는 사회집단을 말한다. 淸朝를 거쳐 몽골인민공화국에서는 지방 행정 단위가 되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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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里: 明代에 길이를 표시하는 尺度는 裁衣尺·量地尺·營造尺으로 구분하여 사용되었다. 明代 量地尺의 1里는 360步이고, 『算法統宗』 卷3에 의하면 ‘五尺爲一步’로 되어 있음으로 1里는 1,800尺이다. 이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1리는 576m이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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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관련한 내용은 『太祖實錄』 卷182 洪武 20년 6월 丁未條에 보이는데, “於是其衆, 亦降凡四萬餘, 並得其各愛馬所部二十餘萬人”이라 기재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16)
    濮英(?~1386): 濮眞이라고도 불리며, 安徽 鳳陽 사람이다. 처음에는 西安衛의 指揮였다. 洪武 19년(1386)에 洪武帝가 耿炳文에게 陝西에서 부대를 선발해서 변방수비를 담당하도록 했는데, 유독 복영의 부대가 뛰어나서 그를 都督僉事로 승진시켰다. 北元 納哈出과의 교전에서 포로가 되었으나 자결하였다. 후에 金山侯가 追贈되었고, 諡號는 忠襄이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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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納哈出의 투항과정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20년 하6월 庚午條 및 丁未條에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18)
    表: 황제에게 바치는 문서를 表文이라 한다. 洪武 14년(1381)에 進賀表箋禮儀를 정하였는데, 황제의 생일인 天壽聖節과 正旦·冬至에 在外 각 아문은 미리 상주문(표문)을 바치고 賀禮하였다. 天壽聖節인 경우에 在外 5품 이상의 衙門은 단지 表文 1通을 바치고, 正旦·冬至에는 中宮과 皇太子에게 箋文 各 1通을 더 바쳤다. 조선·베트남 등도 명조에 입조할 때 표문을 바쳤다. 명초에 表文 등으로 인해 朝鮮과 明朝 사이에 외교적인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바로가기
  • 각주 019)
    『太祖實錄』 卷184 洪武 20년 8월 丁丑條에는 “所部官屬將校三千三百餘人”이라고 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20)
    이와 관련한 내용은 『太祖實錄』 卷185 洪武 20년 9월 丁亥條에 보이고,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20년 9월 戊寅條에도 보인다. 바로가기
  • 각주 021)
    이때 洪武帝는 納哈出에게 一品의 官服을 하사하였고, 그 부하들에게도 모두 의복과 관대를 내렸다. 얼마 후 納哈出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察罕을 瀋陽侯로 책봉하였다(『殊域周咨錄』 卷16 「韃靼」 洪武 20년條). 바로가기
  • 각주 022)
    千戶: 明代 각 지역에 주둔하는 衛所制에서 世襲職인 千戶所의 長으로서 軍戶 1,120명을 통솔했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왕보보, 납합출(納哈出), 태조, 풍승, 부우덕, 남옥, 납합출, 내랄오(乃剌吾), 풍승, 남옥, 진용(陳鏞), 내랄오, 관동(觀童), 납합출, 내랄오, 풍승, 남옥, 풍승, 납합출, 남옥, 상무(常茂), 경충(耿忠), 납합출, 풍승, 풍승, 경충, 납합출, 풍승, 복영(濮英), 풍승, 납합출, 태조, 납합출, 내랄오
지명
금산(金山), 요(遼), , 통주(通州), 경주(慶州), 금산,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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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극초(納克楚)가 저항하다 마침내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자 태조가 봉작을 주고 후한 상을 내린 설명 자료번호 : jo.k_0024_0327_00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