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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의 군주가 응창(應昌)으로 도망을 가니 태조(太祖)가 진격을 명하여 함락시키자 이에 왕자 및 장수들이 귀부한 설명

  • 국가
    달단(韃靼)
당시 의 군주는 응창(應昌) 주 001
각주 001)
應昌: 元代 蒙古 지역의 중요 도시로, 嶺北行省에서 兩都에 이르는 사이에 위치한 교통요지였다. 元朝 至元 10년(1270)에 按陳孫斡羅陳 萬戶 및 그의 처 囊加眞 公主가 城을 쌓기를 조정에 청하였고, 元 世祖 쿠빌라이가 동의하여 應昌府라는 이름을 얻었다. 至元 22년(1292)에 應昌路가 되었다. 1368년에 明軍이 大都를 점령하자, 이듬해(1369) 元 惠宗 妥歡貼睦爾가 이곳으로 피신하여 임시로 建都하였다. 1370년 惠宗이 病死하자 明軍이 다시 이곳을 점령하였고, 이후 황폐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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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도망가고 그의 장수 왕보보(王保保) 주 002
각주 002)
王保保: 擴廓帖木兒(Köke Temür, ?~1375)를 일컬으며, 원나라와 북원의 장군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몽골 皇子의 딸이고, 그의 아버지는 중국인으로 姓이 王氏였다. 원래 河南省에서 살았으며, 삼촌 察罕帖木兒의 자리를 물려받아 山東에서 홍건적의 반란을 진압했다. 그는 황태자의 편에 서서 孛羅帖木兒(Bolad Temür)를 중심으로 한 반황태자 파와 대립하였다. 1365년에 孛羅帖木兒를 사살하고 황태자를 복위시켰으며, 그 공으로 해남왕과 비서실 부장관에 임명되었다. 擴廓帖木兒는 원나라 군대에게 반원 반란군에 대한 공격을 명했지만, 장교단에게 배반 당했다. 愛猷識理達臘(Biligtü Khan Ayursiridara)도 그를 저버렸으나 황제 혜종에 의해 정치·군사적인 권한을 유지할 수 있었다. 두 차례에 걸친 패배 후에 그는 河南과 太原을 명나라에 잃고 甘肅省으로 달아났다. 1370년에 혜종이 죽고 愛猷識理達臘이 몽골고원의 카라코룸에서 황좌를 계승했는데, 그는 새로운 북원 황제의 세력에 참여해서 황제의 호위를 수행하였다. 1372년에 그가 이끄는 북원군은 사막에서 徐達이 이끄는 明軍에게 크게 승리를 거두고, 이후 북원의 영향력을 山西省까지 확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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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定西) 주 003
각주 003)
定西: 지금의 甘肅省 중부에 위치한 定西市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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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점거해서 변경의 우환이 되었다. [홍무] 3년(1370) 봄에 [태조는] 서달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임명하여 서안(西安) 주 004
각주 004)
西安: 현재 중국 山西省의 省都이며, 周 이래 唐 때까지 1,000년 가까이 國都를 두었던 곳으로, 古代 漢族 활동의 중심지였다. 漢 高祖는 현재 서안의 서북에 長安城을 쌓아 기원전 200년에 洛陽으로부터 이곳에 천도하였다. 이후 魏, 晋의 수도로서 西京이라 불렸다. 北魏가 분열한 후, 西魏가 國都로 삼았고 다음 北周로 이어졌다. 隋는 전국 통일이 이루어진 文帝 開皇 연간(581~600) 初에, 漢의 장안성 동남쪽에 新都를 건설하여 大興城이라 불렀고, 唐은 다시 이를 장안성이라 하였다. 太宗 때 大明宮, 玄宗 때 興京宮을 지어 인구 100만을 넘게 포용한 국제도시를 이루었다. 唐末 이후 점차 쇠락하다가, 明代 初에 唐代의 皇城 全域과 宮城 남부 등을 성벽으로 둘러쌓아 현재 서안성의 모습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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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출발하여 정서를 습격하도록 하고, 이문충(李文忠) 주 005
각주 005)
李文忠(1339~1384): 字는 思本이고, 江蘇 盱眙 사람으로, 명조의 개국공신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주원장의 甥姪로, 19세에 군대를 이끌고 浙江·福建 등지에서 전투에 참여하면서 공을 세웠다. 洪武 2년(1369)에 元 順帝의 손자와 후비 및 공주를 사로잡고, 玉璽 등을 확보하여 曹國公으로 책봉되었다. 洪武 3년(1370)에는 征虜大將軍 徐達과 함께 漠北 원정을 수행하였고, 洪武 5년(1372)의 두 번째 원정에서는 東路軍을 담당하였다. 이때 카라코룸(Karakorum)까지 진격하였지만, 원정에는 실패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원정에 참여하였다. 사망 후 歭陽王에 봉해졌고, 시호는 武靖이다(『明史』 卷126 「李文忠傳」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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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좌부장군(左副將軍)으로, 풍승(馮勝) 주 006
각주 006)
馮勝(?~1395): 鳳陽府 定遠 사람이다. 이름을 國勝, 宗異라고도 한다. 원말에 주원장에게 歸依하고 공을 쌓아 元帥가 되었다. 陳友諒, 張士誠을 공격하고 西北과 遼東의 殘元 세력을 크게 격파하여 宋國公에 봉해졌으며, 太子太師가 되어 明의 開國功臣 중에서 3번째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후에 공이 높아지는 것에 시기를 받아 賜死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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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우부장군(右副將軍)으로 삼아 거용(居庸) 주 007
각주 007)
居庸: 중국 北京 북서쪽 60km 지점에 있는 居庸關을 말한다. 華北 平原에서 몽골 고원으로 향한 도로가 산맥을 가로질러 만리장성을 넘어가는 지점에 있다. 건설 연대는 분명하지 않지만 옛날부터 변방의 요새였고, 太行山脈의 고갯길 ‘太行八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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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출발하여 응창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문충흥화(興和) 주 008
각주 008)
興和: 지금의 河北省 張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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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러 평장 죽정(竹貞)을 사로잡고,주 009
각주 009)
이와 관련된 내용은 『太祖實錄』 卷49 洪武 3년 2월 戊子條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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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낙타산(駱駝山) 주 485
각주 485)
駱駝山: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烏海市 境內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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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의 군대를 크게 물리치고 마침내 응창으로 급히 진군(進軍)했다.주 011
각주 011)
洪武 3년(1370) 당시 大將軍 徐達을 중심으로 한 北伐軍의 조직과 이들 북벌군이 거둔 구체적인 戰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3년條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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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의 군주가 이미 사망했음을 알게 되었고, [계속] 진격하여 그 성(응창성)을 포위하여 함락했다. 원 군주의 손자 매적리팔랄(買的里八剌) 주 012
각주 012)
『殊域周咨錄』 卷16 「韃靼」 洪武 3년條에는 ‘買的裡八剌’으로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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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그의 비빈(妃嬪)·대신(大臣) 및 보옥(寶玉)·도적(圖籍)을 얻었다.주 013
각주 013)
이와 관련된 내용은 『太祖實錄』 卷52 洪武 3년 5월 辛丑條에 “獲元主嫡孫買的里八剌, 並後妃宮人, 暨諸王省院達官士卒等, 並獲宋元玉璽金寶一十五, 宣和殿玉圖書一玉冊二, 鎭圭大圭玉帶玉斧各一, 及駝馬牛羊無筭, 遣人俱送京師”라고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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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태자 애유식리달랍(愛猷識理達臘, 1338~1378; 재위 1370~1378)주 014
각주 014)
愛猷識理達臘: Biligtü Khan Ayursiridara의 音譯이며, 北元의 제2대 황제 昭宗을 말한다. 원나라 12대 황제이며, 몽골 제국의 17대 대칸이다. 원 혜종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고려 출신 奇皇后이다. 1353년에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황태자의 지지파와 반대파 사이에 내전이 있었고, 황태자에게 반대하던 파의 지도자 孛羅帖木兒(Bolad Temür)가 1364년 수도를 점령하였다. 이때 애유식리달랍은 그를 지지하는 擴廓帖木兒(Köke Temür)에게 달아났지만, 그의 어머니인 기황후는 孛羅帖木兒에게 잡혀 포로가 되었다. 1365년에 그는 擴廓帖木兒와 함께 孛羅帖木兒를 공격했는데, 孛羅帖木兒는 부하에게 배반을 당한 뒤, 擴廓帖木兒에게 사살되었다. 기황후는 擴廓帖木兒의 지지를 받아 愛猷識理達臘을 황제로 즉위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擴廓帖木兒는 원나라 군대에게 반원 반란군에 대한 공격을 명했지만, 그를 초창기부터 따르던 중국인 장교를 포함한 장교단에 의해 배반을 당했다. 1370년에 혜종이 사망하자 愛猷識理達臘은 몽골 고원의 카라코룸에서 황좌를 계승하고, 宣光으로 改元하였다. 실각 당했던 擴廓帖木兒는 새로운 북원 황제의 세력에 참여해서 황제의 호위를 수행하였다. 擴廓帖木兒가 이끄는 북원의 군대는 1372년 사막에서 서달이 이끄는 명군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때 명군이 2만 명 정도 피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甘肅에서 다시 서달과 대적할 때 북원군은 심하게 몰려서 고비 사막으로 달아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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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홀로 수십의 기병만을 이끌고 도망갔다. 한편 서달심아욕(沈兒峪) 주 015
각주 015)
沈兒峪: 지금의 甘肅 定西縣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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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서 왕보보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여 패주(敗走)시켰다. 태조매적리팔랄을 숭례후(崇禮侯)에 봉(封)하고주 016
각주 016)
책봉하면서 내린 조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昔帝王之有天下, 必封前代子孫, 使作賓王家, 其來尙矣. 曩因元失其政, 四海分爭, 朕以武功削平群雄, 混一區宇, 爲天下主. 而買的裡八剌實爲元之宗孫. 比者遣將北征, 爾祖已殂, 旣克應昌, 爾乃來歸. 朕念帝王之後, 爰稽古制, 錫以侯封. 爾其夙夜恭稱朕優禮之意”(『殊域周咨錄』 卷16 「韃靼」 洪武 3년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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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군주에게 순제(順帝, 재위 1333~1370)주 017
각주 017)
順帝: 원나라의 15대 마지막 황제로 妥權帖木兒汗(Togo’an Temür Khan)이라고 한다. 順帝는 明이 내려준 諡號이고, 北元의 廟號는 惠宗이다. 제8대 明宗의 맏아들로, 궁궐 안의 파벌싸움으로 어렸을 때부터 高麗와 廣西를 옮겨 다니는 등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332년에 權臣 엔터무르에 의해 옹립된 친아우인 寧宗이 재위 43일 만에 죽자, 광서에서 돌아와 그 이듬해 上都에서 제위에 올랐다. 고려 출신의 奇氏를 황후로 맞았다. 1339년에 친히 정권을 잡으면서부터는 문화주의자인 타쿠타(조정의 실권자인 伯顔 Bayan의 조카)를 재상에 앉히고, 제9대 文宗 이후의 漢文化 존중주의로 돌아가 『遼金宋三史』 편찬을 완성하는 등 원나라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정치적·재정적으로 실책이 많고 연속적인 천재지변까지 겹쳐 국내의 치안이 악화되어 홍건적의 난 이후 1368년 大都(北京)가 함락되자, 太子(昭宗, 愛猷識理達臘, Biligtü Khan Ayursiridara)와 함께 上都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應昌으로 갔으나 그곳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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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시호(諡號)를 내려주었다.주 018
각주 018)
이와 관련된 내용은 『太祖實錄』 卷52 洪武 3년 6월 壬申條와 乙亥條 참조.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3년 6월條, 『殊域周咨錄』 卷16 「韃靼」條에도 같은 내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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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옛 의 장수 강문청(江文淸) 등과 왕자(王子) 실독아(失篤兒) 등이 차례로 귀부하였다.주 019
각주 019)
이와 관련된 내용은 『太祖實錄』 卷59 洪武 3년 12월 癸亥條에 있는데, 당시 王子 失篤兒와 더불어 國舅 阿里麻思海牙·駙馬 忙哥剌失 등이 투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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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왕보보만은 태자 애유식리달랍을 옹위(擁衛)하며 화림(和林) 주 486
각주 486)
和林: 원나라 太宗·定宗·憲宗 시대의 수도였던 카라코룸(Kharakorum)을 말한다. 중국의 문헌에는 喀喇和林, 또는 생략하여 和林·和寧 등으로 쓰인다. 1235년에 몽골 왕조 제2대 황제 오고타이에 의해 몽골고원의 중앙부에 해당하는 오르강 상류 右岸에 건설되었다. 그 뒤 정종·헌종까지 3대 약 20년에 걸쳐 몽골 제국의 수도로서 번성하였으며, 유라시아 각지에서 많은 사절·전도사·상인 등이 모여들었다. 쿠빌라이가 수도를 중국 내부에 있는 大都로 옮긴 뒤에는 몽골의 옛 도읍지 또는 和林行省의 소재지에 불과한 지방 도시로 전락했다. 원나라가 멸망하고 北元이 일어났을 때 다시 수도가 되었으나, 그 뒤에는 역사상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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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머물렀는데주 021
각주 021)
이러한 내용을 徐達이 洪武帝에게 보고하면서 15만 명의 군사를 요청하였고, 洪武帝는 15만 명의 군사를 셋으로 나누어 진격하도록 하였다(『殊域周咨錄』 卷16 「韃靼」 洪武 3년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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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가] 여러 차례 조서(詔書)주 022
각주 022)
詔: 명대에 황제가 반포하는 문서에는 詔·誥·鐵券·制·勅·駕貼·冊文·諭·書·令·符·檄·批答·赦書 등이 있었다. 詔는 중대한 政領을 천하 臣民에게 포고할 때 사용하는 문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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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내려 효유(曉諭)하였지만 따르지 않았다.

  • 각주 001)
    應昌: 元代 蒙古 지역의 중요 도시로, 嶺北行省에서 兩都에 이르는 사이에 위치한 교통요지였다. 元朝 至元 10년(1270)에 按陳孫斡羅陳 萬戶 및 그의 처 囊加眞 公主가 城을 쌓기를 조정에 청하였고, 元 世祖 쿠빌라이가 동의하여 應昌府라는 이름을 얻었다. 至元 22년(1292)에 應昌路가 되었다. 1368년에 明軍이 大都를 점령하자, 이듬해(1369) 元 惠宗 妥歡貼睦爾가 이곳으로 피신하여 임시로 建都하였다. 1370년 惠宗이 病死하자 明軍이 다시 이곳을 점령하였고, 이후 황폐해졌다. 바로가기
  • 각주 002)
    王保保: 擴廓帖木兒(Köke Temür, ?~1375)를 일컬으며, 원나라와 북원의 장군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몽골 皇子의 딸이고, 그의 아버지는 중국인으로 姓이 王氏였다. 원래 河南省에서 살았으며, 삼촌 察罕帖木兒의 자리를 물려받아 山東에서 홍건적의 반란을 진압했다. 그는 황태자의 편에 서서 孛羅帖木兒(Bolad Temür)를 중심으로 한 반황태자 파와 대립하였다. 1365년에 孛羅帖木兒를 사살하고 황태자를 복위시켰으며, 그 공으로 해남왕과 비서실 부장관에 임명되었다. 擴廓帖木兒는 원나라 군대에게 반원 반란군에 대한 공격을 명했지만, 장교단에게 배반 당했다. 愛猷識理達臘(Biligtü Khan Ayursiridara)도 그를 저버렸으나 황제 혜종에 의해 정치·군사적인 권한을 유지할 수 있었다. 두 차례에 걸친 패배 후에 그는 河南과 太原을 명나라에 잃고 甘肅省으로 달아났다. 1370년에 혜종이 죽고 愛猷識理達臘이 몽골고원의 카라코룸에서 황좌를 계승했는데, 그는 새로운 북원 황제의 세력에 참여해서 황제의 호위를 수행하였다. 1372년에 그가 이끄는 북원군은 사막에서 徐達이 이끄는 明軍에게 크게 승리를 거두고, 이후 북원의 영향력을 山西省까지 확장시켰다. 바로가기
  • 각주 003)
    定西: 지금의 甘肅省 중부에 위치한 定西市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4)
    西安: 현재 중국 山西省의 省都이며, 周 이래 唐 때까지 1,000년 가까이 國都를 두었던 곳으로, 古代 漢族 활동의 중심지였다. 漢 高祖는 현재 서안의 서북에 長安城을 쌓아 기원전 200년에 洛陽으로부터 이곳에 천도하였다. 이후 魏, 晋의 수도로서 西京이라 불렸다. 北魏가 분열한 후, 西魏가 國都로 삼았고 다음 北周로 이어졌다. 隋는 전국 통일이 이루어진 文帝 開皇 연간(581~600) 初에, 漢의 장안성 동남쪽에 新都를 건설하여 大興城이라 불렀고, 唐은 다시 이를 장안성이라 하였다. 太宗 때 大明宮, 玄宗 때 興京宮을 지어 인구 100만을 넘게 포용한 국제도시를 이루었다. 唐末 이후 점차 쇠락하다가, 明代 初에 唐代의 皇城 全域과 宮城 남부 등을 성벽으로 둘러쌓아 현재 서안성의 모습을 이루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5)
    李文忠(1339~1384): 字는 思本이고, 江蘇 盱眙 사람으로, 명조의 개국공신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주원장의 甥姪로, 19세에 군대를 이끌고 浙江·福建 등지에서 전투에 참여하면서 공을 세웠다. 洪武 2년(1369)에 元 順帝의 손자와 후비 및 공주를 사로잡고, 玉璽 등을 확보하여 曹國公으로 책봉되었다. 洪武 3년(1370)에는 征虜大將軍 徐達과 함께 漠北 원정을 수행하였고, 洪武 5년(1372)의 두 번째 원정에서는 東路軍을 담당하였다. 이때 카라코룸(Karakorum)까지 진격하였지만, 원정에는 실패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원정에 참여하였다. 사망 후 歭陽王에 봉해졌고, 시호는 武靖이다(『明史』 卷126 「李文忠傳」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6)
    馮勝(?~1395): 鳳陽府 定遠 사람이다. 이름을 國勝, 宗異라고도 한다. 원말에 주원장에게 歸依하고 공을 쌓아 元帥가 되었다. 陳友諒, 張士誠을 공격하고 西北과 遼東의 殘元 세력을 크게 격파하여 宋國公에 봉해졌으며, 太子太師가 되어 明의 開國功臣 중에서 3번째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후에 공이 높아지는 것에 시기를 받아 賜死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7)
    居庸: 중국 北京 북서쪽 60km 지점에 있는 居庸關을 말한다. 華北 平原에서 몽골 고원으로 향한 도로가 산맥을 가로질러 만리장성을 넘어가는 지점에 있다. 건설 연대는 분명하지 않지만 옛날부터 변방의 요새였고, 太行山脈의 고갯길 ‘太行八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8)
    興和: 지금의 河北省 張北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9)
    이와 관련된 내용은 『太祖實錄』 卷49 洪武 3년 2월 戊子條에 보인다. 바로가기
  • 각주 485)
    駱駝山: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烏海市 境內에 위치한다. 바로가기
  • 각주 011)
    洪武 3년(1370) 당시 大將軍 徐達을 중심으로 한 北伐軍의 조직과 이들 북벌군이 거둔 구체적인 戰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3년條에 보인다. 바로가기
  • 각주 012)
    『殊域周咨錄』 卷16 「韃靼」 洪武 3년條에는 ‘買的裡八剌’으로 나와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13)
    이와 관련된 내용은 『太祖實錄』 卷52 洪武 3년 5월 辛丑條에 “獲元主嫡孫買的里八剌, 並後妃宮人, 暨諸王省院達官士卒等, 並獲宋元玉璽金寶一十五, 宣和殿玉圖書一玉冊二, 鎭圭大圭玉帶玉斧各一, 及駝馬牛羊無筭, 遣人俱送京師”라고 기재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14)
    愛猷識理達臘: Biligtü Khan Ayursiridara의 音譯이며, 北元의 제2대 황제 昭宗을 말한다. 원나라 12대 황제이며, 몽골 제국의 17대 대칸이다. 원 혜종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고려 출신 奇皇后이다. 1353년에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황태자의 지지파와 반대파 사이에 내전이 있었고, 황태자에게 반대하던 파의 지도자 孛羅帖木兒(Bolad Temür)가 1364년 수도를 점령하였다. 이때 애유식리달랍은 그를 지지하는 擴廓帖木兒(Köke Temür)에게 달아났지만, 그의 어머니인 기황후는 孛羅帖木兒에게 잡혀 포로가 되었다. 1365년에 그는 擴廓帖木兒와 함께 孛羅帖木兒를 공격했는데, 孛羅帖木兒는 부하에게 배반을 당한 뒤, 擴廓帖木兒에게 사살되었다. 기황후는 擴廓帖木兒의 지지를 받아 愛猷識理達臘을 황제로 즉위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擴廓帖木兒는 원나라 군대에게 반원 반란군에 대한 공격을 명했지만, 그를 초창기부터 따르던 중국인 장교를 포함한 장교단에 의해 배반을 당했다. 1370년에 혜종이 사망하자 愛猷識理達臘은 몽골 고원의 카라코룸에서 황좌를 계승하고, 宣光으로 改元하였다. 실각 당했던 擴廓帖木兒는 새로운 북원 황제의 세력에 참여해서 황제의 호위를 수행하였다. 擴廓帖木兒가 이끄는 북원의 군대는 1372년 사막에서 서달이 이끄는 명군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때 명군이 2만 명 정도 피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甘肅에서 다시 서달과 대적할 때 북원군은 심하게 몰려서 고비 사막으로 달아나야 했다. 바로가기
  • 각주 015)
    沈兒峪: 지금의 甘肅 定西縣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16)
    책봉하면서 내린 조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昔帝王之有天下, 必封前代子孫, 使作賓王家, 其來尙矣. 曩因元失其政, 四海分爭, 朕以武功削平群雄, 混一區宇, 爲天下主. 而買的裡八剌實爲元之宗孫. 比者遣將北征, 爾祖已殂, 旣克應昌, 爾乃來歸. 朕念帝王之後, 爰稽古制, 錫以侯封. 爾其夙夜恭稱朕優禮之意”(『殊域周咨錄』 卷16 「韃靼」 洪武 3년條) 바로가기
  • 각주 017)
    順帝: 원나라의 15대 마지막 황제로 妥權帖木兒汗(Togo’an Temür Khan)이라고 한다. 順帝는 明이 내려준 諡號이고, 北元의 廟號는 惠宗이다. 제8대 明宗의 맏아들로, 궁궐 안의 파벌싸움으로 어렸을 때부터 高麗와 廣西를 옮겨 다니는 등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332년에 權臣 엔터무르에 의해 옹립된 친아우인 寧宗이 재위 43일 만에 죽자, 광서에서 돌아와 그 이듬해 上都에서 제위에 올랐다. 고려 출신의 奇氏를 황후로 맞았다. 1339년에 친히 정권을 잡으면서부터는 문화주의자인 타쿠타(조정의 실권자인 伯顔 Bayan의 조카)를 재상에 앉히고, 제9대 文宗 이후의 漢文化 존중주의로 돌아가 『遼金宋三史』 편찬을 완성하는 등 원나라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정치적·재정적으로 실책이 많고 연속적인 천재지변까지 겹쳐 국내의 치안이 악화되어 홍건적의 난 이후 1368년 大都(北京)가 함락되자, 太子(昭宗, 愛猷識理達臘, Biligtü Khan Ayursiridara)와 함께 上都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應昌으로 갔으나 그곳에서 죽었다. 바로가기
  • 각주 018)
    이와 관련된 내용은 『太祖實錄』 卷52 洪武 3년 6월 壬申條와 乙亥條 참조.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3년 6월條, 『殊域周咨錄』 卷16 「韃靼」條에도 같은 내용이 보인다. 바로가기
  • 각주 019)
    이와 관련된 내용은 『太祖實錄』 卷59 洪武 3년 12월 癸亥條에 있는데, 당시 王子 失篤兒와 더불어 國舅 阿里麻思海牙·駙馬 忙哥剌失 등이 투항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486)
    和林: 원나라 太宗·定宗·憲宗 시대의 수도였던 카라코룸(Kharakorum)을 말한다. 중국의 문헌에는 喀喇和林, 또는 생략하여 和林·和寧 등으로 쓰인다. 1235년에 몽골 왕조 제2대 황제 오고타이에 의해 몽골고원의 중앙부에 해당하는 오르강 상류 右岸에 건설되었다. 그 뒤 정종·헌종까지 3대 약 20년에 걸쳐 몽골 제국의 수도로서 번성하였으며, 유라시아 각지에서 많은 사절·전도사·상인 등이 모여들었다. 쿠빌라이가 수도를 중국 내부에 있는 大都로 옮긴 뒤에는 몽골의 옛 도읍지 또는 和林行省의 소재지에 불과한 지방 도시로 전락했다. 원나라가 멸망하고 北元이 일어났을 때 다시 수도가 되었으나, 그 뒤에는 역사상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바로가기
  • 각주 021)
    이러한 내용을 徐達이 洪武帝에게 보고하면서 15만 명의 군사를 요청하였고, 洪武帝는 15만 명의 군사를 셋으로 나누어 진격하도록 하였다(『殊域周咨錄』 卷16 「韃靼」 洪武 3년條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22)
    詔: 명대에 황제가 반포하는 문서에는 詔·誥·鐵券·制·勅·駕貼·冊文·諭·書·令·符·檄·批答·赦書 등이 있었다. 詔는 중대한 政領을 천하 臣民에게 포고할 때 사용하는 문서이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왕보보(王保保), 태조, 서달, 이문충(李文忠), 풍승(馮勝), 이문충, 죽정(竹貞), 매적리팔랄(買的里八剌), 애유식리달랍, 愛猷識理達臘, 서달, 왕보보, 태조, 매적리팔랄, , 순제, 順帝, 강문청(江文淸), 실독아(失篤兒), 왕보보, 애유식리달랍, 태조
지명
, 응창(應昌), 정서(定西), 서안(西安), 정서, 거용(居庸), 응창, 흥화(興和), 낙타산(駱駝山), , 응창, , 응창성, , 심아욕(沈兒峪), , 화림(和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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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의 군주가 응창(應昌)으로 도망을 가니 태조(太祖)가 진격을 명하여 함락시키자 이에 왕자 및 장수들이 귀부한 설명 자료번호 : jo.k_0024_0327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