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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총병관 진규와 총독 구양필진이 여족을 토벌함

  • 국가
    광동경주부(廣東瓊州府)
[가정] 29년(1550)에 총병관(總兵官) 진규(陳圭) 주 001
각주 001)
陳圭(1509∼1554): 字는 世秉이다. 南直隷 合肥縣(지금의 安徽 合肥市) 출신이다. 平江伯 陳瑄의 후예이고, 陳熊의 再從子로서 平江伯의 작위를 세습 받았다. 宿衛를 거느리며 京營僉書中軍府를 관장했다. 천거를 받고 兩廣으로 出鎭하여 封川 등지의 농민반란을 진압하여 太子太保의 작위를 추가로 받았다. 陳圭는 士卒들과 同苦同樂하며 적의 소재를 보고받으면 곧바로 갑옷을 두르고 선두에 서서 진격하였는데, 피하는 바가 없어 향하는 곳마다 승리했다고 한다. 廣東 일대에서 10여 년간 활동하며 小賊을 섬멸한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후에 北京으로 소환되어 後軍府를 관장했다. 陳圭의 아내는 仇氏로서 咸寧侯 仇鸞의 동생이었는데, 陳圭와 仇鸞의 사이가 나빴다. 仇鸞이 자주 嘉靖帝에게 陳圭를 헐뜯어 거의 得罪할 정도였는데, 끝내는 역전되어 이후는 오히려 嘉靖帝의 총애를 받았다. 얼마 후에 京營의 戎政을 總督하고 京師의 外城 工程을 提督하였다. 工程이 끝나자 太子太傅의 작위가 추가되었다. 嘉靖 33년(1554) 12월 23일에 官府에서 순직하니 나이 46세였다. 太傅로 추증되고 武襄이란 諡號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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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 구양필진(歐陽必進) 주 002
각주 002)
歐陽必進(1491∼1567): 子字는 任夫, 號는 約庵이다. 安福縣 平都鎭 仙壇村 출신이다. 明代의 저명한 정치가이자 과학자이다. 正德 8년(1513) 江西의 鄕試에 합격하고, 12년(1517)에 進士로 급제하여 禮部 主事가 되었다. 관직은 浙江布政使, 鄖陽巡撫, 兩廣總督, 兩京都御史 및 刑部, 吏部, 工部尙書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嘉靖 23년(1544) 鄖陽(지금의 湖北 鄖縣)巡撫 재직 시에 현지에서 牛疫이 창궐하여 耕牛가 거의 전멸할 지경이 되었다. 백성들은 겨우 人力으로 쟁기를 끌어 경작해야 했으므로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에 歐陽必進은 家鄕에서의 경험과 자료 조사 등의 방법을 결합하여 직접 人力耕作機械를 발명하였는데, 그 효과가 대단하여 농민들의 큰 환영을 받았다. 현지 농민들은 歐陽必進이 발명한 경작기계를 통하여 牛疫의 피해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이 기계의 발명은 중국 고대의 농업과학기술사에서도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쾌거였다. 한편 刑部尙書 재임 시에는 법 적용을 엄정하게 하고 滅私奉公하며 밤낮으로 나태하지 않아 嘉靖帝로부터 ‘端愼老成’이란 칭찬을 받았다. 工部尙書 재임 시에는 皇宮의 午門, 天安門 및 太和殿, 中和殿, 保和殿 重修를 主持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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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 군대를 통솔하여 진공해서 토벌하여 구적 5,380명의 수급을 베고 1,049명을 생포했고, 소와 양 및 무기를 탈취한 것이 그 두 배였으며, 376명을 불러들여 위무하였다. 승전의 보고를 듣고 가정제는 그들의 공로를 가상하게 여겨 진규구양필진에게 봉록의 미곡과 봉음(封廕)의 승계를 차등을 두어 하사하였다.주 003
각주 003)
『世宗實錄』卷363 嘉靖 29년 7월 辛丑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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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陳圭(1509∼1554): 字는 世秉이다. 南直隷 合肥縣(지금의 安徽 合肥市) 출신이다. 平江伯 陳瑄의 후예이고, 陳熊의 再從子로서 平江伯의 작위를 세습 받았다. 宿衛를 거느리며 京營僉書中軍府를 관장했다. 천거를 받고 兩廣으로 出鎭하여 封川 등지의 농민반란을 진압하여 太子太保의 작위를 추가로 받았다. 陳圭는 士卒들과 同苦同樂하며 적의 소재를 보고받으면 곧바로 갑옷을 두르고 선두에 서서 진격하였는데, 피하는 바가 없어 향하는 곳마다 승리했다고 한다. 廣東 일대에서 10여 년간 활동하며 小賊을 섬멸한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후에 北京으로 소환되어 後軍府를 관장했다. 陳圭의 아내는 仇氏로서 咸寧侯 仇鸞의 동생이었는데, 陳圭와 仇鸞의 사이가 나빴다. 仇鸞이 자주 嘉靖帝에게 陳圭를 헐뜯어 거의 得罪할 정도였는데, 끝내는 역전되어 이후는 오히려 嘉靖帝의 총애를 받았다. 얼마 후에 京營의 戎政을 總督하고 京師의 外城 工程을 提督하였다. 工程이 끝나자 太子太傅의 작위가 추가되었다. 嘉靖 33년(1554) 12월 23일에 官府에서 순직하니 나이 46세였다. 太傅로 추증되고 武襄이란 諡號를 받았다. 바로가기
  • 각주 002)
    歐陽必進(1491∼1567): 子字는 任夫, 號는 約庵이다. 安福縣 平都鎭 仙壇村 출신이다. 明代의 저명한 정치가이자 과학자이다. 正德 8년(1513) 江西의 鄕試에 합격하고, 12년(1517)에 進士로 급제하여 禮部 主事가 되었다. 관직은 浙江布政使, 鄖陽巡撫, 兩廣總督, 兩京都御史 및 刑部, 吏部, 工部尙書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嘉靖 23년(1544) 鄖陽(지금의 湖北 鄖縣)巡撫 재직 시에 현지에서 牛疫이 창궐하여 耕牛가 거의 전멸할 지경이 되었다. 백성들은 겨우 人力으로 쟁기를 끌어 경작해야 했으므로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에 歐陽必進은 家鄕에서의 경험과 자료 조사 등의 방법을 결합하여 직접 人力耕作機械를 발명하였는데, 그 효과가 대단하여 농민들의 큰 환영을 받았다. 현지 농민들은 歐陽必進이 발명한 경작기계를 통하여 牛疫의 피해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이 기계의 발명은 중국 고대의 농업과학기술사에서도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쾌거였다. 한편 刑部尙書 재임 시에는 법 적용을 엄정하게 하고 滅私奉公하며 밤낮으로 나태하지 않아 嘉靖帝로부터 ‘端愼老成’이란 칭찬을 받았다. 工部尙書 재임 시에는 皇宮의 午門, 天安門 및 太和殿, 中和殿, 保和殿 重修를 主持하기도 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3)
    『世宗實錄』卷363 嘉靖 29년 7월 辛丑條 참조.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진규(陳圭), 구양필진(歐陽必進), 진규, 구양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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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병관 진규와 총독 구양필진이 여족을 토벌함 자료번호 : jo.k_0024_0319_0090_0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