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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나연의 반란

  • 국가
    광동경주부(廣東瓊州府)
[가정] 28년(1549)에 애주의 구적 두목 나연(那燕) 등이 무리 4,000명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자, [가정제가] 조서를 내려 양광(兩廣)의 관군 9,000명을 보내 토벌하도록 하였다.주 001
각주 001)
『世宗實錄』卷351 嘉靖 28년 8월 庚申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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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사 중 정정곡(鄭廷鵠) 주 002
각주 002)
鄭廷鵠(1505∼1563): 字는 元侍, 號는 簧溪이다. 海南 瓊山 출신이다. 15세에 海貞范 門下에서 修學하였는데, 丘浚의 曾孫 邱郊 및 邱祁와 동창이 된다. 海先生은 鄭廷鵠가 奇才임을 보고 후일에 반드시 大器가 되리라 생각해서 딸(海瑞의 고모)과 결혼시켰다. 郡學에 入學한 뒤에는 丘浚의 著作을 연마하며 그의 爲人과 학식에 탄복했다고 한다. 鄭廷鵠은 일찍이 海瑞의 啓蒙敎師가 되었는데, 그의 심원한 학식과 고매한 품행은 海瑞의 성장에 큰 영향을 끼쳤다. 嘉靖 17년(1538) 會試에서 제3등으로 합격했고, 殿試에서 進士出身으로 급제하였다. 工部都水司主事, 吏科給事中, 工科左給事를 역임했는데, 모두 공명정대하고 청렴결백하였다. 嘉靖 28년(1549) 8월에 崖州 黎族 추장 那燕이 무리 4,000여 명을 모아 鄕寨를 노략질하고 城郭을 공격하자 반란 평정의 계책을 上言하였는데, 兵部에서 모두 그대로 시행하여 이듬해(1550) 7월에 반란을 평정할 수 있었다. 그해에 外官의 考察을 주관하였는데, 모두 公正無私하여 내외의 칭찬을 받았다. 同年 會試의 同考官을 맡았는데, 일시에 그 門下에서 나온 자들이 모두 海內의 名士였다. 얼마 후에는 江西의 督學副使가 되었는데, 諸生들이 敬服하였다. 임기를 채운 뒤에 江西布政司右參政이 되었다. 후에 모친의 養老를 위해 은퇴를 청하여 귀향하였다. 家鄕에서 著書 외에 石湖書院을 創建하였다. 晩年에 仕宦의 뜻을 완전히 접고 끝내 朝廷의 기용을 謝絶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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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래와 같이 아뢰었다.
“경주의 여러 여족이 산동(山峒)을 점거하니 주현은 도리어 그 외부를 둘렀습니다. 지세는 그들이 높고 우리가 낮으며, 토양은 그들이 비옥하고 우리가 척박하며, 형세는 그들이 집중되고 우리가 분산되어 있습니다. 까닭에 군(郡)을 설치한 이래 1,600여 년 동안 여족의 해를 입지 않은 해가 없었지만, 오늘날과 같이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오늘날 여족의 근심은 9,000명의 관병으로 해결할 수 없으니, 반드시 낭토(狼土)주 003
각주 003)
狼土: 狼族의 土兵, 즉 狼兵을 가리킨다. 狼兵은 明 중엽에 廣西·廣東 일대에서 모집한 군대를 지칭하는데, 이들이 정예부대가 되었다. 그 부대는 주로 壯族과 瑶族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土官의 통제를 받았다. 狼兵은 兵籍에 기재되지 않는 비정규 군대였으나 그들의 전투능력이 뛰어나서 여러 진압작전에 투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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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관병을 추가로 동원하고 아울러 타수(打手)를 초모(招募)하여, 수만 명의 무리를 모아 일거에 사방에서 진공한 연후에야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 각주 001)
    『世宗實錄』卷351 嘉靖 28년 8월 庚申條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2)
    鄭廷鵠(1505∼1563): 字는 元侍, 號는 簧溪이다. 海南 瓊山 출신이다. 15세에 海貞范 門下에서 修學하였는데, 丘浚의 曾孫 邱郊 및 邱祁와 동창이 된다. 海先生은 鄭廷鵠가 奇才임을 보고 후일에 반드시 大器가 되리라 생각해서 딸(海瑞의 고모)과 결혼시켰다. 郡學에 入學한 뒤에는 丘浚의 著作을 연마하며 그의 爲人과 학식에 탄복했다고 한다. 鄭廷鵠은 일찍이 海瑞의 啓蒙敎師가 되었는데, 그의 심원한 학식과 고매한 품행은 海瑞의 성장에 큰 영향을 끼쳤다. 嘉靖 17년(1538) 會試에서 제3등으로 합격했고, 殿試에서 進士出身으로 급제하였다. 工部都水司主事, 吏科給事中, 工科左給事를 역임했는데, 모두 공명정대하고 청렴결백하였다. 嘉靖 28년(1549) 8월에 崖州 黎族 추장 那燕이 무리 4,000여 명을 모아 鄕寨를 노략질하고 城郭을 공격하자 반란 평정의 계책을 上言하였는데, 兵部에서 모두 그대로 시행하여 이듬해(1550) 7월에 반란을 평정할 수 있었다. 그해에 外官의 考察을 주관하였는데, 모두 公正無私하여 내외의 칭찬을 받았다. 同年 會試의 同考官을 맡았는데, 일시에 그 門下에서 나온 자들이 모두 海內의 名士였다. 얼마 후에는 江西의 督學副使가 되었는데, 諸生들이 敬服하였다. 임기를 채운 뒤에 江西布政司右參政이 되었다. 후에 모친의 養老를 위해 은퇴를 청하여 귀향하였다. 家鄕에서 著書 외에 石湖書院을 創建하였다. 晩年에 仕宦의 뜻을 완전히 접고 끝내 朝廷의 기용을 謝絶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3)
    狼土: 狼族의 土兵, 즉 狼兵을 가리킨다. 狼兵은 明 중엽에 廣西·廣東 일대에서 모집한 군대를 지칭하는데, 이들이 정예부대가 되었다. 그 부대는 주로 壯族과 瑶族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土官의 통제를 받았다. 狼兵은 兵籍에 기재되지 않는 비정규 군대였으나 그들의 전투능력이 뛰어나서 여러 진압작전에 투입되었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나연(那燕), 정정곡(鄭廷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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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연의 반란 자료번호 : jo.k_0024_0319_0090_0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