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족들의 노략질과 약탈
선덕 원년(1426)에 낙회(樂會)의 토관 주부(主簿) 왕존례(王存禮) 등이 여족 수령 여녕(黎寧) 및 만주(萬州)의 여족 백성 장초(張初) 등을 파견하여 내조하여 방물을 바치니,주 001 선덕제가 상서(尙書) 호영(胡濙)
주 002
각주 002)

에게 이르기를, “여족 사람들이 해도(海島)에 살며 예의(禮儀)를 몰라 배반과 복종이 반복되어, 예전에 [이 때문에] 오로지 관리를 두어 어루만지고 안정시켰는데, 지금 내조하였으니 마땅히 추가로 하사품을 주어야 할 것이다”라 하였다.주 003 9월에 징매현(澄邁縣)의 여족 왕관주(王觀珠)·경산현(瓊山縣)의 여족 왕관정(王觀政) 등이 무리를 모아 경산 토관 지현 허지광(許志廣)을 살해하고,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마을을 노략질하며 사람과 가축을 죽이고 약탈하자, [조정에서는] 광동 삼사(三司)에게 명하여 실상을 조사하여 토벌하도록 하였다.주 004 [선덕] 2년(1427)에 지휘 왕우(王瑀) 등이 추격하여 여족의 구적(寇賊)을 체포하는데, 관병(官兵)이 금계령(金鷄嶺)에 이르자 구적이 무리를 거느리고 저항하며 맞섰지만 [왕우 등이] 그들을 격파하고, 구적 수령 왕관정 및 수종(隨從)하는 구적 262명을 생포하고 267명을 참수하니 나머지 무리들은 궤멸되어 도망쳐 달아나 산 속으로 들어갔는데, 여족 812호(戶)를 불러들여 위무하여 생업으로 복귀시키고,주 005 승전했다고 보고하였으며,주 006
왕관정 등을 칼을 씌워 경사로 보냈다. 선덕제가 상서 건의(蹇義)주 007胡濙(1375∼1463): 字는 源洁, 號는 洁庵이다. 江蘇 武進 출신으로 明代의 高官, 文學家, 醫學家였다. 태어나면서 白髮이었는데, 달포 쯤 지나자 검은색으로 바뀌었다. 建文 2년(1400)에 進士로 급제하여 兵科給事中으로 제수되었다. 永樂 원년(1403)에 戶科都給事中으로 승진하였다. 한편 靖難의 變 과정에서 建文帝가 행방불명이 되자 永樂帝는 胡濙등을 사방으로 보내 建文帝를 찾도록 했다. 胡濙은 이 일로 약 10년 동안 천하를 돌아다니며 보고들은 바를 永樂帝에게 보고하였다. 永樂 14년(1416)에 조사를 마치고 조정으로 돌아와 母親의 喪禮를 치루기 위하여 휴가를 청하였으나, 永樂帝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奪情起復’하도록 하면서 禮部左侍郞으로 발탁하였다. 영락 17년(1419) 다시 명을 받고 江·浙·湖·湘 등지를 돌아다니며 建文帝의 행방을 찾았다. 영락 21년(1423) 北京으로 돌아왔으나, 마침 永樂帝는 北征을 위해 宣府에 머물고 있었다. 胡濙이 宣府에 이르렀을 때 永樂帝는 이미 잠자리에 들었는데, 胡濙이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접견하여, 두 사람은 四更에 이르도록 談論을 나누었다고 한다. 洪熙帝 즉위 후에 胡濙은 行在禮部侍郞이 되었는데, 北京建都는 좋지 않다면서 南都로 還都하는 것이 供億轉運의 번거로움을 덜 수 있다고 주장하여 洪熙帝가 이를 嘉納하였다. 다만 이전에 永樂帝에게 자신에 대하여 密疏를 올린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胡濙을 의심하여 부르지는 않았다. 이에 太子賓客 겸 南京國子祭酒로 삼았다. 洪熙帝 사후 宣德帝가 즉위했을 때 胡濙은 5명의 托孤大臣 가운데 한 명이었다. 당시 胡濙은 禮部左侍郞으로 관직을 옮겼다가 얼마 후 行在禮部尙書로 승진하였다. 漢王이 반란을 일으키자 胡濙은 楊榮과 함께 親征을 중장하였다. 반란 진압 후 두터운 상을 받았다. 宣德 4년(1429)에 詹事府를 겸하여 관할하였다. 宣德 6년(1431)에는 行在戶部도 겸하여 관할하였다. 正統帝가 즉위하여 冗費를 줄이라는 詔書를 내리자 胡濙은 上供의 액수를 줄이고, 法王 이하의 番僧 400∼500명을 덜어낼 것 등을 上奏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行在禮部의 印章이 없어졌지만 正統帝는 불문에 붙이고 다시 만들 것을 명하였다. 얼마 후 또 印章을 잃어버리자 탄핵을 받고 하옥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잃어버린 印章을 찾아내 복직되었다. 宣德 9년(1434) 나이 70에 이르자 致仕를 요청했지만, 正統帝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正統帝가 1449년 土木堡의 變으로 오이라트의 에센 군에게 생포되자 조정의 群臣들이 남방으로 천도를 주장했지만, 胡濙은 侍郞 于謙과 함께 견결히 반대하였다. 景泰帝가 즉위하자 太子太傅로 승진하였다. 다만 正統帝의 귀환과 관련한 각종 의례 방면에서 최대한 간략한 의례를 원하는 景泰帝와 의견이 맞지 않았다. 英宗이 復位하자 胡濙은 入朝하여 은퇴를 요청하였다. 天順帝는 두터운 상을 하사하였다. 胡濙은 6명의 황제를 섬기기를 대략 60년 동안 하였는데 내외로 ‘耆德’이라 칭해졌다. 귀향함에 이르러 세 명의 동생이 있었는데, 모두 古稀가 넘어 머리와 수염이 하얀 형제가 一堂에 모였다 하여 이를 ‘壽愷’라 하였다. 7년 뒤에 사망하니 향년 89세였다. 太保로 추증하고, 忠安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胡濙은 평생 검소하고 寬厚하며 喜怒哀樂의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고 겸손한 처신으로 일관하였다.
각주 007)

에게 이르기를, “만족(蠻族)의 본성이 비록 순치시키기 어렵지만 변란에까지 이른 데에는 반드시 격발된 바가 있는 법이다. 마땅히 엄히 여족의 여러 관리들을 경계하고 위무하며 관대함으로써 그들을 통제해야 하는데, 만약 사단을 일으키고 변란을 격발시킨다면 나라에 정해진 형법이 있는 것이다”라 하였다.주 008
蹇義(1364∼1435): 明代의 大臣이다. 字는 宜之이고, 巴縣(지금의 重慶) 출신이다. 初名은 蹇瑢이었다. 홍무 18년(1385)에 進士로 급제하여 中書舍人으로 제수 받았다. 上奏한 내용이 洪武帝의 뜻에 부합하는 일이 많았는데, 洪武帝는 그의 성실함을 좋아하여 특별히 그를 위하여 親筆로 ‘義’라는 글자를 내려 주어 이름을 바꾸도록 했다. 建文 시기에는 吏部右侍郞으로 특별 발탁되었다. 靖難의 役으로 燕王 朱棣가 大統을 잇자 蹇義는 永樂帝를 迎附하였다. 蹇義의 관직은 吏部左侍郞을 거쳐 吏部尙書로 승진하였다. 永樂 2년(1404)에는 太子詹事를 겸하였는데, 永樂帝와 太子 모두에게 신임을 얻었다. 太子少保, 太子少師 등의 職銜을 얻었다. 戶部尙書 夏原과 함께 ‘蹇夏’라 불렸다. 그 후 洪熙帝와 宣德帝 시기에도 두 황제의 신임을 두터이 받았다. 正統帝 즉위 직후에 病死하였다. 死後에 太師로 추증되었고, 忠定이란 시호를 받았다. 蹇義의 사람됨은 질박하고 성실하였다. 오랫동안 吏部尙書를 역임했으며, 모두 5명의 황제를 모셨는데, 典章制度의 정립에 힘을 쓰는 등 明初의 정계에 깊은 발자취를 남겼다.
- 각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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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2)
胡濙(1375∼1463): 字는 源洁, 號는 洁庵이다. 江蘇 武進 출신으로 明代의 高官, 文學家, 醫學家였다. 태어나면서 白髮이었는데, 달포 쯤 지나자 검은색으로 바뀌었다. 建文 2년(1400)에 進士로 급제하여 兵科給事中으로 제수되었다. 永樂 원년(1403)에 戶科都給事中으로 승진하였다. 한편 靖難의 變 과정에서 建文帝가 행방불명이 되자 永樂帝는 胡濙등을 사방으로 보내 建文帝를 찾도록 했다. 胡濙은 이 일로 약 10년 동안 천하를 돌아다니며 보고들은 바를 永樂帝에게 보고하였다. 永樂 14년(1416)에 조사를 마치고 조정으로 돌아와 母親의 喪禮를 치루기 위하여 휴가를 청하였으나, 永樂帝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奪情起復’하도록 하면서 禮部左侍郞으로 발탁하였다. 영락 17년(1419) 다시 명을 받고 江·浙·湖·湘 등지를 돌아다니며 建文帝의 행방을 찾았다. 영락 21년(1423) 北京으로 돌아왔으나, 마침 永樂帝는 北征을 위해 宣府에 머물고 있었다. 胡濙이 宣府에 이르렀을 때 永樂帝는 이미 잠자리에 들었는데, 胡濙이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접견하여, 두 사람은 四更에 이르도록 談論을 나누었다고 한다. 洪熙帝 즉위 후에 胡濙은 行在禮部侍郞이 되었는데, 北京建都는 좋지 않다면서 南都로 還都하는 것이 供億轉運의 번거로움을 덜 수 있다고 주장하여 洪熙帝가 이를 嘉納하였다. 다만 이전에 永樂帝에게 자신에 대하여 密疏를 올린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胡濙을 의심하여 부르지는 않았다. 이에 太子賓客 겸 南京國子祭酒로 삼았다. 洪熙帝 사후 宣德帝가 즉위했을 때 胡濙은 5명의 托孤大臣 가운데 한 명이었다. 당시 胡濙은 禮部左侍郞으로 관직을 옮겼다가 얼마 후 行在禮部尙書로 승진하였다. 漢王이 반란을 일으키자 胡濙은 楊榮과 함께 親征을 중장하였다. 반란 진압 후 두터운 상을 받았다. 宣德 4년(1429)에 詹事府를 겸하여 관할하였다. 宣德 6년(1431)에는 行在戶部도 겸하여 관할하였다. 正統帝가 즉위하여 冗費를 줄이라는 詔書를 내리자 胡濙은 上供의 액수를 줄이고, 法王 이하의 番僧 400∼500명을 덜어낼 것 등을 上奏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行在禮部의 印章이 없어졌지만 正統帝는 불문에 붙이고 다시 만들 것을 명하였다. 얼마 후 또 印章을 잃어버리자 탄핵을 받고 하옥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잃어버린 印章을 찾아내 복직되었다. 宣德 9년(1434) 나이 70에 이르자 致仕를 요청했지만, 正統帝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正統帝가 1449년 土木堡의 變으로 오이라트의 에센 군에게 생포되자 조정의 群臣들이 남방으로 천도를 주장했지만, 胡濙은 侍郞 于謙과 함께 견결히 반대하였다. 景泰帝가 즉위하자 太子太傅로 승진하였다. 다만 正統帝의 귀환과 관련한 각종 의례 방면에서 최대한 간략한 의례를 원하는 景泰帝와 의견이 맞지 않았다. 英宗이 復位하자 胡濙은 入朝하여 은퇴를 요청하였다. 天順帝는 두터운 상을 하사하였다. 胡濙은 6명의 황제를 섬기기를 대략 60년 동안 하였는데 내외로 ‘耆德’이라 칭해졌다. 귀향함에 이르러 세 명의 동생이 있었는데, 모두 古稀가 넘어 머리와 수염이 하얀 형제가 一堂에 모였다 하여 이를 ‘壽愷’라 하였다. 7년 뒤에 사망하니 향년 89세였다. 太保로 추증하고, 忠安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胡濙은 평생 검소하고 寬厚하며 喜怒哀樂의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고 겸손한 처신으로 일관하였다.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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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7)
蹇義(1364∼1435): 明代의 大臣이다. 字는 宜之이고, 巴縣(지금의 重慶) 출신이다. 初名은 蹇瑢이었다. 홍무 18년(1385)에 進士로 급제하여 中書舍人으로 제수 받았다. 上奏한 내용이 洪武帝의 뜻에 부합하는 일이 많았는데, 洪武帝는 그의 성실함을 좋아하여 특별히 그를 위하여 親筆로 ‘義’라는 글자를 내려 주어 이름을 바꾸도록 했다. 建文 시기에는 吏部右侍郞으로 특별 발탁되었다. 靖難의 役으로 燕王 朱棣가 大統을 잇자 蹇義는 永樂帝를 迎附하였다. 蹇義의 관직은 吏部左侍郞을 거쳐 吏部尙書로 승진하였다. 永樂 2년(1404)에는 太子詹事를 겸하였는데, 永樂帝와 太子 모두에게 신임을 얻었다. 太子少保, 太子少師 등의 職銜을 얻었다. 戶部尙書 夏原과 함께 ‘蹇夏’라 불렸다. 그 후 洪熙帝와 宣德帝 시기에도 두 황제의 신임을 두터이 받았다. 正統帝 즉위 직후에 病死하였다. 死後에 太師로 추증되었고, 忠定이란 시호를 받았다. 蹇義의 사람됨은 질박하고 성실하였다. 오랫동안 吏部尙書를 역임했으며, 모두 5명의 황제를 모셨는데, 典章制度의 정립에 힘을 쓰는 등 明初의 정계에 깊은 발자취를 남겼다.
- 각주 008)
색인어
- 이름
- 왕존례(王存禮), 장초(張初), 호영(胡濙), 왕관주(王觀珠), 왕관정(王觀政), 허지광(許志廣), 왕우(王瑀), 왕우, 왕관정, 왕관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