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장과 잠맹의 갈등
잠장은 지략이 많았다. 전주(田州)의 잠맹(岑猛)이 법을 어겨 견책을 당했는데, 도어사 요막(姚鏌)
주 001
각주 001)

이 장차 군대를 일으켜 그를 토벌하려 하였다. 잠장은 잠맹의 장인이었다. 요막은 잠장이 잠맹과 한 패거리가 될 것을 염려하여 도지휘(都指揮) 심희의(沈希儀)
주 002姚鏌(1465∼1539): 字는 英之이다. 浙江 慈溪 출신이다. 明代의 名臣이자 저명한 軍事家였다. 弘治 6년(1493)에 進士로 급제하였다. 禮部主事를 거쳐 員外郞으로 승진하였다. 후에는 廣西提學僉事로 발탁되었다. 姚鏌은 宣成書院을 창설하여 五經의 전문가를 초빙하여 士子들을 가르쳤다. 후에 福建副使로 임명되었다가 얼마 뒤에는 學政으로 바뀌었다. 正德 9년(1514)에는 貴州按察使로 발탁되었다. 정덕 15년(1520)에는 右副都御史로 배수되어 延綏巡撫가 되었다. 嘉靖 원년(1522) 吉囊이 涇陽을 침입하자 半夜에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습격하여 두 명의 敵將을 베었다. 이후 工部右侍郞으로 승진하였다. 가정 4년(1525)에는 右都御史가 되어 兩廣軍務提督 겸 巡撫가 되었다. 田州 土官 岑猛이 반란을 일으키자 姚鏌은 永順과 保靖의 兵馬를 동원하고, 沈希儀 등으로 하여금 병사 8만 명을 지휘하여 길을 나누어 토벌토록 하였다. 沈希儀의 계략을 채용하여 岑猛을 대파하였다. 조정에서는 姚鏌을 左都御史로 승진시키고 太子少保를 더해 주었다. 姚鏌은 流官 설치를 청하면서 ‘善後七事’를 올렸는데, 모두 채택되었다. 이후 張璁등과의 不和로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嘉靖 13년(1534) 三邊軍務總制로 임명받았다. 大學士費宏이 姚鏌을 추천하여 결국 兵部尙書 자격으로 三邊軍務를 總制토록 명을 받았으나, 費宏이 사망하자 姚鏌은 다시 사직하였다. 이에 대해 嘉靖帝는 불쾌하게 여겨 결국 姚鏌은 낙향하고 말았고, 끝내 다시는 기용되지 못했는데, 몇 년 후에 사망했다.
각주 002)

를 불러 상의하였다. 심희의는 전부터 잠장의 딸이 총애를 잃어 [잠장이] 잠맹에게 원한을 품고 있음을 알았고, 또 부하 천호(千戶)주 003
조신(趙臣)이 줄곧 잠장과 좋은 관계임을 알았다. 심희의는 이를 이용하여 조신으로 하여금 잠장에게 잠맹을 도모할 것을 말하니, 잠장이 명을 받아들였다. 당시 잠맹의 아들 잠방언(岑邦彦)이 공요애(工堯隘)를 지키고 있었는데, 잠장이 거짓으로 병사 1,000명을 보내어 잠방언을 돕도록 하고 말하기를, “천병(天兵)이 온 것은 인당(姻黨)주 004의 연고 때문이니 장차 너와 화(禍)를 같이 할 것이다. 지금 정예병을 내어 [이곳으로] 왔으니, 힘을 다하여 굳게 지키고자 한다”고 하였다. 잠방언은 흔쾌히 이를 받아들였다. 잠장이 사람을 보내 심희의에게 보고하여 말하기를, “삼가 1,000명으로 내응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당시 전주(田州)의 병사가 죽음을 무릅쓰고 저항하여 싸우니, 여러 장수 가운데 관애(關隘)를 지키는 자들[과 교전하는 것]을 이롭다고 여기는 자가 없었는데, 심희의만이 홀로 병사를 데리고 가서 교전하였다. 대략 세 번 싸우니 귀순의 병사가 큰 소리로 “졌습니다”라 말하였다. 전주의 병사가 놀라 궤멸되니 심희의가 병사들을 지휘하여 기세를 타고서 추격해 수천 급을 참수하였는데, 잠방언이 [이 싸움에서] 사망하였다. 잠맹이 패전의 소식을 듣고는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하]려 하였다. 그런데 잠장은 앞서 이미 별관(別館)을 만들어 놓고서, 사람을 시켜 잠맹을 청하였다. 당시 잠맹은 총망하고 급박하여 도망갈 곳을 알지 못했는데, 드디어 관인을 가지고 잠장을 따라가니, [잠장은] 그로 하여금 귀순으로 가도록 하였다. 잠장은 거짓으로 잠맹을 위해 상주문의 초안을 작성하고는, 잠맹에게 관인을 꺼내어 봉함할 것을 독촉하였다. 잠장은 잠맹의 관인이 어디에 있는 지를 파악한 뒤에 곧 독주(毒酒)로 잠맹을 죽이고, 그 머리를 잘라 부인(府印)과 함께 포장하여 지름길로 빨리 군문(軍門)에 보냈다. [그러나] 참언 때문에 방해를 받아 끝내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다.沈希儀(1494∼1554): 明代의 將領이다. 字는 唐佐, 號는 紫江이다. 貴縣(지금의 貴港) 출신이다. 正德 3년(1508) 부친의 직위를 계승하여 奉議衛指揮使가 되었고, 정덕 12년(1517)에 廣西都指揮僉事로 승진하였다. 3년 후에 荔浦 등지의 농민반란을 진압하고, 都指揮同知로 승진하였다. 嘉靖 5년(1526) 계략을 써서 田州府 土官 岑猛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이듬해(1527) 思恩參將이 되었다. 후에 柳慶參將이 되어 柳州를 駐守하면서 泉州, 武宣 등지의 瑤族 반란을 진압하였다. 嘉靖 16년(1537)에는 思恩府 土官 岑金의 반란을 평정하고, 또 總督 張經을 따라 大藤峽 등의 반란 근거지를 공략하였다. 후에는 四川左參將, 都督僉事, 都督同知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앞뒤로 貴州, 兩廣, 江淮 등지를 鎭守하고, 海南 五指山 黎族과 貴州 銅仁 苗族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嘉靖 32년(1553)에는 군대를 거느리고 倭寇의 침공을 막으려 했으나, 아무런 전공을 세우지 못하여 탄핵을 받고 귀향하였다. 이듬해(1554)에 病死하였다.
-
각주 001)
姚鏌(1465∼1539): 字는 英之이다. 浙江 慈溪 출신이다. 明代의 名臣이자 저명한 軍事家였다. 弘治 6년(1493)에 進士로 급제하였다. 禮部主事를 거쳐 員外郞으로 승진하였다. 후에는 廣西提學僉事로 발탁되었다. 姚鏌은 宣成書院을 창설하여 五經의 전문가를 초빙하여 士子들을 가르쳤다. 후에 福建副使로 임명되었다가 얼마 뒤에는 學政으로 바뀌었다. 正德 9년(1514)에는 貴州按察使로 발탁되었다. 정덕 15년(1520)에는 右副都御史로 배수되어 延綏巡撫가 되었다. 嘉靖 원년(1522) 吉囊이 涇陽을 침입하자 半夜에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습격하여 두 명의 敵將을 베었다. 이후 工部右侍郞으로 승진하였다. 가정 4년(1525)에는 右都御史가 되어 兩廣軍務提督 겸 巡撫가 되었다. 田州 土官 岑猛이 반란을 일으키자 姚鏌은 永順과 保靖의 兵馬를 동원하고, 沈希儀 등으로 하여금 병사 8만 명을 지휘하여 길을 나누어 토벌토록 하였다. 沈希儀의 계략을 채용하여 岑猛을 대파하였다. 조정에서는 姚鏌을 左都御史로 승진시키고 太子少保를 더해 주었다. 姚鏌은 流官 설치를 청하면서 ‘善後七事’를 올렸는데, 모두 채택되었다. 이후 張璁등과의 不和로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嘉靖 13년(1534) 三邊軍務總制로 임명받았다. 大學士費宏이 姚鏌을 추천하여 결국 兵部尙書 자격으로 三邊軍務를 總制토록 명을 받았으나, 費宏이 사망하자 姚鏌은 다시 사직하였다. 이에 대해 嘉靖帝는 불쾌하게 여겨 결국 姚鏌은 낙향하고 말았고, 끝내 다시는 기용되지 못했는데, 몇 년 후에 사망했다.
-
각주 002)
沈希儀(1494∼1554): 明代의 將領이다. 字는 唐佐, 號는 紫江이다. 貴縣(지금의 貴港) 출신이다. 正德 3년(1508) 부친의 직위를 계승하여 奉議衛指揮使가 되었고, 정덕 12년(1517)에 廣西都指揮僉事로 승진하였다. 3년 후에 荔浦 등지의 농민반란을 진압하고, 都指揮同知로 승진하였다. 嘉靖 5년(1526) 계략을 써서 田州府 土官 岑猛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이듬해(1527) 思恩參將이 되었다. 후에 柳慶參將이 되어 柳州를 駐守하면서 泉州, 武宣 등지의 瑤族 반란을 진압하였다. 嘉靖 16년(1537)에는 思恩府 土官 岑金의 반란을 평정하고, 또 總督 張經을 따라 大藤峽 등의 반란 근거지를 공략하였다. 후에는 四川左參將, 都督僉事, 都督同知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앞뒤로 貴州, 兩廣, 江淮 등지를 鎭守하고, 海南 五指山 黎族과 貴州 銅仁 苗族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嘉靖 32년(1553)에는 군대를 거느리고 倭寇의 침공을 막으려 했으나, 아무런 전공을 세우지 못하여 탄핵을 받고 귀향하였다. 이듬해(1554)에 病死하였다.
- 각주 003)
- 각주 004)
색인어
- 이름
- 잠장, 잠맹(岑猛), 요막(姚鏌), 잠장, 잠맹, 요막, 잠장, 잠맹, 심희의(沈希儀), 심희의, 잠장, 잠장, 잠맹, 조신(趙臣), 잠장, 심희의, 조신, 잠장, 잠맹, 잠장, 잠맹, 잠방언(岑邦彦), 잠장, 잠방언, 잠방언, 잠장, 심희의, 심희의, 심희의, 잠방언, 잠맹, 잠장, 잠맹, 잠맹, 잠장, 잠장, 잠장, 잠맹, 잠맹, 잠장, 잠맹, 잠맹
- 지명
- 전주(田州)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