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의 용주 장악
가정 원년(1522)에 조상이 죽자, 그 주(州)의 사람들이 조수를 후사로 세웠다. 조해가 그를 시해하자 주의 사람들이 그의 족제(族弟) 조난(趙暖)을 후사로 세웠다. 당시 왕수인(王守仁)
주 001
각주 001)

이 양광(兩廣)을 제독(提督)하고 있었는데, 막객(幕客)주 002
잠백고(岑伯高)가 전횡하여, 조해가 잠백고에게 뇌물을 주면서 조난은 조씨의 후예가 아니므로 마땅히 후사가 될 자는 조해라고 말하였다. [이에] 상사주(上思州)주 003 지주(知州) 황웅조(黃熊兆)를 보내어 이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황웅조는 잠백고와 한 패거리가 되어 조해가 마땅히 후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주인(州印)을 조해에게 주었다. 조해가 드디어 조난을 죽이니 용주가 크게 혼란에 빠졌다. 주의 두목 황안(黃安) 등이 몰래 전주(田州)로 가서 조보를 사가지고 돌아왔다. 조보는 당시 양포(楊布)의 집에서 노복이 된 지 13년이 되었는데, 황안 등이 가서 100냥의 백은(白銀)으로 그를 샀던 것이다. 이 일을 독부(督府)에게 말하자, 도어사 임부(林富)
주 004王守仁(1472∼1529): 浙江省 紹興府 餘姚 출신으로, 字는 伯安이고, 號는 陽明이다. 明代에 저명한 思想家, 政治家, 文學家 및 軍事家였다. 28세에 進士로 급제하였으며, 관직은 南京兵部尙書·南京都察院左都御史에 이르렀다. 宸濠의 반란을 평정한 공로로 新建伯에 책봉되었고, 隆慶 연간(1567∼1572)에는 侯爵을 받았다. 그는 宋明心學의 集大成者일 뿐 아니라 一生의 事功도 탁월한 성취를 이루어내었다. 특히 사상 방면에서 朱子學의 권위에 의문을 던지고, 良知心學을 수립하여 강력하게 주자학을 비판했다. 또 주자학의 知行分割論에 대해서도 현재에 실존하는 나(=마음)의 양태를 知와 行으로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한 ‘知行合一說’을 제창했다. 정치 방면에서 그의 역정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刑部主事, 兵部主事를 역임하다가 당시 전횡을 일삼던 환관 劉瑾에게 미움을 받아 貴州의 龍場驛丞으로 좌천되었다. 얼마 후에 劉瑾이 사망하자 관직에 복직되어 승진을 거듭한 끝에 正德 11년(1516)에는 右僉都御史로 南贛巡撫가 되어 寧王 宸濠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隆慶 연간에 兵部尙書가 되었고, 후에는 兩廣總督이 되었다. 군사 방면으로도 그의 재능은 탁월해서 ‘大明軍神’으로까지 불렸다. 특히 宸濠의 반란을 진압할 때 鄱陽湖의 決戰에서 ‘赤壁之戰’을 원용하여 叛軍을 격파하고, 宸濠의 父子 등을 생포하였다. 文學 방면으로도 뛰어나 그의 작품 다수가 『古文觀止』에 수록되어 있다. 書法 방면에도 一家를 이루었는데, 특히 行草에 뛰어났다.
각주 004)

가 조해의 세력이 이미 장대(壯大)하므로 일을 조급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니, 이에 조해로 하여금 직무를 대리하고 조보가 자란 후를 기다려 양위케 하였다. 조해가 다시 때때로 조보를 살해할 것을 꾀하였다. 임부가 조해에게 경계하여 말하여 그로 하여금 관인을 조보에게 반환토록 하니, 조보가 [조해에게] 5,000냥의 백은으로 사례하고 31개 촌의 비옥한 땅을 더하여 주었다. 조해는 조보가 나약하여 쉽게 응수할 수 있을 것을 헤아리고서는, 두터운 이익을 맞이[하여 차지]한 뒤 서서히 도모하는 것이 낫겠다하여 드디어 명을 따랐던 것이다. 조해가 다시 위장의 아들 위응(韋應)에게 부양토록 해서 위응으로 하여금 조보의 처소를 왕래토록 하였다. 조보의 처 황씨(黃氏)는 사명부(思明府)주 005 토관 황조(黃朝)의 딸인데, 조보에게 [배반의] 딴 마음을 품어 위응과 사통하였다. 위응은 이에 주의 두목과 두터이 결탁하였고, 다시 자주 사람을 보내 향무주(向武州)와 우호관계를 맺고 병사를 청하여 방위하였다. 조보는 나날이 사나워져 아름다운 용모의 남자 왕량(王良)에게 궁형(宮刑)을 가하여 문지기로 삼았다. 조해는 왕량이 조보에게 원한을 품고 있음을 알고서 [그를] 격분시켜 내응(內應)토록 하니, 왕량이 이를 허락하였다. 조해가 1,000명을 데리고 밤에 조보의 침실 문 앞에 이르러 왕량을 부르니, 왕량은 문을 열어 조해의 병사를 맞아들여 조보를 침소에서 붙잡아 그를 죽이고는 다른 도적이 행한 것으로 보고하였다. 위응은 병사 1,000명을 거느리고 용주를 점거하였으며, 아울러 황조와 결탁하여 자구책을 강구하였다.林富: 字는 省吾로서 成化 11년(1475) 福建 莆田의 名門望族 ‘九牧林’집안에서 태어났다. 九牧林이란 唐代 天寶 연간에 그의 조상 가운데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9명의 아들이 전부 학문이 뛰어나고 관직은 刺史에 이르렀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었다. 正德 연간 劉瑾이 전횡을 일삼았지만, 林富는 두려움없이 上疏하고 進言하여 劉瑾의 미움을 받아 罷職되었다. 유근 사후 복직되었다. 寧波知府로서 많은 政績을 쌓았다. 嘉靖 원년(1522)에는 廣西參政이 되었고, 이듬해(1523)에는 廣東右布政使로 승진하였다. 海防 건설에도 공을 세워 후에 倭寇 방어에 큰 공헌을 하였다. 얼마 후에 廣西로 돌아와 소수민족의 반란을 진압하고 改土歸流를 추진하였다. 廣西를 떠나 四川에서 左布政使가 되었고, 연이어 都察院右副都御史로 승진하였다. 얼마 후에는 兵部右侍郞 겸 右僉都御史로 總督의 職을 代理하여 廣州와 會寧 등지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莆田으로 歸鄕하여 山東에 조그마한 정자를 지어 여생을 마쳤는데, 향년 66세였다.
-
각주 001)
王守仁(1472∼1529): 浙江省 紹興府 餘姚 출신으로, 字는 伯安이고, 號는 陽明이다. 明代에 저명한 思想家, 政治家, 文學家 및 軍事家였다. 28세에 進士로 급제하였으며, 관직은 南京兵部尙書·南京都察院左都御史에 이르렀다. 宸濠의 반란을 평정한 공로로 新建伯에 책봉되었고, 隆慶 연간(1567∼1572)에는 侯爵을 받았다. 그는 宋明心學의 集大成者일 뿐 아니라 一生의 事功도 탁월한 성취를 이루어내었다. 특히 사상 방면에서 朱子學의 권위에 의문을 던지고, 良知心學을 수립하여 강력하게 주자학을 비판했다. 또 주자학의 知行分割論에 대해서도 현재에 실존하는 나(=마음)의 양태를 知와 行으로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한 ‘知行合一說’을 제창했다. 정치 방면에서 그의 역정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刑部主事, 兵部主事를 역임하다가 당시 전횡을 일삼던 환관 劉瑾에게 미움을 받아 貴州의 龍場驛丞으로 좌천되었다. 얼마 후에 劉瑾이 사망하자 관직에 복직되어 승진을 거듭한 끝에 正德 11년(1516)에는 右僉都御史로 南贛巡撫가 되어 寧王 宸濠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隆慶 연간에 兵部尙書가 되었고, 후에는 兩廣總督이 되었다. 군사 방면으로도 그의 재능은 탁월해서 ‘大明軍神’으로까지 불렸다. 특히 宸濠의 반란을 진압할 때 鄱陽湖의 決戰에서 ‘赤壁之戰’을 원용하여 叛軍을 격파하고, 宸濠의 父子 등을 생포하였다. 文學 방면으로도 뛰어나 그의 작품 다수가 『古文觀止』에 수록되어 있다. 書法 방면에도 一家를 이루었는데, 특히 行草에 뛰어났다.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林富: 字는 省吾로서 成化 11년(1475) 福建 莆田의 名門望族 ‘九牧林’집안에서 태어났다. 九牧林이란 唐代 天寶 연간에 그의 조상 가운데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9명의 아들이 전부 학문이 뛰어나고 관직은 刺史에 이르렀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었다. 正德 연간 劉瑾이 전횡을 일삼았지만, 林富는 두려움없이 上疏하고 進言하여 劉瑾의 미움을 받아 罷職되었다. 유근 사후 복직되었다. 寧波知府로서 많은 政績을 쌓았다. 嘉靖 원년(1522)에는 廣西參政이 되었고, 이듬해(1523)에는 廣東右布政使로 승진하였다. 海防 건설에도 공을 세워 후에 倭寇 방어에 큰 공헌을 하였다. 얼마 후에 廣西로 돌아와 소수민족의 반란을 진압하고 改土歸流를 추진하였다. 廣西를 떠나 四川에서 左布政使가 되었고, 연이어 都察院右副都御史로 승진하였다. 얼마 후에는 兵部右侍郞 겸 右僉都御史로 總督의 職을 代理하여 廣州와 會寧 등지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莆田으로 歸鄕하여 山東에 조그마한 정자를 지어 여생을 마쳤는데, 향년 66세였다.
- 각주 005)
색인어
- 이름
- 조상, 조수, 조해, 조난(趙暖), 왕수인(王守仁), 잠백고(岑伯高), 조해, 잠백고, 조난, 조해, 황웅조(黃熊兆), 황웅조, 잠백고, 조해, 조해, 조해, 조난, 황안(黃安), 조보, 조보, 양포(楊布), 황안, 임부(林富), 조해, 조해, 조보, 조해, 조보, 임부, 조해, 조보, 조보, 조해, 조해, 조보, 조해, 위장, 위응(韋應), 위응, 조보, 조보, 황조(黃朝), 조보, 위응, 위응, 조보, 왕량(王良), 조해, 왕량, 조보, 왕량, 조해, 조보, 왕량, 왕량, 조해, 조보, 위응, 황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