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접을 거느리고 반란을 제압하려 함
[홍치] 12년(1499)에 전주(田州)의 토목(土目)주 001
황기(黃驥)가 반란을 일으킨 뒤 잠접에게 성원토록 하여 남녀를 살육하고 창고와 민가를 약탈하고 방화했으며, 또 부학(府學) 및 횡산역(橫山驛)의 인장(印章)을 빼앗고는 드디어 흥인(興仁)을 점거하였다.주 002 [홍치] 14년(1501)에 귀주(貴州)의 여적(女賊) 미노(米魯)
주 003
각주 003)

가 반란을 일으키자 제독(提督)주 004米魯: 貴州 普安州 苗族의 土司 判官인 隆暢의 妻로, 절세의 미녀로 알려져 있다. 沾益州의 土知州 安民의 딸인 그녀는 결국 隆暢과의 불화로 친정으로 돌아와 현지의 또 다른 土司인 阿保와 私通하였다. 이때 隆暢은 이미 연로하여 米魯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 아닌 그의 아들 隆禮에게 土司 직위를 넘겨주고, 隆禮를 米魯에게 보내어 돌아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도리어 隆禮는 米魯와 通姦하고 阿保와 결탁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隆暢은 크게 노하여 阿保를 공격하여 근거지를 불태우는 한편 숨어있던 아들 隆禮를 죽였다. 이에 米魯는 阿保와 연합하여 반격을 가해 隆暢을 죽이고서 더 나아가 明 조정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각주 004)

왕식(王軾)
주 005提督: 武職의 官名으로서 全稱은 提督軍務總兵官이다. 한 省의 陸路와 水路의 官兵을 통할하였다. 明代의 提督은 대부분 勳戚大臣 및 太監으로 충당했다. 嘉靖 연간에 京營에는 提督總兵官이 설치되었는데, 얼마 후에 總督京營戎政으로 바꾸었다. 隆慶 초년에 總督을 提督으로 삼았고, 후에는 6명의 提督으로 늘렸는데, 얼마 후에 總督戎政으로 개칭하였다. 각 省의 巡撫와 鎭守總兵官은 대개 提督軍務나 提督 등의 官銜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明代의 提督은 많이 보이기는 해도 정식 官名은 아니다. 한편 淸代에는 대체로 한 省마다 提督軍務總兵官 1명을 두어 이를 提督이라 불렀는데, 한 省의 綠營兵의 최고 장관으로서 總督 혹은 巡撫의 지휘를 받았다.
각주 005)

이 잠접이 거느리는 토병(土兵) 2만 명을 이동시켜 채포하(砦布河)에 군영을 설치할 것을 청하니, [홍치제는] 이로 인하여 잠접에게 칙서를 내려 스스로 두 개월의 군량을 갖추어 기한 내에 현지에 이르도록 하였다.주 006
王軾(1439∼1506): 字는 用敬으로 湖北 公安 출신이다. 天順 8년(1464)에 進士로 급제하여 大理寺評事로 제수되었다. 四川按察副使, 按察使, 南京右僉都御史, 右副都御史, 貴州巡撫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한편 四川副使 재직 시에 흉년이 들자 王軾은 官銀 10만 냥을 풀었다. 후에 京師로 돌아와 大理寺卿이 되었다. 弘治 13년(1500)에 南京 戶部尙書로 옮겼는데, 얼마 후 左副都御史의 직함을 받고 군대를 동원하여 貴州 普安의 여성 土司 米魯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평정 기간 5개월 동안 1,000여 곳의 寨를 공략하였다. 후에 兵部尙書가 되어 機務에 참여하였다. 正德 원년(1506) 4월에 太子少保가 추가되면서 致仕하였다. 그해 11월에 사망하니 향년 68세였다. 太保로 추증되었고, 襄敏이란 諡號를 받았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米魯: 貴州 普安州 苗族의 土司 判官인 隆暢의 妻로, 절세의 미녀로 알려져 있다. 沾益州의 土知州 安民의 딸인 그녀는 결국 隆暢과의 불화로 친정으로 돌아와 현지의 또 다른 土司인 阿保와 私通하였다. 이때 隆暢은 이미 연로하여 米魯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 아닌 그의 아들 隆禮에게 土司 직위를 넘겨주고, 隆禮를 米魯에게 보내어 돌아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도리어 隆禮는 米魯와 通姦하고 阿保와 결탁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隆暢은 크게 노하여 阿保를 공격하여 근거지를 불태우는 한편 숨어있던 아들 隆禮를 죽였다. 이에 米魯는 阿保와 연합하여 반격을 가해 隆暢을 죽이고서 더 나아가 明 조정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
각주 004)
提督: 武職의 官名으로서 全稱은 提督軍務總兵官이다. 한 省의 陸路와 水路의 官兵을 통할하였다. 明代의 提督은 대부분 勳戚大臣 및 太監으로 충당했다. 嘉靖 연간에 京營에는 提督總兵官이 설치되었는데, 얼마 후에 總督京營戎政으로 바꾸었다. 隆慶 초년에 總督을 提督으로 삼았고, 후에는 6명의 提督으로 늘렸는데, 얼마 후에 總督戎政으로 개칭하였다. 각 省의 巡撫와 鎭守總兵官은 대개 提督軍務나 提督 등의 官銜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明代의 提督은 많이 보이기는 해도 정식 官名은 아니다. 한편 淸代에는 대체로 한 省마다 提督軍務總兵官 1명을 두어 이를 提督이라 불렀는데, 한 省의 綠營兵의 최고 장관으로서 總督 혹은 巡撫의 지휘를 받았다.
-
각주 005)
王軾(1439∼1506): 字는 用敬으로 湖北 公安 출신이다. 天順 8년(1464)에 進士로 급제하여 大理寺評事로 제수되었다. 四川按察副使, 按察使, 南京右僉都御史, 右副都御史, 貴州巡撫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한편 四川副使 재직 시에 흉년이 들자 王軾은 官銀 10만 냥을 풀었다. 후에 京師로 돌아와 大理寺卿이 되었다. 弘治 13년(1500)에 南京 戶部尙書로 옮겼는데, 얼마 후 左副都御史의 직함을 받고 군대를 동원하여 貴州 普安의 여성 土司 米魯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평정 기간 5개월 동안 1,000여 곳의 寨를 공략하였다. 후에 兵部尙書가 되어 機務에 참여하였다. 正德 원년(1506) 4월에 太子少保가 추가되면서 致仕하였다. 그해 11월에 사망하니 향년 68세였다. 太保로 추증되었고, 襄敏이란 諡號를 받았다.
- 각주 006)
색인어
- 이름
- 황기(黃驥), 잠접, 미노(米魯), 왕식(王軾), 잠접, 잠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