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표와 노씨의 是非
선덕(宣德)주 001 원년(1426)에 여성 토관 노씨(盧氏)가 족인(族人) 잠대(岑臺)를 보내 마필과 은기(銀器) 등의 방물을 바치니,주 002 차등을 두어 하사품을 보냈다.주 003 [선덕] 8년(1433)에 치사(致仕)주 004한 여성 토관 노씨가 상주(上奏)하여, 관직을 계승한 토관 잠표(岑豹)가 토병(土兵)주 005 1,500여 명을 거느려 자기[=노씨]를 살해할 것을 도모했고, 또 이미 죽은 토관 잠선(岑瑄)의 소상(塑像)주 006을 파괴한 뒤 내다버려 행하는 바가 효성스럽지 않으니, 그로 하여금 관직을 계승토록 하기 어렵다고 아뢰었다. 잠표의 숙부인 이주(利州) 지주(知州) 잠안(岑顔) 또한 상주하여, 잠표가 거병하여 노씨를 살해할 것을 도모했고, 사성주의 백성들이 화를 입었다고 아뢰었다. 도독(都督)주 007
산운(山雲)
주 008
각주 008)

이 아뢰기를, “잠표는 실제로 이미 죽은 토관 잠선의 조카로서 사람들이 믿고 따르고 있으니 응당 관직을 계승할 만합니다. 노씨는 잠선의 아내이고 잠표의 백모(伯母)로서 당초 가탁하여 관직을 계승했지만 지금 치사하였으니, 마땅히 사정을 참작해서 전토(田土)를 주어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아울러 청컨대 칙서를 내려 잠표로 하여금 멋대로 침탈하여 소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병부(兵部)에서 산운의 진언에 따를 것을 청하였다. 선덕제는 행인(行人)주 009山雲(?∼1438): 江蘇 徐州 출신이다. 그의 부친은 燕王 朱棣가 거병하였을 때 공을 세워 都督僉事가 되었다. 山雲은 그 부친의 공을 세습하여 金吾左衛指揮使를 除授받았다. 여러 차례 永樂帝의 北征을 수행하였고, 후에는 中軍都督府都督僉事가 되었다. 宣德 元年(1426)에 北京行都督府로 옮겨서 都御史王彰과 함께 山海關에서 居庸關까지 巡視하는 업무를 맡았다. 宣德 3년(1428)에 征蠻將軍의 印章을 패용하고서 南安·廣源 등지를 공략하였고, 이듬해(1429) 다시 토벌하여 攻破하였다. 당시 廣西의 여러 지역에서는 韓觀이 사망한 후, 반란이 빈발하였는데, 山雲은 廣西의 병사가 적으므로 貴州의 군대를 활용하여 潯州·柳州·平樂·桂林·宜山·思恩 등지를 평정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때 공을 세워 都督同知로 승진하였고 이후 右都督까지 올랐으나, 正統 3년(1438)에 사망하였다(『明史』卷166 참조).
각주 009)

장총(章聰)·후진(侯璡)
주 010行人: 朝貢 관련 외교 업무를 담당하던 관직명으로, 行人司行人의 약칭이다. 周代에는 秋官에 속해 大行人과 小行人 2官이 있었고, 멀리서 天子를 알현하고자 온 賓客의 접대를 맡았다. 漢代에는 大鴻臚의 屬官으로 行人令이 있었지만 府內 郎官들에 대한 관리를 담당했다. 『明史』「職官志」에 따르면, 明代 行人司에 장관인 司正(正七品)과 부관인 左右司副(從七品)를 보좌하는 行人 37명(正八品)을 두어 捧節과 出使 등의 임무를 맡겼다. 하지만 洪武 13년(1380)에 처음으로 行人司가 설치될 때 行人은 正九品이었으나, 洪武 27년(1394)에 品秩을 승격시키고 孝廉科 출신의 인재를 등용하였다. 建文帝는 行人司를 없애고 鴻臚寺에 예속시켰으나 永樂帝가 다시 복귀시켰다. 행인은 행인사에 소속되었는데 행인사는 조칙 반포, 종실 책봉, 번왕 위무, 인재 초빙, 賞賜, 위문, 재난구제, 군대, 제사 등의 일에 관여하였다(全淳東, 2007: 114∼115).
각주 010)

에게 명하여 칙서(勅書)를 가지고 가서 산운에게 효유(曉諭)하여 삼사(三司)주 011 및 순안(巡按)주 012侯璡(1398∼1450): 字는 廷玉으로 澤州 출신이다. 宣德 2년(1427)에 進士로 급제하여 行人司의 行人이 되었다. 당시 雲南의 土官 烏撒과 烏蒙이 서로 다투자 宣德帝는 侯璡과 同官 章聰에게 명하여 화해시키도록 하였다. 후에 임무를 완수한 뒤 귀환하였다. 副侍郞 章敞을 수행하여 交趾로 出使하고 돌아와 兵部主事로 승진되었다. 正統 연간에는 尙書 柴車 등을 수행하여 鐵門關으로 나아가 阿臺를 방어하였다. 후에 郎中으로 승진하였다. 그 후 王驥를 따라 麓川으로 出征하여 평정에 공을 세웠다. 禮部右侍郞으로 승진하여 雲南軍務를 參贊하였다. 다시 王驥를 따라 出征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禮部左侍郞으로 승진하였다. 宣德 9년(1434)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상복을 벗은 후에 兵部侍郞으로 기용되었다. 宣德 11년(1436)에 楊寧를 대체하여 雲南을 鎭守하였다. 후에 다시 반란을 진압하였다. 景泰 원년(1450)에 貴州의 苗族이 반란을 일으키자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진압하였다. 후에 兵部尙書로 승진했고, 다시 苗族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그해 8월에 과로로 普定에서 병사하였다.
각주 012)

과 함께 잠표와 노씨의 시비(是非)를 철저하게 조사해서 공정하게 판결하도록 하였다.주 013
巡按: 監察御史의 일종인 巡按御史를 가리킨다. 원래 監察御史는 隋代에 창설되었는데, 법규를 위반한 관리에 대하여 탄핵을 가할 뿐 아니라 황제가 부여한 권력을 통하여 행정관원을 직접 심판할 수 있었으며, 아울러 府州縣道 등의 衙門에 대하여 실질적인 감독을 행할 수 있었다. 唐代에 御史臺는 三院으로 나뉘는데, 그 가운데 監察御史는 察院에 속하였다. 明代에는 都察院 隷屬의 13道 監察御史가 두어졌는데, 모두 110명으로 구성되며 官品은 正七品이었다. 그 가운데 浙江, 江西, 河南, 山東은 각각 10명이었고, 福建, 廣東, 廣西, 四川, 貴州는 각각 7명이었으며, 陝西, 湖廣, 山西는 각각 8명이었고, 雲南은 11명이었다. 永樂 연간(1403∼1424)에 監察御史를 각지에 보내 巡視토록 했는데, 이들을 巡按御史, 약칭으로 巡按이라 불렀다. 雅稱은 ‘代天巡狩’였다. 巡按御史는 北直隷 2명, 南直隷 3명, 宣大 1명, 遼東 1명, 甘肅 1명, 13省 각각 1명이었다. 巡按御史는 각 省의 大臣과 府州縣 장관의 각 방면에 대하여 감찰하고, 특히 탄핵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大事는 황제에게 上奏하고 小事는 현장에서 裁決하였다. 이처럼 순안어사의 관품은 낮았지만 그 직권과 책임은 매우 중대하였다. 특히 중앙집권을 유지하고 吏治의 감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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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8)
山雲(?∼1438): 江蘇 徐州 출신이다. 그의 부친은 燕王 朱棣가 거병하였을 때 공을 세워 都督僉事가 되었다. 山雲은 그 부친의 공을 세습하여 金吾左衛指揮使를 除授받았다. 여러 차례 永樂帝의 北征을 수행하였고, 후에는 中軍都督府都督僉事가 되었다. 宣德 元年(1426)에 北京行都督府로 옮겨서 都御史王彰과 함께 山海關에서 居庸關까지 巡視하는 업무를 맡았다. 宣德 3년(1428)에 征蠻將軍의 印章을 패용하고서 南安·廣源 등지를 공략하였고, 이듬해(1429) 다시 토벌하여 攻破하였다. 당시 廣西의 여러 지역에서는 韓觀이 사망한 후, 반란이 빈발하였는데, 山雲은 廣西의 병사가 적으므로 貴州의 군대를 활용하여 潯州·柳州·平樂·桂林·宜山·思恩 등지를 평정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때 공을 세워 都督同知로 승진하였고 이후 右都督까지 올랐으나, 正統 3년(1438)에 사망하였다(『明史』卷16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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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9)
行人: 朝貢 관련 외교 업무를 담당하던 관직명으로, 行人司行人의 약칭이다. 周代에는 秋官에 속해 大行人과 小行人 2官이 있었고, 멀리서 天子를 알현하고자 온 賓客의 접대를 맡았다. 漢代에는 大鴻臚의 屬官으로 行人令이 있었지만 府內 郎官들에 대한 관리를 담당했다. 『明史』「職官志」에 따르면, 明代 行人司에 장관인 司正(正七品)과 부관인 左右司副(從七品)를 보좌하는 行人 37명(正八品)을 두어 捧節과 出使 등의 임무를 맡겼다. 하지만 洪武 13년(1380)에 처음으로 行人司가 설치될 때 行人은 正九品이었으나, 洪武 27년(1394)에 品秩을 승격시키고 孝廉科 출신의 인재를 등용하였다. 建文帝는 行人司를 없애고 鴻臚寺에 예속시켰으나 永樂帝가 다시 복귀시켰다. 행인은 행인사에 소속되었는데 행인사는 조칙 반포, 종실 책봉, 번왕 위무, 인재 초빙, 賞賜, 위문, 재난구제, 군대, 제사 등의 일에 관여하였다(全淳東, 2007: 11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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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0)
侯璡(1398∼1450): 字는 廷玉으로 澤州 출신이다. 宣德 2년(1427)에 進士로 급제하여 行人司의 行人이 되었다. 당시 雲南의 土官 烏撒과 烏蒙이 서로 다투자 宣德帝는 侯璡과 同官 章聰에게 명하여 화해시키도록 하였다. 후에 임무를 완수한 뒤 귀환하였다. 副侍郞 章敞을 수행하여 交趾로 出使하고 돌아와 兵部主事로 승진되었다. 正統 연간에는 尙書 柴車 등을 수행하여 鐵門關으로 나아가 阿臺를 방어하였다. 후에 郎中으로 승진하였다. 그 후 王驥를 따라 麓川으로 出征하여 평정에 공을 세웠다. 禮部右侍郞으로 승진하여 雲南軍務를 參贊하였다. 다시 王驥를 따라 出征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禮部左侍郞으로 승진하였다. 宣德 9년(1434)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상복을 벗은 후에 兵部侍郞으로 기용되었다. 宣德 11년(1436)에 楊寧를 대체하여 雲南을 鎭守하였다. 후에 다시 반란을 진압하였다. 景泰 원년(1450)에 貴州의 苗族이 반란을 일으키자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진압하였다. 후에 兵部尙書로 승진했고, 다시 苗族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그해 8월에 과로로 普定에서 병사하였다.
- 각주 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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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2)
巡按: 監察御史의 일종인 巡按御史를 가리킨다. 원래 監察御史는 隋代에 창설되었는데, 법규를 위반한 관리에 대하여 탄핵을 가할 뿐 아니라 황제가 부여한 권력을 통하여 행정관원을 직접 심판할 수 있었으며, 아울러 府州縣道 등의 衙門에 대하여 실질적인 감독을 행할 수 있었다. 唐代에 御史臺는 三院으로 나뉘는데, 그 가운데 監察御史는 察院에 속하였다. 明代에는 都察院 隷屬의 13道 監察御史가 두어졌는데, 모두 110명으로 구성되며 官品은 正七品이었다. 그 가운데 浙江, 江西, 河南, 山東은 각각 10명이었고, 福建, 廣東, 廣西, 四川, 貴州는 각각 7명이었으며, 陝西, 湖廣, 山西는 각각 8명이었고, 雲南은 11명이었다. 永樂 연간(1403∼1424)에 監察御史를 각지에 보내 巡視토록 했는데, 이들을 巡按御史, 약칭으로 巡按이라 불렀다. 雅稱은 ‘代天巡狩’였다. 巡按御史는 北直隷 2명, 南直隷 3명, 宣大 1명, 遼東 1명, 甘肅 1명, 13省 각각 1명이었다. 巡按御史는 각 省의 大臣과 府州縣 장관의 각 방면에 대하여 감찰하고, 특히 탄핵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大事는 황제에게 上奏하고 小事는 현장에서 裁決하였다. 이처럼 순안어사의 관품은 낮았지만 그 직권과 책임은 매우 중대하였다. 특히 중앙집권을 유지하고 吏治의 감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 각주 013)
색인어
- 이름
- 잠대(岑臺), 잠표(岑豹), 잠선(岑瑄), 잠표, 잠안(岑顔), 잠표, 산운(山雲), 잠표, 잠선, 잠선, 잠표, 잠표, 산운, 장총(章聰), 후진(侯璡), 산운, 잠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