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제가 계승한 뒤로 사신을 보내 헌물을 공납하다 철륵이 두려워 개변하지 못하고 그에게 방물을 바치다
양제가 제위를 계승한 뒤 여러 번국들을 유치하자, [고창도] 대업 4년(608)에 사신을 보내 헌물을 공납하였고 황제는 그 사신을 매우 후하게 대접하였다. 그 다음해 백아가 내조하였고 그런 까닭으로 [황제를] 따라서 고구려를 공격하였는데, [원정에서] 돌아온 뒤에는 종실의 여자 화용공주(華容公主)를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8년(612) 겨울에 번국으로 돌아가 그 나라 안에 명령을 내리기를 “대저 나라를 통치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일은 보존(保存)을 가장 중히 여기고, 나라를 평안케 하고 정치를 도모하는 일은 [백성의] 보전[全濟]을 크게 생각하는 법이다. 과거에 [우리] 나라가 변방의 먼 곳에 위치해 있어 맹렬한 오랑캐들과 경계를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설령 그들과 [보조를] 같이 했다고 해서 허물할 바는 아니었으며, [그래서] 변발을 하고 왼쪽으로 옷섶을 여몄다[被髮左衽]. 이제 위대한 수나라[大隋]가 통치를 하게 되어 천하가 모두 평정되고 하나가 되었으며 천지 만물이 모두 그곳으로 향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되었다. 나는 이미 [수나라의] 온화한 풍속에 영향을 받았는데 [백성들도] 모두 크게 변화되기를 희망하니, 서민 이상은 모두 변발을 풀고 여밈을 고쳐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이를 듣고 그것을 매우 좋게 여기며 다음과 같은 조칙을 내렸다. “덕을 현창하고 선을 가상하게 여기는 것이야말로 성철들이 중시했던 바이고, 성실함을 드러내고 선량함을 기르는 것은 경전[典謨]주 001들이 보여준 규범이다. 광록대부(光祿大夫) 변국공(弁國公) 고창왕(高昌王) 백아는 식견이 넓고 그릇이 온유하며, 일편단심의 마음은 일찍부터 드러났으며, 한결같고 고상한 절개는 널리까지 알려져 있다. 본디 중화의 하나에서 나왔지만 서쪽 지방에서 몇 세대 지냈으며, 과거 여러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오랑캐[獯戎]에 물들었고, 자주 [중국식] 의관을 폐기하고 호복(胡服)을 재단하여 입었다. 우리 위대한 수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 구주[九圍]를 변화시키고 사표(四表)에 덕을 미치게 하였다. 백아는 험난함을 잊고 사막을 건너서, 공물을 받들고 궁정에 왔으니, 위용 있는 제도를 보고 위엄에 찬 전례를 사모하게 되었다. 이에 관모를 다시 쓰고 변발을 풀어 헤쳤으며, 여밈을 고치고 소매를 길게 늘어뜨림으로써, 오랑캐의 풍속을 바꾸어 중화의 것을 따르니, 그의 의로움은 전례없이 눈부시다. 의관을 내려주고 제작의 방법을 알려줌이 마땅하도다. 아울러 사람을 보내 그를 데리고 환송케 하라. 채색 비단을 입고 수레와 의복의 아름다움을 다시 보여서, 가죽과 털을 사용하는 풍습을 버리고 관대(冠帶)를 사용하는 나라로 돌아오도록 하라.” 그러나 백아는 과거에 철륵에 신복하였었고, 철륵도 항상 중신을 고창국에 보냈으며, 왕래하는 상호(商胡)들이 있으면 그들로부터 세금을 받아 철륵에게 보내주었다. 비록 이러한 명령으로 중화[의 방식]을 채용하는 것을 기뻐했지만, 끝내 철륵을 두려워하여 감히 개변하지는 못했다. 그해 이후로 사람을 보내어 그곳의 방물을 공납으로 바쳤다.
색인어
- 이름
- 양제, 백아, 화용공주(華容公主), 고창왕(高昌王) 백아, 백아, 백아
- 지명
- 고구려, 수나라[大隋], 철륵, 철륵, 고창국, 철륵, 중화, 철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