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唐) 태종(太宗)이 고구려를 토벌하자 흑수말갈이 고구려와 합세함
무덕 5년(622)에 거장 아고랑이 처음 왔다.주 001 [당] 태종(재위: 626~649)주 002
번역주 002)

정관 2년(628)에 비로소 신하로 귀부하여 [공물을] 바치는 것이 계속되니, 그 땅을 연주로 삼았다.주 003 唐 太宗 : 본명은 李世民이다. 唐 高祖 李淵의 둘째아들이었다. 隋末 아버지를 따라 太原에서 기병해 長安을 점령하였다. 武德 元年(618) 尙書令에 임명되고 秦王에 봉해졌다. 각지에 할거하던 薛仁杲·劉武周·王世充·竇建德·劉黑闥등을 격파하였다. 武德 9년(626) 玄武門의 변을 일으켜 즉위하였다. 房玄齡·杜如晦·魏徵 등을 宰相으로 임명했고, 隋가 망한 것을 거울로 삼아 간언을 받아들여 인재를 등용했으며, 吏治에 힘썼다. 이처럼 宣政을 베풀어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전했는데, 이를 소위 ‘貞觀之治’라 한다. 貞觀 4년(630) 東突厥을 평정하자 西北 遊牧民들이 ‘天可汗’이라 칭하였다. 이후 吐谷渾과 高昌을 평정하고 吐蕃과 평화를 유지하였다. 중기 이후 전쟁이 많아 점차로 賦役이 늘어났으며 스스로 교만해 直臣을 멀리하였다. 붕어한 이후에 昭陵(지금의 陝西省 禮泉縣)에 매장되었으며, 諡號는 文皇帝였다.
번역주 003)

황제가 고구려를 토벌하자 그 북부가 반란하여 고구려와 합세하였다. 고혜진주 004 등이 무리를 이끌고 안시[성]을 구원했을 때 싸움마다 말갈이 늘 앞에 섰다. 황제가 안시[성]을 격파하고 [고]혜진을 붙잡고 말갈병 3,000여 명을 모아 모두 묻어 죽였다. 『舊唐書』 靺鞨傳에서는 ‘武德初 遣間使朝貢 以其部落置燕州’라 하고 있어, 그 땅을 燕州로 삼은 것이 武德(618~626) 초의 일로 나온다. 燕州는 唐 초에 幽州城(현 北京市 서남쪽)에 설치한 주이며, 開元 25년(737) 幽州 북쪽 桃穀山(현 昌平區 동쪽 경계 桃峪口 부근)으로 이치하였다. 天寶 원년(742)에는 歸德郡으로 삼았고, 乾元 元年(758) 燕州로 다시 불렀으며, 建中 2년 (781)에 주를 폐하고 幽都縣으로 들였다. 아고랑부로 설치한 燕州가 당 유주성에 설치한 연주인지 별도의 연주인지는 확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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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02)
唐 太宗 : 본명은 李世民이다. 唐 高祖 李淵의 둘째아들이었다. 隋末 아버지를 따라 太原에서 기병해 長安을 점령하였다. 武德 元年(618) 尙書令에 임명되고 秦王에 봉해졌다. 각지에 할거하던 薛仁杲·劉武周·王世充·竇建德·劉黑闥등을 격파하였다. 武德 9년(626) 玄武門의 변을 일으켜 즉위하였다. 房玄齡·杜如晦·魏徵 등을 宰相으로 임명했고, 隋가 망한 것을 거울로 삼아 간언을 받아들여 인재를 등용했으며, 吏治에 힘썼다. 이처럼 宣政을 베풀어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전했는데, 이를 소위 ‘貞觀之治’라 한다. 貞觀 4년(630) 東突厥을 평정하자 西北 遊牧民들이 ‘天可汗’이라 칭하였다. 이후 吐谷渾과 高昌을 평정하고 吐蕃과 평화를 유지하였다. 중기 이후 전쟁이 많아 점차로 賦役이 늘어났으며 스스로 교만해 直臣을 멀리하였다. 붕어한 이후에 昭陵(지금의 陝西省 禮泉縣)에 매장되었으며, 諡號는 文皇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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