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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고야조(高野造; 다카노미야츠코)

고야조(高野造; 다카노미야츠코)
 백제국(百濟國) 사람 좌평(佐平) 여자신(余自信)의 후손이다.
 
【주석】
1. 고야조(高野造)
고야(高野)의 씨명은 대화국(大和國) 첨하군(添下郡) 고야(高野)의 지명에서 유래한다. 현재 나량현(奈良縣) 산릉정(山陵町) 부근이다. 고야조씨 일족의 인명은 기타의 사료에는 보이지 않는다.
2. 여자신(余自信)
여자신에 대해서는 『일본서기』 제명기(齊明紀) 6년(660) 9월조에 백제의 사신이 일본에 와서 백제의 멸망을 알리는 내용 주에 “서부 은솔 귀실복신(鬼室福信)은 격분하여 임사기산에 웅거하였다. 달솔 여자진(餘自進)은 중부 구마노리성에 웅거하였다. 국인이 존경하여 ‘좌평복신(佐平福信), 좌평자진(佐平自進)’이라고 말한다”라고 하여 좌평자진의 이름이 보이고, 동 천지(天智) 2년(663) 9월조에는 “일본의 수군 및 좌평 여자신(余自信), 달솔 목소귀자(木素貴子), 곡나진수(谷那晉首), 억례복류(億禮福留)와 국민들이 테례성(禮城)에 이르렀다. 이튿날에 비로소 배가 출항하여 일본으로 향하였다”라고 하여 백강전투에 패배한 직후에 좌평 여자신 등이 일본으로 망명길에 오른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또 동 천지 8년(669) 시세조에는 “이해에…… 또 좌평 여자신, 좌평 귀실집사 등 남녀 700여 인을 근강국(近江國)의 포생군(蒲生郡)에 옮겨 살게 하였다”라고 하여 일본에 정주한 사실을 알리고, 동 천지 10년(671) 정월조에는 좌평 여자신(余自信)에게 대금하의 관위를 주었다는 관위 수여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여자신은 부흥 운동 시에 국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만큼 복신과 함께 부흥 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천지 10년의 관위 수여식에서 필두에 기록되었다. 이는 왕족이면서 좌평 관위의 최고위 신분으로 부흥 운동을 선도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금하의 관위는 받았지만, 관직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그 후의 모습도 확인되지 않는다. 왜 왕권 내에서 특별한 사적을 남기지 않았거나, 조기에 사망했을 가능성도 있다.
『속일본기』 에는 여자신의 일족으로 고위직에 있던 인물이 다수 확인된다. 양로(養老)원년(717) 정월조에 여진인(余眞人)과 음양가로서 뛰어난 여진승(余秦勝)이 나오고, 양로 7년(723) 정월조에 여인군(余仁軍)이 보인다. 이들은 천평승보(天平勝寶) 원년(750)윤5월에 모두 정6위상에서 종5위하로 승진되어 고위 관인이 되었다. 또 천평승보 3년(751) 정월에는 여의인(余義仁)이 외종5위하에서 종5위하로 승진하고, 천평보자(天平寶字) 2년(758) 6월에는 여동인(余東人)과 여익인(余益人)이 백제조신(百濟朝臣)을 사성받았다. 그리고 천평보자 5년(761) 3월에는 여민선녀(余民善女)가 백제공(百濟公)을 사성받았다. 백제공은 백제왕씨와 별도로 백제 왕족에게 준 특별 성이다. 『신찬성씨록』 우경 제번 「고야조(高野造)」 조에 “고야조는 백제국인 좌평 여자신(余自信)의 후손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 사료로부터 알 수 있듯이, 여자신 이후로 백제 왕족인 부여씨 일족의 계보가 이어졌고 후에 여자신의 후예들이 고야조씨로 개성한 것으로 보인다.
여씨(余氏) 일족에 대해서는 좌경 제번(하) 「백제조신(百濟朝臣)」 조(78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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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조(高野造; 다카노미야츠코) 자료번호 : ss.k_0002_0020_0040_03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