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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마전련(麻田連; 아사타노무라지)

마전련(麻田連; 아사타노무라지)
 백제국(百濟國) 사람 조선왕(朝鮮王) 회(淮)로부터 나왔다.
 
【주석】
1. 마전련(麻田連)
마전련의 옛 성은, 『속일본기』 신귀(神龜) 원년(724) 5월 신미조에 정8위상 답본양춘(答本陽春)이 마전련의 씨성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듯이 답본에서 마전련으로 개성하였다.
마전련의 옛 성인 답본씨 일족으로는 답본양춘 외에 답본춘초(答本春初)가 있다. 그는 『일본서기』 천지(天智) 4년(665) 8월조에 달솔 답본춘초를 보내어 장문성(長門城)을 쌓았다는 축성 기사가 보이고, 동 천지 10년 정월(是月)조에는 백제 망명인의 관위 수여식에서 대산하(大山下)의 관위를 받았으며 병법에 밝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장문성 축성 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백제 본국에서 달솔이라는 고위 군사 지휘관을 역임한 인물이었다고 생각된다. 또 『회풍조』 에는 「담해조(淡海朝) 대우황자(大友皇子) 2수」의 사서(詞書)에 대우황자가 황태자 시절에 학자들을 불러 시문을 교환할 당시 초청된 인물들 중에서 답본춘초의 인명이 보인다. 그는 문예에도 재능이 있는 인물이었다. 일족으로는 『속일본기』 천평승보(天平勝寶) 3년(751) 10월 정축조에 정6위상에서 외종5위하로 승진된 답본충절(答本忠節)이 있다.
위의 답본에서 마진련으로 개성한 마진련양춘(麻津連陽春)은 『만엽집』(4-569)에 4수의 노래를 남기고 있으며, 『회풍조』 에도 「마전련(麻田連) 1수」 로서 ‘화등강수영비예산선고지구선처유수지작(和藤江守詠裨叡山先考之舊禪處柳樹之作)’이라는 제하의 시를 남기고 있다. 그는 『만엽집』(제권5) 목차에 ‘대전(大典) 천전련양춘(淺田連陽春)’이라고 하여 그의 씨명이 천전련(淺田連)으로도 나온다. 평성궁적(平城宮跡) 출토 목간(奈良國立文化財硏究所, 1966, 『平城宮木簡』 1)에 보이는 천전(淺田, 闕名)은 마전련씨의 일족으로 생각한다.
마전련진정(麻田連眞淨)은 대학직강(大學直講, 『속일본기』 神護慶雲 원년 2월 정해조), 대학박사(동 延曆 7년 2월 병오조), 대학조교(동 연력 10년 12월 병오조) 등을 역임하였다. 마전련압부(麻田連狎賦)는 전약두(典藥頭, 동 연력 4년 11월 갑진조)가 되었다. 이 외에도 정6위상에서 외종5위하로 승진한 마전련금생(麻田連金生, 『속일본기』 천평보자 8년 정월 기사조) 등이 있다.
2. 조선왕회(朝鮮王淮)
『신찬성씨록』 의 조선왕 회(淮)는 저본에 따라 준(準)으로도 나온다. 『위략(魏略)』 의 일문(逸文) 및 『후한서』 예전(濊傳)과 한전(韓傳)에는 준(準), 『삼국지』 예전에는 회(淮)로 되어 있다. 왕의 칭호에 대해서는 『삼국지』 에 조선후(朝鮮侯), 『후한서』 에 조선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찬성씨록』 에서는 『후한서』, 『삼국지』 모두를 참고하여 조선왕 회(淮)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후한서』 「한전」 에는 “조선왕 준(準)이 위만에게 패하여 자신의 남은 무리 수천 명을 이끌고 바다로 도망하여, 마한을 공격하고 스스로 한왕이 되었다”라고 한다. 『신찬성씨록』 편찬 당시까지 조선왕 준 혹은 회를 시조로 하는 계보의식이 존재했는지가 문제이다. 만약 존재했다고 하면 조선왕 준의 후손들은 마한 지역이 백제에 복속된 후에 고조선의 후예임을 자각하고 이후 어느 시기에 왜국으로 이주하여 자신들의 씨족지에 기록했거나 기억으로 전승한 것으로 보인다.
『신찬성씨록』 연력(延曆) 18년(799) 12월에 『신찬성씨록』 편찬을 위해 각 씨족의 「본계장」 을 제출하라는 칙이 내려졌다. 마전련씨도 시조 전승을 기록한 「본계장」 을 작성하여 제출했을 것이다. 이때의 칙은 『신찬성씨록』 편찬에 즈음하여 씨성과 출자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각 씨족들에게 「본계장」 의 제출을 명하면서 의무 조항과 처벌 규정을 담고 있었다. 예를 들면 동조(同祖)이면서 별파이고 출자는 다른데 동성(同姓)인 까닭은 개성(改姓) 때문에 생긴 것이므로, 보첩, 호적, 계장으로는 판별하기 어려우니 구체적인 내용이 담긴 「본계장」 을 제출하라는 것이다. 또 시조명과 사성(賜姓)으로 분파되어 별도의 가문을 세운 조상명을 기록하라는 것인데, 본류를 파악하기 위한 조치라고 생각된다. 마전련씨의 경우는 ‘백제국 조선왕 회’라고 하여 원래의 시조명만 기재되어 있어 완본에도 동일하다고 하면 원 시조로부터의 직계임을 주장하고 있다.
한편 『속일본기』 신귀(神龜) 원년(724) 5월 신미조에는 답본양춘(答本陽春)에게 마전련(麻田連)의 성을 주었다고 한다. 그는 백제 패망 후에 망명한 답발춘초(答㶱春初)의 후손이다. 답발춘초는 『일본서기』 천지(天智) 4년 8월조에서 “달솔 답본춘초를 보내 장문국(長門國)에 성을 쌓게 하였다”라고 하였듯이 군사 전문가였다. 시간적으로 보면 2세대 지난 직계 후손에 해당한다. 답본춘초의 후손인 마전련씨가 그의 직계 선조를 시조로 표방하지 않고 고조선 시대의 회왕(준왕)을 시조로 삼았는지는 의문이다. 양자는 계통이 전혀 다르다. 이러한 사실은 답본춘초의 후예인 마전련씨가 자신의 선조를 답본춘초 이전의 인물에 부회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즉 기존의 씨족들이 주장하는 백제왕보다 더 오래된 계보를 추구하려는 의도에서 나왔다고 본다. 마전련씨는 자신들의 선조가 여타 씨족의 시조보다 우월하다는 차별의식 속에서 중국 사서로부터 새로운 시조를 찾아내어 한왕이 되었다는 조선왕 회(준)를 자신들의 시조로 탄생시켰다. ‘백제국의 조선왕’으로 한 것은 백제국의 전신인 한(韓)의 지배자인 조선왕임을 주장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은 조작된 계보를 「본계장」 에 기입하여 『신찬성씨록』 편찬국에 제출하여 등재되었다.
마전련씨 중에는 학문, 의술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물이 확인된다. 이 중에서 마전련진정(麻田連眞淨)이라는 인물이 「본계장」 에 시조의 출자를 기록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당시 대학직강, 대학박사, 조교를 역임한 유식자였다. 『양로령(養老令)』「학령(學令)」 의 규정에 따르면 “무릇 박사, 조교는 모두 경전에 밝고 스승을 감당할 수 있는 자를 취한다.”라고 하듯이 마전련진정은 문사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당시 전해 오는 중국의 유교 경전, 사서 등을 섭렵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 조상의 출자를 백제국보다 앞선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한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조선왕 회(淮)로 개변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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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전련(麻田連; 아사타노무라지) 자료번호 : ss.k_0002_0020_0040_0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