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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백제왕(百濟王; 구다라노코키시)

#백제(百濟)
백제왕(百濟王; 구다라노코키시)
 백제국(百濟國) 사람 의자왕(義慈王)으로부터 나왔다.
 
【주석】
1. 백제왕(百濟王)
『속일본기』 천평신호(天平神護) 2년(766) 6월조의 백제왕경복(百濟王敬福) 훙전(薨傳)에는 “선광(善光, 禪廣)이 귀국하지 못한 까닭에 등원조정(藤原朝廷, 687-696) 시대에 백제왕의 호를 내렸다”고 한다. 백제왕 호는 백제 의자왕의 직계 자손에게 준 일본 왕권의 특별 배려이며, 씨명이자 일종의 가바네[姓]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일본서기』 천지(天智)3년(664) 3월조에는 백제왕선광왕(百濟王善光王) 등을 난파(難波)에 거주하게 했다고 한다. 선광이 거주한 난파 지역에는 백제군(百濟郡)이 설치되었다. 설치 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백제 유민의 대량 이주 및 선광의 난파 거주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 이전에 선주하던 백제계 도래인들의 집거지가 백강전투 패전을 계기로 재편된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군에는 백제인들이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사(百濟寺)와 백제니사(百濟尼寺)가 조영되었다. 이 2개의 사찰은 백제 유민들의 정신적 안식처이자 이국에서의 백제계라는 동류의식을 통해 결속력을 강화해 나가는 공동의 장이었다. 지통(持統)5년(691) 정월에 “정광사 백제왕 여선광(余禪廣), 직대사 원보(遠寶)와 남우(良虞) 및 남전(南典)에게 많은 물품을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정광사 백제왕선광에게 100호, 이전의 것과 합하여 200호, ……그 밖에 각각에 따라서 식봉을 더했다”라고 하여선광에게 식봉 200호를 증보하였고 그의 자손들에게도 경제적인 혜택을 주었다. 200호의 식봉은 백제군을 이끌어 갈 수 있는 경제적 배경이었고, 이것은 백제와 왜국 간의 역사적 친연관계 위에서 백제왕의 직계 후손에 대한 특별 배려였다. 이후 섭진국(攝津國)의 백제군에 대해서는 천평승보(天平勝寶) 2년(750)경 종3위 경복(敬福)을 중심으로 한 백제왕씨 일족들이 섭진국 백제군에서 하내국(河內國) 교야군(交野郡) 산전촌(山田村)중궁(中宮, 지금의 枚方市 中宮町)으로 이주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왕선광을 중시조로 하는 일본 내의 백제왕씨들은 이후 많은 자손과 지족을 배출하며 고위 관료로서 성장하고 번영해 간다. 백제왕경복은 천평(天平) 21년(749) 육오국(陸奧國)의 장관으로 재임하던 시절에 현지에서 산출한 황금 900냥을 조정에 바쳤고, 이에 성무천황(聖武天皇)은 동대사 대불에 금을 입힐 수가 있었다. 이 공으로 백제왕경복은 종5위상에서 종3위로 7단계나 뛰어넘는 파격적인 특진을 하였고, 궁내경(宮內卿)으로 하내수(河內守)를 겸직하는 중직에 보임되었다. 한편 궁성현(宮城縣) 율원시(栗原市)에 소재하는 산왕(山王) 유적에서 육오국의 호적 문서와 관련된 칠지(漆紙) 문서인 「호구손실장(戶口損失帳)」 이 발견되었다. 여기에 적힌 ‘□제왕경□(□濟王敬□)’라는 글자는 백제왕경복이며, 육오국개(陸奧國介)와 국수(國守)로 재임했던 정사의 기록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백제왕씨 일족 중에는 육오수(陸奧守), 출우수(出羽守), 육오진수장군(陸奧鎭守將軍), 정이부장군(征夷副將軍) 등 동북 지방의 지방 장관, 현지 주둔 장군, 이종족인 하이(蝦夷) 정토 장군을 역임한 인물들이 많다. 일본 고대 문헌에서 확인된 백제왕씨가 81명에 달하여, 일족의 번영을 말해 준다. 현존 『신찬성씨록』 의 초략본과는 달리 완본 『신찬성씨록』 에는 백제왕씨에 대해 더 상세하고 많은 정보가 기록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2. 의자왕(義慈王)
백제 제30대 왕이자 마지막 왕으로, 재위 기간은 641~661년까지이다.
『정창원문서』 에는 백제 의자왕이 내대신인 중신겸족(中臣鎌足)에게 보냈다는 적색 옻칠장이 기록되어 있다. 천평승보(天平勝寶) 8년(756) 6월 21일부 「동대사헌물장(東大寺獻物帳)」 (『대일본고문서』 4-130)에 ‘적칠규목주자일구(赤漆槻木廚子一口) 우백제국의자왕진어내대신(右百濟國義慈王進於內大臣)’이라는 문장이 나온다. 7세기 후반 백제가 국가적 위기에 있던 시기에 의자왕이 당시 왜왕권의 유력한 귀족이었던 내대신 중신겸족(中臣鎌足)에게 보낸 것이다. 이 적색 옻칠장 속에는 흑백색·감홍색의 바둑알 4종과 그것을 담은 4개의 은합 그리고 기타 여러 종류의 코뿔소 뿔로 만든 장식물이 수장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울러 이 문서 목록에는 바둑알과 한 세트였음에 틀림없는 정교하게 제작된 바둑판과 그것을 담은 함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 이 옻칠장은 전해 오고 있지 않지만, 제작지가 동일한 제품으로 추정되는 것이 왕실의 소유물로서 정창원에 보관되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고문헌에 기록된 물품이 유물로 현존하는 것은 대단히 드문 일이다.
「국가진보장(國家珍寶帳)」 에 기록된 현존하는 헌물 중에 재질이 적칠문규목(赤漆文槻木)인 주자(廚子)가 있는데, 백제에서 보낸 적칠규목주자(赤漆槻木廚子)와 동일 계통임을 추정할 수 있다. 아울러 양식은 고풍이며 금동으로 장식된 가구라고 하는 옻칠장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또 『정창원문서』 의 연력(延曆) 12년(793) 「폭량사해(曝凉使解)」라는 소장품의 점검 기록에는 현존하는 적색 옻칠장을 ‘제1적칠릉관주자’, 백제 의자왕이 중신겸족에게 보낸 것을 ‘제2적칠관목주자’라고 기록하여 동일 소재와 특징을 지닌 옻칠장임을 말해 주고 있다. 이 두 개의 닮은 옻칠장은 모두 백제에서 전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국가진보장에 기록된 8세기 중엽의 시점에서 고풍 양식을 말한 것은, 그 제작 연도가 의자왕이 생존하던 7세기 후반 대의 물품에 어울리는 표현이다. 한편 왕실의 보물로서 현존하는 적색 옻칠장의 소재는 느티나무제이다. 일본 고대의 건축물, 예를 들면 법륭사 금당, 오중탑을 비롯하여 각지에서 발견된 고대의 주요 건축에서 주로 사용된 목재는 일본에 널리 자생하는 히노키라고 하는 회나무였고, 품질 면에서도 최고였다. 느티나무의 경우는 일부 강도가 필요한 부분에 한정되어 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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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왕(百濟王; 구다라노코키시) 자료번호 : ss.k_0002_0020_0040_00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