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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임련(林連; 하야시노무라지)

임련(林連; 하야시노무라지)
 백제국(百濟國) 사람 목귀공(木貴公)으로부터 나왔다.
 
【주석】
1. 임련(林連)
임(林)의 씨명은 하내국(河內國) 지기군(志紀郡) 배지향(拝志鄕)의 지명에서 유래한다. 지금의 대판부(大阪府) 등정사시(藤井寺市) 도명사정(道明寺町) 임(林) 일대이다.
사서에 등장하는 임련씨로는 『속일본기』 천평승보(天平勝寶) 6년(754) 춘정월 임자조에 정6위상에서 외종5위하로 승진한 임련구마(林連久麻)가 최초이고, 동년 7월에는 상야개(上野介)로 임명되었다. 동 신호경운(神護慶雲) 2년(768) 윤6월에는 외종5위하 임련광산(林連廣山)이 무장국(武藏國)의 소연(少掾)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속일본기』신호경운 3년(769) 2월 을축조에서는 외종5위하 임련좌비물(林連佐比物, 林連雜物)과 임련광산(林連廣山)이 숙녜(宿禰)를 사성받았다고 한다. 임숙녜는 『신찬성씨록』 하내국 신별 「임숙녜(林宿禰)」 조에는 “대반숙녜와 같은 조상이고, 실옥대련공의 아들 어물숙녜의 후손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임련씨 중에는 임숙녜를 사성받은 후에 유력 씨족인 대반씨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임련씨의 일족으로는 『속일본기』 연력(延曆) 4년(785) 6월조에 정6위상에서 외종5위하로 승진한 소속(少屬) 임련포해(林連浦海)가 나온다. 『정청원문서』 에도 다수의 임련씨가 확인된다. 천평(天平) 10년(738)의 「준하국정세장(駿河國正稅帳)」(『大日本古文書』2-122)에 임련안인(林連安人)과 임련가마려(林連加麻呂), 천평 11년 「이두국정세장(伊豆國正稅帳)」 (동 2-198)에 임련모인(林連毛人), 천평 17년 10월 20일부 「아악료해(雅樂寮解)」(동 2-472)에 임련도국(林連島國), 천평승보(天平勝寶) 7년(755) 5월 27일부 「조동대사첩(造東大寺牒)」 (동 4-66)에 임련광야(林連廣野) 등이 나온다.
한편 하내국(河內國) 제번의 「임련(林連)」 조(1035)에서는 “백제 전지왕으로부터 나왔다(出自百濟國腆支王[古記云周王. 一本云直支王.]也.)”라고 하였다. 동일한 씨성이라도 시조가 다른 경우도 있어 씨족의 인명만으로는 출자를 판별하기 어렵다.
2. 목귀공(木貴公)
목귀공은 여기에만 보인다. 그러나 『신찬성씨록』 우경 제번(하) 「임(林)」 조(900)와 동 「대석림(大石林)」 조(901), 섭진국 제번 「임사(林史)」 조(977)에는 “임련(林連)과 같은 조상을 가졌다. 백제국인 목귀의 후손이다(林連同祖. 百濟國人木貴之後也.)”라고 기록하고 있다. 목귀공의 공(公)은 존칭으로, 목귀와 목귀공은 동일인이다. 목귀를 조상으로 삼은 후손들이 평안경(平安京)과 섭진국(攝津國)에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목귀, 목귀공은 『일본서기』 천지기(天智紀) 2년(663) 9월조에 보이는 목소귀자(木素貴子)라고 생각된다. 목소귀자는 백강전투에서 패배한 후 왜국으로 망명한 인물이다. 그는 천지 10년(671) 춘정월에 달솔 목소귀자에게 대산하(大山下)의 관위를 받았으며 병법에 밝다고 기록하고 있듯이 부흥군을 이끈 야전 사령관이었다고 생각된다.
『회풍조』 에서는 담해조대우황자(淡海朝大友皇子)의 시 2수를 소개하면서, 대우황태자가 23세에 황태자가 된 후 학사(學士) 사택소명(沙宅紹明), 목소귀자 등의 백제 망명인들을 빈객(賓客)으로 삼아 널리 배웠다고 한다. 목소귀자는 병법에 밝았을 뿐 아니라 문학적인 재능도 겸비한 인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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