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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진기촌(秦忌寸; 하타노이키미)

진기촌(秦忌寸; 하타노이키미)
 태진공숙녜(太秦公宿禰; 우즈마사노키미노스쿠네)와 같은 조상이다. 융통왕(融通王)의 5세손인 단조왕(丹照王)의 후손이다.
 
【주석】
1. 진기촌(秦忌寸)
진(秦)의 훈독은 ‘하타’이다. 진기촌(秦忌寸)씨는 앞의 「태진공숙녜」 조(740)에 중국의 진 시황제의 후손임을 주장하며 그 계보관계가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일본서기』 웅략기(雄略紀) 15년(471)조에 웅략천황이 진주공(秦酒公)이 많은 견직물을 헌상했기 때문에 우즈마사[太秦]라는 씨족의 이름을 받았다는 경위를 밝히고 있다.
진씨를 중국 왕조 진 시황제의 후손으로 칭하게 된 배경으로 『삼국지』 「위서」 한전에 진한인(辰韓人)은 진(秦)의 망명인으로 고역을 피하여 한국에 왔고 언어도 진어(秦語)와 유사하여 진한(秦韓)이라고도 하였다는 전승이 있다. 이 설에 따르면 진씨는 신라로부터 왔지만 원출자는 중국 왕조의 진이라는 것이다. 진의 훈독이 하타[波陀]였듯이 원래 하타라는 말이 있었고 후에 이를 진(秦) 자로 붙였다고 생각된다. 하타라는 말에 대해 『신찬성씨록』 좌경 제번(상)의 「태진공숙녜(太秦公宿禰)」 조(740)에 “진왕이 바친 실, 솜, 명주, 비단은 짐이 입는데 부드럽고 피부에 따듯해서 파다(波多)를 성으로 하사하였다”라고 한다. 또 범어로 ‘pata’는 견포(絹布)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에 명주를 짜는 사람을 복부(服部), 진씨(秦氏)라 칭하고 명주를 짜는 도구도 하타라고 하였다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하타’의 어원에 대해 일찍이 에도시대의 국학자 신정백석(新井白石)이 파타(波陀)는 한국어라고 지적한 데 감응되어 한국어의 바다(海)에서 전화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 하나는 지명으로부터 전화했다는 설로서 일본에 도래한 사람들이 고향의 지명을 씨족명으로 했다는 것이다. 하타가 지명에서 유래한다는 설을 주장하는 점패방지진(鮎貝房之進)에 의하면, 하타는 진민(秦民)이 거주한 지명을 칭하는 것으로 보고 동해안의 울진 지방에 비정한다. 『삼국사기』 잡지4(지리2)에 울진의 영현(領縣)이었던 해곡(海曲)의 고명을 파차(波且)라고 하며, 광개토왕비문에 나오는 아단성(阿旦城)을 『삼국사기』 에서 아차성(阿且城)이라고 하듯이 파차(波且)의 차(且)는 원래 단(旦)이었다고 생각된다. 하타라는 어원은 진씨가 도래하기 이전에 거주했던 지명과 관련이 있다고 보이며,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 나오는 ‘파단(波旦)’이라는 지명이 유력하다. 하타의 어원은 진씨 일족의 원향인 파단에서 나왔고, 삼한시대 진한의 1국이었던 우유국(優由國)인 울진으로 추정된다. 진씨 일족은 의제적 동족관계를 통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도래씨족 중에서도 웅족으로 발전하여 『일본서기』, 『속일본기』 등 정사를 비롯하여 『정창원문서』, 『만엽집』, 목간 등에 산견되고 있다.
2. 단조왕(丹照王)
『산성국갈야군풍야대언향광륭사유래기(山城國葛野郡楓野大堰鄕廣隆寺由來記)』 에 인용된 〈진씨계도(秦氏系圖)〉에는 단조진공(丹照秦公)으로 나온다. 계보에도 ‘융통왕(融通王)-보동왕(普洞王)-주진공(酒秦公)-의미진공(意美秦公)-인진공(忍秦公)-단조진공(丹照秦公)’이라고 하여 융통왕의 5세손으로 기록하고 있어 『신찬성씨록』 의 내용과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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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기촌(秦忌寸; 하타노이키미) 자료번호 : ss.k_0002_0020_001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