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신찬성씨록

태진공숙녜(太秦公宿禰; 우즈마사노키미노스쿠네)

#한(漢)
태진공숙녜(太秦公宿禰; 우즈마사노키미노스쿠네)
 진(秦) 시황제(始皇帝) 3세손 효무왕(孝武王)으로부터 나왔다. 아들은 공만왕(功滿王)이고, 족중언천황(足仲彦天皇)[시호는 중애(仲哀)이다.] 8년에 내조하였다. 아들 융통왕(融通王)[혹은 궁월왕(弓月王)이라고 한다.]은 예전천황(譽田天皇)[시호는 응진(應神)이다.] 14년에 내조하였다. 27현의 백성을 거느리고 귀화하여 금은옥폐(金銀玉帛) 등의 물건을 바쳤다. 대초료천황(大鷦鷯天皇; 오사자키노스메라미코토)[시호는 인덕(仁德)이다.]치세에 127현의 진씨(秦氏)를 여러 군에 나눠 안치시켜 양잠과 명주를 바치게 하였다. 천황이 조를 내려, 진왕(秦王)이 바친 실, 솜, 명주, 비단은 짐이 입으면 부드럽고 따듯하여 피부와 같았다. 따라서 파다(波多; 하타)의 성을 주었다. 다음으로 등려지공(登呂志公), 진주공(秦酒公). 대박뢰유무천황(大泊瀨幼武天皇)[시호는 웅략(雄略)이다.]의 치세에 실, 솜, 명주, 비단을 쌓으니 산과 같았다. 천황은 이를 기뻐하여 호를 내려 우도만좌(禹都萬佐; 우즈마사)라고 말하였다.
 
【주석】
1. 태진공숙녜(太秦公宿禰)
태진(太秦)이라는 씨명에 대해 『일본서기』 웅략기(雄略紀) 15년(471)조에는 천황이 진민(秦民)을 모아 진주공(秦酒公)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는 180씨족을 통솔하여 비단을 조정에 바쳐 가득 쌓아 두어 우두마좌(禹豆麻佐; 우즈마사)의 성을 받았다는 유래가 기록되어 있다. ‘우즈(禹都)’는 존귀하다는 뜻이고, ‘우즈마사’는 족장을 의미하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태진공숙녜의 본거지는 산성국(山城國) 갈야군(葛野郡) 태진읍(太秦邑)으로, 현재의 경도시(京都市) 우경구(右京區) 태진(太秦)이다.
2. 진시황제(秦始皇帝)
전국 칠웅 진나라의 제31대 왕(기원전 259~기원전 210)이자 중국을 통일한 최초의 황제로서, 성은 영(嬴), 이름은 정(政) 혹 조정(趙政)이다. 『사기』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그의 출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진 시황은 진나라 장양왕(莊襄王)의 아들이다. 장양왕이 인질로 조나라에 있을 때 여불위(呂不韋)의 애첩을 보고 반하여 취했다. 이어서 시황을 낳았다. 진소왕(秦昭王) 48년(기원전 259) 정월에 한단(邯鄲)에서 태어나서 이름을 정(政), 성은 조(趙)라고 하였다. 시황이 13세가 되었을 때인 기원전 246년에 장양왕이 죽고 정이 진왕의 자리에 올랐다.”
3. 효무왕(孝武王)
효무왕이 진 시황의 3세손이라는 기록은 기년상으로 맞지 않는다. 진 시황의 말년은 기원전 3세기 초이다. 효무왕은 진 시황의 3세손이라고 하므로 기원전 2세기 중엽이 된다. 효무왕의 아들이 일본에 온 것은 『일본서기』 중애천황(仲哀天皇) 대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기년상으로 수백 년 차이가 난다. 조상의 계보, 기년 등은 후예씨족들이 만들어 낸 가공의 기록으로 생각된다.
4. 공만왕(功滿王)
『신찬성씨록』 우경(右京) 제번(상)의 「진기촌(秦忌寸)」 조(842)에 ‘시황제 4세손 공만왕’, 대화국(大和國) 제번의 「진기촌」 조에도 ‘시황제 4세손 공만왕’이라고 인명이 나온다.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實錄)』 원경(元慶) 7년(883) 12월 기사조의 진숙녜영원(秦宿禰永原)의 발언 중에 진 시황 후손이 응신천황 대에 127현의 인민을 이끌고 일본에 내조한 기록이 보인다. 또한 이 기록은 『일본서기』 응신기 14년조에, 이해에 궁월군(弓月君)이 백제에서 와서 “신은 저희 나라의 인부(人夫) 120현을 이끌고 귀화하고자 하였으나 신라인이 방해하여 모두 가라국(加羅國)에 머물러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갈성습진언(葛城襲津彦)을 보내 궁월군의 인부를 가라에서 불러들이도록 하였으나 3년이 지나도록 습진언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궁월군의 도래 전승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진 시황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후예씨족들의 가전에서 유래하는 것이지만, 조상의 기원 설화로서 대부분 허구의 내용들이다.
5. 융통왕(融通王)
융통왕은 궁월왕(弓月王)을 말하며, 응신조에 도래했다는 전승은 『일본서기』 응신기 14년조에 나온다. 『고사기』 응신천황단에는 진조(秦造)의 조상인 수수허리(須須許理) 등의 도래 전승이 기록되어 있다. 『일본서기』 응신기 16년 8월조에도 “평군목토숙녜(平群木菟宿禰, 的戶田宿禰)를 가라에 보냈다. 정병을 주며 ‘습진언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다. 분명히 신라가 방해하여 체류하고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빨리 가서 신라를 치고 길을 열도록 하라.’라고 명하였다. 목토숙녜 등이 정예병을 이끌고 나아가 신라의 국경에 이르렀다. 신라 왕은 놀라 사죄하였다. 궁월의 인부를 거느리고 습진언과 함께 돌아왔다”라고 하는 기록이 있다. 『고어습유(古語拾遺)』 에도 응신조에 진공(秦公)의 조사인 궁월(弓月)이 120현의 백성을 이끌고 귀화하였다는 전승이 기록되어 있다.
6. 입칠현백성(廿七縣百姓)
『일본서기』 응신기 14년조에는 이해에 궁월군(弓月君)이 백제에서 와서 “신은 저희 나라의 인부 120현을 이끌고 귀화하고자 하였으나 신라인이 방해하여 모두 가라국에 머물러 있습니다”라고 하여, 120현으로 나온다. 『고어습유』 에도 “대초료천황(大鷦鷯天皇)[시호는 인덕(仁德)이다.] 치세에 120현의 진민(秦民)을 제군(諸郡)에 안치시켰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찬성씨록』 산성국(山城國) 제번의 「진기촌(秦忌寸)」 조(914)에도 “예전천황(譽田天皇)[시호는 응신(應神)이다.] 14년에 내조하였다. ……120현의백성들을 이끌고귀화하였다”라거나, 또 『일본삼대실록』 원경(元慶) 7년(882) 12월 25일조에도 “127현을 이끌고 예전천황(譽田天皇) 14년에……내속(內屬)하였다”라고 기록하여 120현 혹은 127현으로 나온다. 『신찬성씨록』 의 27현은 127현의 오기라고 생각된다.
7. 금은옥백(金銀玉帛)
금은옥백 등의 보물을 상징하며, 한반도에서 보낸 물건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특히 신라의 물건을 지칭할 때 자주 사용한다. 『일본서기』 중애기(仲哀紀) 8년 9월조에 “눈부신 금은과 비단이 그 나라에 많이 있다. 그 나라를 저금신라국(杼衾新羅國)이라고 한다”라거나, 동 신공황후 섭정전기(중애기 9년 10월조)에 “금은의 국”, “신라왕 파사매금(波沙寐錦)은 즉시 미질기지파진간기(微叱己知波珍干岐)를 인질로 삼아 금은채색(金銀彩色) 및 능라겸견(綾羅縑絹)을 가지고 80척의 배에 실어 관군을 따라가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또 『양로율령(養老律令)』의 직원령 내장료(內藏寮)에 “금은을 비롯한 각종 보물은 제번에서 바친 물건(掌金銀珠玉寶器, 錦綾, 雑綵, 氈褥諸蕃貢献奇瑋之物)”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한반도 제국과의 교류의 과정에서 경험한 인식의 표출이며, 신라와의 교류에서 투영되었다고 생각한다.
8. 진씨(秦氏)
진씨는 진민(秦民)의 오기라는 설이 있다.
9. 진왕(秦)
진왕은 보동왕(普洞王)을 가리킨다.
10. 등려지공(登呂志公)
이 인명은 다른 문헌에는 보이지 않는다. 좌백유청(佐伯有淸)은 『신찬성씨록』 산성국 제번의 「진기촌」 조(914)에 나오는 운사왕(雲師王)의 운사(雲師)일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
11. 진주공(秦酒公)
『일본서기』 웅략기(雄略紀) 15년(471)조에는 진주공과 함께 진조주(秦造酒)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또 동 웅략기 12년 10월조에는 다음과 같은 관련 기사가 나온다. “천황이 목공인 투계어전(鬪鷄御田)에게 처음으로 누각을 세우게 하였다. 이에 어전이 누각에 올라 사방으로 빠르게 뛰어다니는 것이 마치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이때 이세(伊勢)의 채녀가 누각 위를 올려보고 그가 빠르게 다니는 것을 보다가, 뜰에서 넘어지면서 들고 있던 천황의 찬을 뒤엎었다. 천황이 문득 어전이 그 채녀와 간통하였다고 의심하고 벌을 주고자 하여 물부(物部)에게 넘겼다. 이때 진주공이 천황의 곁에서 모셨는데, 거문고 소리로 천황을 깨우치게 하고자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불렀다” 이 씨족은 역사적으로 양잠과 관련된 전승이 강하게 남아 있고, 현재 경도(京都)에는 진씨(秦氏)와 양잠, 기직과 관련된 양잠신사인 본도좌천조어혼신사(本島坐天照御魂神社)의 경내사(境內社)로 남아 있다. 또한 진씨는 그 이름에서도 보이듯이 술 제조와 관련된 전승도 적지않게 나온다. 고대의 술은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서 신성시되고 있었다.
12. 우도만좌(禹都萬左)
『일본서기』 웅략기 15년조에는 우두마좌(禹豆麻佐)로, 동 황극기(皇極紀) 3년(644) 7월조에는 우도마좌(禹都麻佐)로 되어 있고, 『고어습유』 에는 우두마좌(宇豆麻佐)로 표기되어 있다. 우즈마사의 어원에 대해 경상북도의 우진(于珍, 蔚珍)에서 유래한다는 설이 있다. 우즈마사는 후에 진씨의 본가로 알려진 태진(太秦)이다. 『고어습유(古語拾遺)』 에도 “장곡조창(長谷朝倉, 雄略朝)의 시대에 진씨가 분산되어 타 씨족에게 들어가거나 예속되었다. 진주공(秦酒公)이 출사하여 총애를 받았다. 진씨를 불러모으라는 조서를 내리고 주공(酒公)의 휘하에 두었다. 따라서 180종의 승부(勝部)를 통솔하여 양잠을 짜고 공물을 바쳤다. 그리하여 우즈마사(宇豆麻佐)의 성을 하사받았다”라고 하여 그 성의 유래를 전하고 있다. 진씨가 받은 우즈마사라는 성을 직조와 관련하여 이야기하고 있지만, 울진의 옛 지명인 우유촌(于柚村), 유유국(優由國)과 언어학상으로 보면 유사하다. 우즈마사가 지명으로부터 유래했다고 하면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오는 울진의 고명인 우진야(于珍也)의 ‘우진’, 또 「석우로전(昔于老傳)」 에 나오는 역시 울진의 고명인 우유촌의 ‘우유(于柚)’, 『삼국지』 위서 「변진전」 에 나오는 우유국의 ‘우유(優由)’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우즈는 진(珍), 언(嚴), 귀(貴)를 의미하는 고어이고, 마사는 원시적인 가바네[姓]로 ‘승(勝)’ 자의 훈착으로 ‘스구리’로 훈독되어 승(勝)의 성은 도래계 씨족과 관련이 있다. 또 마사가 촌주(村主, 스구리), 길사(吉士)와 같이 도래인의 성이고, 족장을 의미하는 한국어로 해석할 수 있다. 우즈마사는 고대 한국어에서 유래한다고 하는 설은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태진공숙녜(太秦公宿禰; 우즈마사노키미노스쿠네) 자료번호 : ss.k_0002_0020_001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