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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용미숙녜(舂米宿禰; 츠키시네노스쿠네)

용미숙녜(舂米宿禰; 츠키시네노스쿠네)
 석상(石上; 이소노카미)과 같은 조상이다.
 
【주석】
1. 용미숙녜(舂米宿禰)
용미(舂米; 츠키시네)는 도미(搗米; 츠키시네)라고도 표기한다. 『일본서기』 천무천황 13년(684년) 12월 기묘조에 용미련(舂米連; 츠키시네노스쿠네노무라지) 등 여러 씨족에게 숙녜(宿禰)를 사성하였다고 적고 있으므로, 용미숙녜의 옛 씨성이 용미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 인덕 13년 9월조에서는 “처음으로 자전둔창(茨田屯倉)을 세우고 용미부(舂米部; 츠키시네노베)를 두었다.”라고 적고 있다. 용미련은 용미부를 관리하는 반조(伴造) 씨족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고사기』 나 『일본서기』에 용미련씨 일족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경도(京都) 묘심사(妙心寺)의 「묘심사종명(妙心寺鐘銘)」에 용미련광국(舂米連廣國)이 보인다. 이 종명은 ‘무술년 4월 13일 임인조옥평조용미련광국주종(戊戌年四月十三日 壬寅糟屋評造舂米連廣國鑄鐘)’이라고 적고 있다. 이는 무술년(698) 4월 13일 임인에 축전국(筑前國) 조옥평(糟屋評)의 평조(評造)인 용미련광국(舂米連廣國; 츠키시네노무라지히로쿠니)이 종을 주조하였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용미숙녜 일족의 이름도 사서에 보이지 않는다. 다만 고문서 「천평 17년 10월 21일자 대장성이(大藏省移)」(『대일본고문서』 2-477)에 용미숙녜인족(舂米宿禰人足)이 보일 뿐이다.
그러나 좌백유청(佐伯有淸)은 고문서에 보이는 무성(無姓)의 용미씨(舂米氏) 중에 용미숙녜씨(舂米宿禰氏)가 있었을 것으로 보았다. 예를 들어 천평보자 6년(762) 정월 14일의 「조석산사소식물용장(造石山寺所食物用帳)」(『대일본고문서』 5-10)에 보이는 용미수취(舂米水取), 「정창원남창어물포유수묵서명(正倉院南倉御物袍有袖墨書銘)」(『正倉院寶物銘文集成』 266)에 보이는 용미가인(舂米家人), 보귀(寶龜) 4년(773) 7월 17일 유수(類收)「용미마장론령청반상(舂米馬長論令請返狀)」(『대일본고문서』 22-57)에 보이는 용미마장(舂米馬長), 『평성궁발굴조사출토목간개보(平城宮發掘調査出土木簡槪報)』(1-95)에 보이는 용미(舂米, 이름은 빠졌음)가 용미숙녜씨였을 것이라고 보았다.
2. 석상동조(石上同祖)
『신찬성씨록』 완본에는 ‘석상(石上)’ 다음에 ‘조신(朝臣)’이라는 글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용미련씨(舂米連氏)나 용미숙녜씨(舂米宿禰氏)가 물부씨나 석상조신씨와 같은 조상이라는 것은 다른 자료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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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미숙녜(舂米宿禰; 츠키시네노스쿠네) 자료번호 : ss.k_0001_0040_0010_0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