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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하도조신(下道朝臣; 시모츠미치노아소미)

하도조신(下道朝臣; 시모츠미치노아소미)
 길비조신(吉備朝臣; 기비노아소미)과 조상이 같다. 치무언명(稚武彦命; 와카타케히코노미코토)의 손자 길비무언명(吉備武彦命; 기비노타케히코노미코토)의 후손이다.
 
【주석】
1. 하도조신(下道朝臣)
하도(下道)라는 씨명은 일본 고대 율령제하 비중국(備中國) 하도군(下道郡)에서 비롯된 것이며, 하도군은 현재의 강산현(岡山縣) 강산시(岡山市)·창부시(倉敷市) 일부 지역에 해당한다.
하도조신(下道朝臣)의 원래 성은 신(臣)이었는데 685년에 조신이라는 성을 받았다(『日本書紀』 天武天皇 13년 11월 무신삭조).
하도조신 일족 중에서 일부는 길비조신(吉備朝臣)을 칭하게 되었으므로, 하도조신으로 이름이 확인되는 인물은 하도조신광구(下道朝臣廣口, 天平 10년경 「官人歷名」, 『대일본고문서』 24-84 등), 하도조신가례비(下道朝臣加禮比, 天平 11년 「備中國大稅負死亡人帳」, 동 2-249), 하도조신직언(下道朝臣直言, 天平 17년 12월 4일자 「經師等調度充帳」, 동 8-580), 하도조신복배(下道朝臣福倍, 상동), 하도조신흑마려(下道朝臣黑麻呂, 『續日本紀』 天平寶字 4년 정월 병인 등), 하도조신복마려(下道朝臣福麻呂, 天平寶字 4년 8월 3일자 「後一切經料雜勒納帳」, 『대일본고문서』 14-424 등), 하도조신장인(下道朝臣長人, 『續日本紀』 寶龜 10년2월 갑신조 등), 하도조신계성(下道朝臣繼成, 『日本後紀』 大同 원년 2월 기유조 등), 하도조신문계(下道朝臣門繼, 『日本三代實錄』 貞觀 11년 정월 을축조 등)가 있다.
이들 중에서 하도조신가례비는 비중국(備中國) 와옥군(窪屋郡) 미화향(美和鄕) 시인리(市忍里)의 호주이므로 하도조신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비중국에 거주하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에도 비중국에 거주한 인물로 『비중국풍토기(備中國風土記)』일문에 보이는 하도조신인주(下道朝臣人主)를 들 수 있다. 『풍토기』 일문에 따르면, 그는 천평 6년(갑술년, 734)에 하야군(賀夜郡)의 군사(郡司) 중 가장 높은 대령(大領)이었으며 관위는 종6위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하도신(下道臣) 일족은 평성경(平城京)에도 거주하고 있었다. 하도신색부다(下道臣色夫多, 『續日本紀』 天平神護 원년 정월 기해조 등), 하도신음마려(下道臣蔭麻呂, 天平神護 2년 12월 17일자 「左方頭等解」, 『대일본고문서』 5-637 등)가 그러한 예이다. 색부다는 766년에 종5위하 주전조(主殿助)로서 조신이라는 성을 받았다(『續日本紀』 天平神護 2년 5월 계해조). 음마려 역시 773년에는 하도조신음마려로 보이므로 역시 하도신에서 하도조신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寶龜 4년 「倉代西端雄物出入帳」, 『대일본고문서』21-236). 또한 음마려의 경우는 신이나 조신을 기록하지 않고 여러 차례 하도음마려(下道蔭麻呂)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와 유사한 사례가 널리 존재할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2. 길비조신동조(吉備朝臣同祖)
좌경 황별(상)에 보이는 길비조신(吉備朝臣)이 원래 하도조신(下道朝臣)이었다. 하도조신진비(下道朝臣眞備)가 길비조신이라는 씨성(氏姓)을 받은 것은 746년이고(『續日本紀』天平 18년 10월 정묘조), 하도조신을길비(下道朝臣乙吉備) 등 세 사람이 길비조신이라는 씨성을 받은 것은 748년이었다(『續日本紀』 天平 20년 11월 기축조). 이처럼 하도조신 중에서 일부 사람들이 길비조신이라는 씨성을 새롭게 받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치무언명(稚武彦命)
치무언명에 대해서는 좌경 황별(상) 「길비조신(吉備朝臣)」 조(079)의 치무언명 참조.
4. 길비무언명(吉備武彦命)
『일본서기』에서는 길비무언(吉備武彦), 다른 문헌에서는 길비건언명(吉備建彦命)이라고표기하였다. 경행(景行) 대에 일본무존(日本武尊)이 동쪽으로 정벌하였을 때 함께 따라간 인물이라고 한다.
『일본서기』에서는 경행 40년에 천황이 길비무언과 대반무일련(大伴武日連)을 불러 일본무존을 따라가도록 하였고, 길비무언은 월국(越國)에 보내어 그 지형의 험준함과 평탄함, 인민의 복종 여부를 살펴보도록 하였으며, 이때 일본무존은 신농(信濃)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경행 51년에는 길비무언의 딸 길비혈호무원(吉備穴戶武媛)을 비로 삼고 무란왕(武卵王)과 십성별왕(十城別王)을 낳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서기』에는 길비무언명의 조상에 대한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고사기』에서는 길비신(吉備臣) 등의 조상인 어서우이건일자(御鉏友耳建日子) 혹은 길비신건일자(吉備臣建日子)가 왜건명(倭建命), 즉 일본무존에 딸려 보냈다고 하였다.
『신찬성씨록』에서는 우경 황별(하)의 「진발부(眞髪部)」 조(172)에서 길비무언명(吉備武彦命), 노원공(廬原公)조에서 길비건언명이 보이는데, 전자에서는 치무언명의 아들, 후자에서는 손자라고 하였다. 『선대구사본기(先代舊事本紀)』 국조본기(國造本紀)의 노원국조(廬原國造)조에도 길비무언명의 이름이 보인다. 『비중국풍토기(備中國風土記)』일문에는 하야군(賀夜郡) 이세어신사(伊勢御神社) 동쪽에 궁뢰천(宮瀨川)이라는 강이 있는데, 강의 서쪽에, 길비건일자명(吉備建日子命)의 궁이 있다. 이 3세왕(三世王)의 궁을 지었기 때문 궁뢰(宮瀨)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길비건자일명을 3세왕이라고 한 것은 이 조항과 여원공(廬原公)조에서 길비무언명이 치무언명의 손자라고 한 기술과 일치한다.
『일본삼대실록』에서도 좌경인(左京人) 좌대사(左大史) 정6위상 인남야신종웅(印南野臣宗雄)에 대하여 그 조상이 길비무언명(吉備武彦命)인데 길비무언명의 둘째 아들인 어우별명(御友別命)의 11세손 인상(人上) 천평신호(天平神護) 원년(765)에 사는 곳의 이름을 따서 인남야신(印南野臣)이라는 성을 칭하게 되었다고 하였다(『日本三代實錄』元慶 3년 10월 무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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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조신(下道朝臣; 시모츠미치노아소미) 자료번호 : ss.k_0001_0030_0060_03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