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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고계진인(高階眞人; 다카시나노마히토)

고계진인(高階眞人; 다카시나노마히토)
 시호 천무(天武; 덴무)의 황자 정광일(淨廣壹) 태정대신(太政大臣) 고시왕(高市王)에게서 나왔다. 『속일본기』와 부합된다.
 
【주석】
1. 고계진인(高階眞人)
고계(高階; 다카시나)라는 씨명은 지명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화명유취초』에 무장국(武藏國) 입간군(入間郡) 고계향(高階鄕)이 보인다.
『속일본기』 보귀 4년(773) 10월 무신조에 의하면 안숙왕(安宿王)이 고계진인을 사성받았다고 한다. 안숙왕은 고시황자의 아들 장옥왕(長屋王)과 등원불비등의 딸 등원장아자(藤原長娥子) 사이에서 태어났다. 729년 장옥왕의 변(變) 때에 장옥왕과 그의 처 길비내친왕,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들이 연좌되어 모두 죽었다. 그러나 등원장아자의 자식인 안숙왕, 황문왕(黃文王), 산배왕(山背王)은 사면받았다.
안숙왕은 737년에 음서로 종5위하를 받고, 그해 10월에 종4위하로 승진하고 740년에 종4위상, 751년에 정4위하로 승진하였다. 관직도 738년에 현번두(玄蕃頭), 746년에 치부경(治部卿), 749년에 중무대보(中務大輔), 754년에 내장두(內藏頭)를 역임하였다. 황문왕은 737년에 종5위하를 받고, 739년에 정4위하로 승진하였고, 740년에는 종4위상으로 승진하였으며, 741년에는 산위두(散位頭)가 되었다. 748년에 원정상황이 붕어하였을 때와 756년에 성무천황이 붕어하였을 때에 장속사(裝束司)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757년에 효겸천황이 대취왕(大炊王)을 황태자로 임명한 것에 반발하여 일어난 귤나량마려(橘奈良麻呂)의 난으로 세 사람의 운명은 크게 바뀌게 되었다. 귤나량마려가 천황으로 옹립하려 한 황문왕은 붙잡혀서 고문을 받고 죽었다. 안숙왕은 황문왕의 소개로 사정을 모르고 속아서 모의에 참가하였다고 변명하였지만 처자와 함께 좌도(佐渡)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이 난을 밀고한 산배왕은 그 공을 인정받아 757년 7월에 종4위상에서 3단계나 승진하여 종3위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어머니의 씨성인 등원조신(藤原朝臣)을 사성받아 등원조신제정(藤原朝臣弟貞)이 되었다. 760년에는 곤궁대필(坤宮大弼)이 되었고, 762년에는 참의가 되어 의정관의 일원이 되었다가, 763년 11월에 죽었다.
안숙왕이 언제 유배에서 풀려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위의 『속일본기』 기사를 통해 773년에 광인천황이 그에게 고계진인을 사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유취국사』와 『일본후기』, 『속일본후기』에 고계진인씨 일족의 모습이 보인다. 806년에 견당판관(遣唐判官)의 임무를 마지고 돌아와 정6위상에서 종5위상으로 승진한 고계진인원성(高階眞人遠成), 807년에 정6위상에서 종5위하로 승진한 고계진인진영(高階眞人眞永), 813년에 정6위상에서 종5위하로 승진한 고계진인정계(高階眞人淨階), 813년에 비전개(備前介)로 종5위하인 고계진인진중(高階眞人眞仲), 817년에 정6위상에서 종5위로 승진한 고계진인제중(高階眞人弟仲), 823년에 정6위상에서 종5위하로 승진한 고계진인석천(高階眞人石川), 827년 정6위상에서 종5위하로 승진한 고계진인청상(高階眞人淸上), 831년에 무위로 득도(得度)하게 된 고계진인영하(高階眞人永河), 833년에 정6위상에서 종5위하로 승진한 고계진인신징(高階眞人信澄), 839년에 정6위상에서 종5위하로 승진한 고계진인흑웅(高階眞人黑雄) 등이 보인다.
위의 안숙왕에 대한 사성 이후에 고시황자의 후손에 대한 고계진인 사성이 843년부터 883년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속일본후기』, 『일본문덕천황실록』, 『일본삼대실록』 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2. 시천무(諡天武)
좌백유청(佐伯有淸)은 『신찬성씨록』 완본에는 ‘시(諡)’ 자 앞에 ‘천정중원영진인천황(天渟中原瀛眞人天皇)’이라는 글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3. 정광일(淨廣壹)
천무천황 14년(785)에 제정한 제왕의 12관위 중에서 제6위이다. 앞의 「삼원진인」 조(026) 정광일 참조.
4. 태정대신(太政大臣)
양로령(養老令)의 관위령(官位令)에서는 1품, 정1위, 종2위에 상당하는 관직을 태정대신이라고 적고 있다. 양로령 직원령(職員令)에서는 태정대신이 한 사람(천황)의 사범(師範)이며 천하의 모범이 되는 사람이라고 적고 있다. 이러한 규정은 대보령(大寶令)에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8세기 전반에는 태정대신이 임명되지 않았다. 760년 1월에 순인천황(淳仁天皇)이 등원중마려(藤原仲麻呂)를 태정대신에 임명한 것이 처음이다.
그런데 태정대신은 7세기 후반에 처음 시작되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671년 1월에 천지천황(天智天皇)이 아들 대우(大友)황자를 태정대신으로 처음 임명한 후 지통천황이 690년 7월에 고시(高市)황자를 태정대신으로 임명하였다. 천지천황 대의 근강령(近江令), 지통천황 대의 비조정어원령(飛鳥淨御原令)에 태정대신에 관한 규정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5. 고시왕(高市王)
천무천황의 맏아들 고시황자(654~696)이다. 『일본서기』 천무천황 2년 2월 계미조에 의하면 천무천황이 흉형군덕선(胸形君德善)의 딸 이자낭(尼子娘)에게서 고시황자명(高市皇子命)을 낳았다고 적고 있다. 천무천황의 맏아들로 672년의 임신의 난 때에 활약하였으나 어머니가 축자(筑紫) 종상군(宗像郡)의 호족 출신이었다. 그래서 685년에 관위를 받을 때에 천무천황의 황자 중에서 황녀의 자식인 초벽황자(草壁皇子)와 대진황자(大津皇子)보다 낮은 관위를 받았다. 686년 10월에 천무천황이 죽은 직후 대진황자가 모반의 죄로 사형에 처해지고, 689년 4월에 황태자 초벽황자가 병으로 죽었다. 천무천황의 황후가 690년 1월에 즉위하여 지통천황이 되었다. 지통천황은 7월에 고시황자를 태정대신에 임명하였는데, 이때부터 696년 7월에 죽을 때까지 고시황자가 지통천황을 도와 정치를 하였다. 693년에는 관위가 정광일로 승진하였다.
6. 속일본기합(續日本紀合)
앞에서 언급한 『속일본기』 보귀 4년(773) 10월 무신조의 안숙왕(安宿王)이 고계진인을 사성받은 기사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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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계진인(高階眞人; 다카시나노마히토) 자료번호 : ss.k_0001_0030_0010_02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