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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문궤

천사(天使) 양방형(楊方亨)이 바다 건너 일본에 가는 과정을 알리는 조선국왕의 주문(奏文)

8. 日本冊使渡海奏文
  • 발신자
    조선국왕 신 이(李) 휘(諱)
  • 발송일
    1596년 7월 9일(음)(만력 24년 7월 9일)
발신: 조선국왕 신 이(李) 휘(諱)는 삼가 상주합니다.
사유: 책봉사가 바다를 건너는 소식에 관한 일입니다.
 
[조선국왕] 만력 24년(1596) 6월 18일 사감철회왜영배신(查勘撤回倭營陪臣) 황신의 장계를 받았습니다.
[황신] 본월 10일 일본군 장수 다이라노 시게노부주 001
각주 001)
원문에는 ‘平調信’으로 기재되어 있다. 야나가와 시게노부(柳川調信, 1539~1605)를 가리킨다. 쓰시마의 가신이며 전쟁 기간 강화교섭 전반에 관여했다. 다이라(平)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평정하면서 취한 일본 헤이안(平安) 시대의 대표적인 성씨이다. 당시 호조(北条) 씨 등이 헤이시(平氏)의 후손이었고, 오다 노부나가(職田信長) 등이 일본의 실력자로서 헤이시를 칭했다. 히데요시는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로서 평민(햐쿠쇼)이었으나 1582년 노부나가 사망 이후 전국시대의 주도권을 쥐었고, 1583년부터 1585년까지 공식적인 시메이(氏名)로 다이라노 히데요시(平秀吉)로 칭했다. 1585년에는 후지와라(藤原) 가문인 고노에 사키히사(近衛前久)의 양자가 되어 간바쿠(關白)가 되었고, 1586년 일본 조정에서 도쿠가와(豊臣) 시메이를 받았다. 이마타니 아키라 지음, 이근우 옮김, 2022, 『무가와 천황-일본의 이중구조를 이해하는 두 가지 방법-』, (주)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8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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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본국 통사 이언서(李彦瑞)에게 “어제 관백이 분부하기를 유키나가주 002
각주 002)
원문에는 ‘行長’으로 기재되어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60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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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 속히 양 정사주 003
각주 003)
양방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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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바다를 건널 것을 청하라고 명령하였으니 본월 15일 즈음에 삼가 본부(양방형)를 모셔 바다를 건널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이언서가 “죽도(竹島) 등 일본군 제영(諸營)도 함께 바다를 건너는가? 양 노야(老爺)의 뜻은 모름지기 한 명의 일본인도 남지 않는 것을 기다려서 바다를 건널 것이다”라고 물었습니다. 시게노부가 “만약 정사·부사 두 책사가 함께 바다를 건넌다면 각 영(各營)도 마땅히 모두 철수할 것이다. 지금 이 노야가 떠나 버렸는데주 004
각주 004)
정사 이종성이 1596년 4월 일본군 진영을 탈출한 사건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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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각 영을 먼저 철수시킨다면 나약해 보일 듯하다. 모름지기 본부가 관백과 서로 만나기를 기다린 연후에야 즉시 마땅히 모두 철수할 것이니 이때에 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관백이 여러 차례 독촉하였으니 본부가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아도 사세가 어쩔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주 005
각주 005)
이 내용은 『선조실록』에서도 확인된다. 『宣祖實錄』 卷76, 宣祖 29年 6月 癸丑(17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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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왕] 또한 본월 20일에 본관(황신)의 장계를 받았습니다.
[황신] 본월 12일 일본군 장수 다이라노 시게노부가 본국 통사 이언서에게 “오늘 내가 양 노야를 보고 떠나는 기일을 품정하려 한다. 나는 계속 본처에 남아 너희 나라 통신사로 차정된 배신을 기다렸다가 함께 바다를 건널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를 듣고 신이 즉시 통사 김길손(金吉孫)으로 하여금 정부(正府)주 006
각주 006)
양방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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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문으로 나아가 문의하도록 했더니 상 관가(常管家)주 007
각주 007)
관가(管家)는 가사를 돌보는 집사로 상진충(常盡忠, ?~?)을 가리킨다. 『宣祖實錄』 卷76, 宣祖 29年 6月 癸丑(17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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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어제 3경 무렵 유키나가가 와서 노야를 뵙고 바다를 건널 것을 힘써 청하니 노야가 ‘나는 모름지기 너희가 모두 철수하고 진영을 불태워 한 사람의 일본인도 남지 않을 때를 기다린 연후에야 바다를 건널 수 있다. 지금은 결코 나아갈 수 없다’라고 답했습니다. 유키나가가 ‘관백이 여러 차례 독촉하였으니 노야께서는 떠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노야가 ‘너희가 만약 각 영을 철수하지 않고 억지로 내가 바다를 건너도록 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이때부터 군사를 조발할 것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유키나가가 ‘관백이 우리들에게 노야를 간절히 청하여 모시도록 명령하였는데 노야의 말이 이와 같으니 우리들이 3, 4년간 왕래하며 주선한 공이 모두 허사로 돌아갈 것이고, 또한 수년 동안 천조의 장사(將士)에게 대접하며 허다한 전량을 낭비하였으니 관백이 만약 천조에서 군사를 조발한다는 것을 듣게 되면 우리는 반드시 먼저 죽을 것입니다. 이에 대개 사세상 모름지기 속히 떠나셔야 합니다. 지금 이미 선척을 점검해 두고 분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노야가 ‘선척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체가 만약 완결되면 나는 비록 표주박이라도 타고 떠날 수 있다. 너희들은 모름지기 먼저 각 영을 철수하고 성책과 건물을 불사른 연후에 와서 청하면 나는 곧바로 출발하겠다’라고 답했습니다. 유키나가가 ‘관백의 뜻은 먼저 노야를 청하여 바다를 건너고 각 영을 뒤따라 철수하는 것입니다. 지금 대인의 뜻을 받드오니 마땅히 사체가 적절히 처리되어야 하겠습니다. 다시 와서 아뢰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다이라노 시게노부도 바다를 건너시기를 간절히 청하였으나 정사는 준엄하게 거부하고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주 008
각주 008)
『선조실록』에서 시게노부(調信)가 통신사가 늦게 온다면 유키나가가 먼저 양방형과 함께 일본으로 도해하고 자신은 통신사를 기다렸다가 함께 일본으로 갈 수도 있다고 했고, 이 내용을 들은 황신이 통사 김길손을 보내 양방형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때 양방형은 “모른다(我則不知)”라고 했고 관가(管家) 상진충은 양방형이 일본군이 모두 철수한 다음 도해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원문의 기사에서 생략된 부분을 『선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宣祖實錄』 卷76, 宣祖 29年 6月 癸丑(17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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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왕] 본일(6월 20일) 또한 본관의 장계를 받았습니다.
[황신] 본월 13일 유격 진운홍(陳雲鴻)의 근수통사(跟隨通事) 유홍상(柳弘祥)이라고 하는 이가 신에게 “본일(6월 13일) 일본군 장수 다이라노 시게노부가 본부(진운홍)에게 ‘관백이 유키나가에게 분부하여 속히 양 노야가 바다를 건너도록 청하도록 했으나 양 노야가 허락하지 않으므로 우리들은 매우 근심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본부가 ‘고칙과 장복(章服)이 제때에 도착하지 않으나 마땅히 즉시 나아가기는 해야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시게노부가 ‘관백이 이미 일로(一路)에 대접을 준비해 놓고 책사의 행차를 기다리고 있으니 속히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본부가 ‘나 또한 조정의 명명(明命)을 받들고 와서 너희들이 떠나는지 머무는지를 조사하고 있으니 너희들이 각 영을 불태워 철수한 뒤에라야 양 노야가 그제야 바다를 떠날 수 있다. 너희들이 만약 양 노야에게 속히 바다를 건너시라 청하고 싶다면 모름지기 각 병영을 빨리 철수하고 성책과 건물을 불살라야 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당연히 한편으로는 조선국에 자문으로 알려 주본을 올리도록 하고, 한편으로는 주본을 올려 고칙을 급히 청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한다면 비록 내일이라도 출발하는 데 무슨 방해가 되겠는가’라고 답했습니다. 시게노부가 ‘관백이 이미 빨리 오라고 명령하여 우리들은 감히 거스를 수 없습니다. 제영(諸營)은 양 노야가 저쪽에 도착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반드시 철수를 결정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감히 거짓을 말하지 못하니 바라건대 귀부께서는 힘써 양 노야가 바다를 건너도록 권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조선국왕] 또한 본일에 본관의 장계를 받았습니다.
[황신] 본월 13일 임 통사라고 하는 이가 본국 통사 김길손에게 “양 노야는 마땅히 본월 16일에는 바다를 건널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김길손이 이를 듣고 그대로 요(姚) 상공(相公)에게 물어 “날짜가 언제인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다만 노야가 대마도에 도착하면 각 영의 일본군이 모두 철수하여 바다를 건널 것이다. 진 유격·이 중군(中軍)주 009
각주 009)
중군 이대간(李大諫,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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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 천총주 010
각주 010)
천총 심무시(沈懋時, ?~?)를 이른다. 심유경의 조카로 알려져 있다. 신경, 『再造藩邦志』 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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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모두 여기에서 일본군 진영을 불사르는 일을 전담하여 감독할 것이다. 만약 일이 완결되면 이 중군은 뒤를 따라 일본으로 향하고 진 유격은 북경으로 되돌아가며, 심 천총만이 이곳에 있을 것이다”라는 요 상공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신이 보건대 정부(양방형) 아문의 각 원역들이 모두 이미 행차를 수습하고 바다를 건너려는 계획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조선국왕] 또한 본월 21일 본관의 장계를 받았습니다.
[황신] 본월 13일 초경(初更) 신이 통사 김길손에게 명하여 정부에게 가서 “밖에서는 모두 말하기를 노야가 각 영이 철수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15, 16일 사이 바다를 건널 것이라고 하는데 배신이 자세한 사정을 잘 몰라 저희로 하여금 와서 여쭈도록 했습니다”라고 아뢰도록 했습니다. 정사가 “천조의 왕래하는 사람들이 매번 ‘병마가 나올 것이다’라고 하고 병부에서 차부(箚付)하여 또한 ‘사체가 좋지 못한즉 마땅히 한쪽으로 군사를 조발해야 한다’라고 하니 저들이 매번 이로 인해 두려워하여 우리에게 속히 건널 것을 청하고 있는 것이다. 심(沈) 유부(遊府)주 011
각주 011)
심유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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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우리가 빨리 오기를 청하고 있으니 모름지기 우리가 빨리 떠나야만 속히 대사(大事)주 012
각주 012)
문맥상 명에 의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국왕 책봉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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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각 영이 철수하는 일을 완결할 수 있다. 어제 진 유격이 시게노부주 013
각주 013)
원문에는 ‘調信’으로 기재되어 있다. 야나가와 시게노부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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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과 면대하여 다짐받기를 반드시 철수하지 못할 이치가 없다고 하였으니 나는 마땅히 대마도에 도착하여 고칙과 장복을 기다려 바야흐로 나아가려 한다”라고 답했습니다. 본일 일본군 장수 다이라노 시게노부가 일본의 통사 요시라(要時羅)로 하여금 신에게 “나는 처음에 양 노야를 배행하여 바다를 건너려 하였는데, 오늘 유키나가의 분부를 받들어 머무르면서 귀국의 사신을 기다릴 것입니다. 사신이 만약 과연 온다면 나는 열흘을 머문다 해도 기다릴 수 있으나 만약 마침내 오지 않는다면 나는 내일이라도 떠나 돌아가려 합니다”라고 말하게 했습니다. 또한 (요시라가) “시게노부가 ‘저번에 조선 사신에게 아직 소식이 없으니 모름지기 양 책사가 들어오도록 급히 청하고 조선 사신이 만약 기꺼이 오지 않겠다면 억지로 청하지 말고 다만 기요마사주 014
각주 014)
원문에는 ‘淸正’으로 기재되어 있다. 가토 기요마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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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군사를 다시 보내 승부를 낼 것이라는 관백의 서찰을 보았다’라고 언급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요시라가) “천사(天使)가 바다를 건너도 4개 일본군 진영이 철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조선이 지나치게 의심하는 듯싶습니다. 그러나 다른 우환이 생길 리 만무하니 양 노야가 바다를 건너고 보고가 관백에게 이르면 마땅히 즉시 명령하여 철수할 것입니다. 다만 부산 진영에 얼마의 무리를 남겨 두어 책사가 돌아오기를 기다린 연후 모두 철수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조선국왕] 또한 본월 23일 본관의 장계를 받았습니다.
[황신] 본월 14일 신이 정사에게로 나아가니 정사가 “어제 김 통사(김길손)가 전한 이야기를 배신이 명백히 알아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신이 “제가 김 통사가 전한 말을 듣고 이미 노야의 염려를 잘 알게 되었습니다. 다만 사체가 과연 후련하게 완결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정사가 “일의 성패 여부는 나 또한 예측할 수 없습니다만 조정에서 매번 내게 속히 바다를 건너 봉사(封事)를 일찍 마무리 지으라고 하니 지금 내가 떠나지 않는다면 반드시 천조의 대신이 일본인을 두려워한다고 여길 것이라 어찌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고 곧 조정의 몸이라 감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니 나는 지금 일단 바다를 건너 이후의 사체가 어떤 모습이 될지를 천천히 살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신이 “노야께서 바다를 건너더라도 각 영이 아직 철수하지 않아 어느 때에 철수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정사가 “일본인이 말하는 바를 도무지 믿을 수 없으나 다만 진 유격이 일찍이 시게노부와 면대하여 머지않아 당연히 불태울 것이라는 다짐을 받았다고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주 015
각주 015)
이 내용은 『선조실록』의 다른 기사에서 확인된다. 『宣祖實錄』 卷76, 宣祖 29年 6月 己未(23日). 원문에서는 유격 진운홍이 야나가와 시게노부와 면대하여 다짐을 받아 일본군이 머지않아 진영을 불태울 것이라는 대목에서 끝나지만, 『선조실록』에서는 양방형이 조선의 배신을 보내는 일은 사리로만 말한 것 일뿐, 실제로 자신은 이 사안과 관련이 없다는 내용으로 이어진다(過海陪臣 我只以理言之 非欲强國王必從也 我則不管此事云云). 또한 양방형의 태도에 관한 사관(史官)의 사평(史評)도 함께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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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왕] 또한 본일(23일)에 본관의 장계를 받습니다.
[황신] 본월 15일 저녁 정부와 대동한 일행인 각각의 인원들이 배를 타고 바다로 떠났고, 일본군 장수 다이라노 유키나가주 016
각주 016)
원문에는 ‘平行長’으로 기재되어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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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인우위문이 각각 배를 타고 배행하였는데 대략 선박의 수가 120여 척 정도이며, 감안리 해변에 정박하여 밤을 지냈습니다. 16일 새벽 돛을 달고 대마도로 떠났습니다.
[조선국왕] 또한 본일(23일) 정사사후배신(正使伺候陪臣) 이항복(李恒福)의 장계를 받았습니다.
[이항복] 본월 16일 오시(午時) 양산군수(梁山郡守) 김극유(金克裕)·동래현령(東萊縣令) 이유성(李惟誠)이 연명으로 장보(狀報)하였습니다.
[김극유·이유성] 체탐군관 정지성(鄭之成)·문시강(文時講)이 보고하였습니다.
[정지성·문시강] 책봉정사가 본월 15일 술시(戌時)에 배를 타고 이동하여 감안리 해변에 정박하였다가 16일 새벽 순풍을 타고 바다를 건넜습니다. 이어서 직접 가서 알아보니 이 책사주 017
각주 017)
이종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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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하장관 이하 인원 및 유 상공(兪相公)이 모두 따라서 떠났고 요 상공은 북경(北京)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조선국왕] 또한 본월 24일 흠차신기삼영유격장군서도지휘첨사(欽差神機三營遊擊將軍署都指揮僉事) 심유경의 자문을 받았습니다.
[심유경] 이전에 귀국에 자문하여 배신을 차견해 (책사의 명령에) 대기하면서 근수하여 바다를 건너 면대하여 우호를 닦도록 한 것은 일본군이 전부 후퇴하여 떠나가는 것을 기약해서입니다. 여러 차례 자문을 보내 차견할 것을 재촉하였으나 책사가 도해할 날짜가 가까워짐에 따라 기다리며 지체하다가 먼저 가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에 본부가 도해한 이래로 관백이 더욱 감복하여 기요마사주 018
각주 018)
원문에는 ‘淸正’으로 기재되어 있다. 가토 기요마사를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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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의 군사를 모두 철수시키고 소굴을 불태웠으니 책사가 동쪽으로 건너가고 배신을 파견하는 것은 사세상 늦출 수 없습니다. 국왕께서는 번거롭겠지만 이전과 지금의 자문 내 사리를 살피셔서 배신 2명을 파견해 오도록 하여 동쪽으로 건너 책사를 수행하도록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주 019
각주 019)
이 내용은 『선조실록』의 다른 기사에서 확인된다. 『宣祖實錄』 卷76, 宣祖 29年 6月 庚申(24日). 중군 이대간이 나고야에서 나올 때 심유경의 자문을 가져왔고 며칠 뒤 황신을 만나 전해 주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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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왕] 또한 본월 26일 배신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이용순(李用淳)의 장계를 받았습니다.
[이용순] 동래현령 이유성이 비보했습니다.
[이유성] 본월 13일 일본군 장수 다이라노 요시토시주 020
각주 020)
원문에는 ‘平義智’로 기재되어 있다. 소 요시토시(宗義智, 1568~1615)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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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인시(寅時)에 먼저 바다를 건너갔습니다.
[조선국왕] 갖추어 올린 장계를 받고서 이전의 해당 문서를 조회해 보니 작년(1595) 1월에 병부의 자문을 받았습니다. 대략 다음의 내용입니다.
[병부] 지금 특별히 관원에게 전담하게 하여 격문을 전하니 해국(該國) 군신은 마땅히 성심으로 우러러 성명(聖明)이 소국을 아끼는 인애를 체득하기에 힘써 적당한 배신을 책임 지워 차견하여 부산으로 보내 직접 유키나가를 만나 천조의 은위(恩威)로써 유시하면서 서로 우호를 닦고 구악을 생각하지 않는 데 힘써야 할 것입니다. 저들 부산의 일본인이 모두 돌아가며 성책과 건물을 불태우는 날을 기다렸다가 성지를 준행하고 사실에 의거해 주보(奏報)함으로써 책사가 강을 건너 책봉하러 가는 데에 편리하게 하십시오.
[조선국왕] 이를 받고 곧바로 배신 사섬시정(司贍寺正) 황신을 선발하여 차견하여 흠차선유유격장군(欽差宣諭遊擊將軍) 심유경을 수행하여 다이라노 유키나가의 웅천(熊川) 진영에 가서 각처에서 일본군 진영이 철수하는 것을 현장 조사하도록 했습니다. 그 후 뒤이어 여러 차례 「본년(1595) 7월 이후 경상우도 덕교(德橋)을 포함한 7영과 좌도 서생포(西生浦)를 포함한 5영에서 (일본군이) 차례대로 철수하여 바다를 건넜다」는 본관의 치계를 받아 신이 주본을 갖추어 보냈는데, 배신 호조판서(戶曹判書) 구성(具宬)·이조판서(吏曹判書) 노직(盧稷)을 차견하여 주본을 가지고 떠나도록 했습니다. 또한 본년(1596) 3월에 흠차책봉일본정사후군도독부첨주첨서관사서도독첨사 이종성과 부사오군영우부장좌군도독부서도독첨사 양방형의 자문을 받았습니다.
[이종성·양방형] 일본 도요토미 유키나가주 021
각주 021)
원문에는 ‘豐臣行長’으로 기재돼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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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품신을 받았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 삼가 조선국왕에게 이자하여 배신을 차견해서 관가(官駕)를 따라 일본에 오도록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종성·양방형] 이를 받고 살펴보건대 유키나가가 반드시 배신이 함께 와서 통호하기를 바라고 있으니 이는 진실로 천심(天心)이 화를 내린 것을 후회하는 것으로 천 년에 한 번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오늘날의 계책으로 삼아 배신을 마땅히 권도(權道)에 따라 파견해서 사절을 수행해 함께 바다를 건너도록 하여 면전에서 맹약을 다짐받게 해야 할 듯합니다. 본부(이종성)는 원훈(元勳)의 후손으로서 또한 귀국을 위하여 멀리서부터 거친 파도를 건너고 위험을 무릅쓰고 왔는데 도리어 한 사람의 배신에 인색해 내주지 않으니 귀국이 진실로 무엇을 보고 그런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조선국왕] 또한 5월에 그다음으로 흠차책봉일본정사오군영우부장좌군도독부서도독첨사 양방형의 게첩을 받았습니다. 대략 다음의 내용입니다.
[양방형] 배신이 도해해야 한다는 한 대목은 또한 일찍이 자문을 갖추어 보내 드렸으니 현왕께서 잘 헤아려 판단하시리라 생각됩니다. 지금 우리 두 사신이 부절을 가지고 가는데 배신이 따라가는 것은 저들에게 굽히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현왕께서는 이를 깊이 생각하소서.주 022
각주 022)
양방형의 게첩을 요약한 기사는 『선조실록』에 실려 있다. 『宣祖實錄』 卷75, 宣祖 29年 5月 丙申(30日). 원문의 기사에서 『선조실록』의 요약본을 더욱 요약했다. 생략된 내용은 중국의 고사이며, 이를 통해 배신을 수행하게 하는 것이 일본에 굽히는 것이 아님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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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왕] 이를 받고 소방은 일본과 더불어 이치상 서로 통호하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이제 논의하는 사이, 이번에 위의 자문을 받고서 신이 가만히 살펴보건대 소방의 연해에 나란히 둔거하고 있는 적은 대개 이미 철수하였으나 부산 등 4개 영은 여전히 본처에 남아 아직 모두 철수하지 않으니 이미 당초 한 명의 일본인도 남기지 않겠다는 약속이 아닌 것입니다. 지금 다이라노 유키나가와 다이라노 시게노부는 또한 천조에서 지급할 고칙이 도착해 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천사에게 지레 경솔히 바다를 건너기를 간청하였는데, 그 사이에 사정을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비록 정사가 도해했다는 보고가 도착하면 즉시 4개 영의 군사를 철수한다고 말하면서 또한 소방의 통신 배신이 함께 바다를 건너기를 기다린다고 말하니 그런즉 그 말이 이전부터 지금까지 변하곤 하여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 말 중에 부산에 얼마간의 무리를 머무르게 하여 책사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게 한다는 것은 더욱 헤아릴 수 없습니다. 혹 이로 인하여 따로 협박할 거리가 생겨 다른 흔단을 야기해 훗날의 화란이 될지 또한 아직 알 수 없기에 신은 근심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얼마 후 또한 배신을 매우 급하게 요구하였는데 소방은 이 적과 복수해야 할 원한이 이미 깊어 본디 대번에 서로 통호할 이치가 없다는 내용을 신이 이미 곡절을 갖추어 진술하여 외람되게 천청(天聽)에 주문(奏聞)하였습니다. 그러나 책사가 여러 차례 이자하고 이첩하여 권유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니 반드시 때를 살피고 사세를 헤아려 어쩔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러했던 것입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책사는 황명의 엄중함으로 소방을 위하여 멀리서 넓은 바다를 건너와 이미 근수라고 말하며 거듭 명하였은즉 한두 배신을 차견하여 행차를 받들어 호위하는 것은 예가 또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원위사감철회왜영배신(原委査勘撤回倭營陪臣) 황신을 차견하여 한 무리의 인원을 대동시켜 급히 바다를 건너 책사가 나아간 곳으로 따라잡고 분부를 기다려 진퇴를 행하도록 했습니다. 만약 저들의 사정이 변하여 책봉하는 일이 타결되지 않으면 신은 마땅히 즉시 주본을 갖추어 치주(馳奏)하려 계획하고 있습니다. 간절히 비옵건대 성명께서는 해부에 명을 내리시어 사세를 참작해서 미리 구해 주실 여지를 마련해 주신다면 크게 다행이겠습니다. 책사가 도해하는 소식과 관계된 사리이기 때문에 이에 삼가 주본을 갖추어 아룁니다.
 
만력 24년 7월 9일 조선국왕 신 이(李) 휘(諱)가 이같이 삼가 주문하고 성지를 기다리겠습니다.

  • 각주 001)
    원문에는 ‘平調信’으로 기재되어 있다. 야나가와 시게노부(柳川調信, 1539~1605)를 가리킨다. 쓰시마의 가신이며 전쟁 기간 강화교섭 전반에 관여했다. 다이라(平)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평정하면서 취한 일본 헤이안(平安) 시대의 대표적인 성씨이다. 당시 호조(北条) 씨 등이 헤이시(平氏)의 후손이었고, 오다 노부나가(職田信長) 등이 일본의 실력자로서 헤이시를 칭했다. 히데요시는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로서 평민(햐쿠쇼)이었으나 1582년 노부나가 사망 이후 전국시대의 주도권을 쥐었고, 1583년부터 1585년까지 공식적인 시메이(氏名)로 다이라노 히데요시(平秀吉)로 칭했다. 1585년에는 후지와라(藤原) 가문인 고노에 사키히사(近衛前久)의 양자가 되어 간바쿠(關白)가 되었고, 1586년 일본 조정에서 도쿠가와(豊臣) 시메이를 받았다. 이마타니 아키라 지음, 이근우 옮김, 2022, 『무가와 천황-일본의 이중구조를 이해하는 두 가지 방법-』, (주)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81~84쪽. 바로가기
  • 각주 002)
    원문에는 ‘行長’으로 기재되어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600)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3)
    양방형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4)
    정사 이종성이 1596년 4월 일본군 진영을 탈출한 사건을 말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5)
    이 내용은 『선조실록』에서도 확인된다. 『宣祖實錄』 卷76, 宣祖 29年 6月 癸丑(17日). 바로가기
  • 각주 006)
    양방형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7)
    관가(管家)는 가사를 돌보는 집사로 상진충(常盡忠, ?~?)을 가리킨다. 『宣祖實錄』 卷76, 宣祖 29年 6月 癸丑(17日). 바로가기
  • 각주 008)
    『선조실록』에서 시게노부(調信)가 통신사가 늦게 온다면 유키나가가 먼저 양방형과 함께 일본으로 도해하고 자신은 통신사를 기다렸다가 함께 일본으로 갈 수도 있다고 했고, 이 내용을 들은 황신이 통사 김길손을 보내 양방형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때 양방형은 “모른다(我則不知)”라고 했고 관가(管家) 상진충은 양방형이 일본군이 모두 철수한 다음 도해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원문의 기사에서 생략된 부분을 『선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宣祖實錄』 卷76, 宣祖 29年 6月 癸丑(17日). 바로가기
  • 각주 009)
    중군 이대간(李大諫, ?~?)이다. 바로가기
  • 각주 010)
    천총 심무시(沈懋時, ?~?)를 이른다. 심유경의 조카로 알려져 있다. 신경, 『再造藩邦志』 三. 바로가기
  • 각주 011)
    심유경이다. 바로가기
  • 각주 012)
    문맥상 명에 의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국왕 책봉을 가리킨다. 바로가기
  • 각주 013)
    원문에는 ‘調信’으로 기재되어 있다. 야나가와 시게노부를 지칭한다. 바로가기
  • 각주 014)
    원문에는 ‘淸正’으로 기재되어 있다. 가토 기요마사이다. 바로가기
  • 각주 015)
    이 내용은 『선조실록』의 다른 기사에서 확인된다. 『宣祖實錄』 卷76, 宣祖 29年 6月 己未(23日). 원문에서는 유격 진운홍이 야나가와 시게노부와 면대하여 다짐을 받아 일본군이 머지않아 진영을 불태울 것이라는 대목에서 끝나지만, 『선조실록』에서는 양방형이 조선의 배신을 보내는 일은 사리로만 말한 것 일뿐, 실제로 자신은 이 사안과 관련이 없다는 내용으로 이어진다(過海陪臣 我只以理言之 非欲强國王必從也 我則不管此事云云). 또한 양방형의 태도에 관한 사관(史官)의 사평(史評)도 함께 살펴볼 수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16)
    원문에는 ‘平行長’으로 기재되어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지칭한다. 바로가기
  • 각주 017)
    이종성이다. 바로가기
  • 각주 018)
    원문에는 ‘淸正’으로 기재되어 있다. 가토 기요마사를 이른다. 바로가기
  • 각주 019)
    이 내용은 『선조실록』의 다른 기사에서 확인된다. 『宣祖實錄』 卷76, 宣祖 29年 6月 庚申(24日). 중군 이대간이 나고야에서 나올 때 심유경의 자문을 가져왔고 며칠 뒤 황신을 만나 전해 주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20)
    원문에는 ‘平義智’로 기재되어 있다. 소 요시토시(宗義智, 1568~1615)이다. 바로가기
  • 각주 021)
    원문에는 ‘豐臣行長’으로 기재돼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지칭한다. 바로가기
  • 각주 022)
    양방형의 게첩을 요약한 기사는 『선조실록』에 실려 있다. 『宣祖實錄』 卷75, 宣祖 29年 5月 丙申(30日). 원문의 기사에서 『선조실록』의 요약본을 더욱 요약했다. 생략된 내용은 중국의 고사이며, 이를 통해 배신을 수행하게 하는 것이 일본에 굽히는 것이 아님을 주장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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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天使) 양방형(楊方亨)이 바다 건너 일본에 가는 과정을 알리는 조선국왕의 주문(奏文) 자료번호 : sdmg.k_0004_00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