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사대문궤

왜적의 공격 사실과 천조(天朝)의 군대를 살해하고 약탈한 사실 등을 조사한 내용에 관한 조선국왕의 회자(回咨)

22. 回咨
  • 발신자
    조선국왕
  • 발송일
    1594년 2월 20일(음)(만력 22년 2월 20일)
발신: 조선국왕
사유: 보내온 자문을 받으니, 「운운」 했습니다.
 
[조선국왕] 이를 받고 조사해 보건대, 앞서 전사(前事)주 001
각주 001)
앞 21번 문서의 사안인 ‘增載海防勅諭以專責成事’를 가리킨다.
닫기
에 관한 귀사(貴司)의 자문을 받았습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순무(巡撫) 아문에서 이미 칙유(勅諭)를 받들어 비왜(備倭) 군무를 겸하여 관할하게 되었으니 소방(小邦)의 성식 일체를 이치상 마땅히 하나하나 조사해서 사안별 개요를 보고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변정(邊情)을 회자(回咨)에 열거하였으나, 곧이어 상세하지 못하여 아마도 제주(題奏)하는 데 방애가 된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반적으로, 배신(陪臣)인 제도도순찰사(諸道都巡察使) 권율(權慄) 등 관원들의 원래 장계 내용에서 전후 보고해 온 바의 긴급한 적정(賊情)을 명백하게 조사해 내어서 경략(經略)‧제독(提督) 및 순무‧순안(巡按)‧진수총병(鎭守總兵)‧포정사사(布政使司) 등 각 해당 아문으로 나누어 보고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통사 임춘발(林春發)‧이해륭(李海隆), 배신 이정형(李廷馨)‧고잉서(高仍恕) 등을 파견하여 잇따라서 정(呈)을 가지고 밤을 새워 달려가게 했습니다. 이렇게 조치한 후 지금 보내온 자문을 받고서 언급된 적정을 살펴보건대, 비록 차례대로 명백히 조사하여 자문으로 보고했지만, 순무아문이 아직 접해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부총병(副緫兵) 유정(劉綎)과 갑자기 회동하기 어려운 것 외에도, 지금 다시 갖추어 조사하여 열거합니다. 경상우도수군절도사(慶尙右道水軍節度使) 원균(元均)이 치계(馳啓)했습니다.
[원균] 본년 8월 16일에 받은 주회인 제만춘(諸萬春)이 공술한 내용입니다.
[제만춘] 본년 4월에 왜적에게 사로잡혀서 대마도(對馬島) 동쪽 3일거리에 있는 나고야 지역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는 왜적의 추장인 히데요시(秀吉)가 있는데 스스로를 태합[大閤]주 002
각주 002)
원문은 ‘대합(大閤)’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들 히데쓰구(秀次)에게 관백의 직함을 넘겨준 뒤 스스로 이와 같은 호칭을 사용하면서 나고야성에 머물렀다.
닫기
이라고 칭하고, 거느린 병력이 20만 명이라면서 그 지역에 대규모의 진영을 세워 두고 있었습니다. 이어서 김해(金海)‧울산(蔚山)‧양산(梁山)‧동래(東萊)‧기장(機張)‧웅천(熊川)‧우수영(右水營)‧부산포(釜山浦)‧영등포(永登浦)‧제포(薺浦) 등처에 성을 쌓고 가옥을 지었으며 그 나라의 군량과 병기를 옮겨다 두고 오래 머물고자 했습니다. 7월에 이르러, 히데요시가 내년 3월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그의 장자로 하여금 그 대신 관백(關白)이라는 호칭을 대신 맡아서 본영에 머무르게 하고 (자신은) 여러 추장을 호령하여 상국(上國) 지방으로 진격하여 공격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선국왕] 또 제도도순찰사 권율이 치계했습니다.
[권율] 본년 11월 초5일에 받은 좌도조방장(左道助防將) 홍계남(洪季男)이 올린 비보(飛報)입니다.
[홍계남] 본월 초2일에 대규모의 왜적이 양산군의 치소(治所)로부터 진입하여 경주부(慶州府)를 지나 천병(天兵)의 영채 뒤로 돌아 나와서 본부(本府)의 안강현(安康縣) 등처에 이르러 크게 살략을 자행했습니다. 그리고 천조의 군대와 교전하여 천조의 병사 223명이 왜적에게 살해되었습니다. 좌도의 원래 운반하던 군량 800여 석이 아울러 창탈되었습니다. 본국의 군병이 돌진하여 쏘아 대고 베며 사로잡혀 간 남녀 125명을 탈환했습니다.
[조선국왕] 또 본관이 치계했습니다.
[권율] 본월 초9일에 받은 주회인 원임 주부(主簿) 윤옥(尹沃)이 아뢰었습니다.
[윤옥] 본년 11월 12일, 제가 병사를 거느리고 양산군(梁山郡) 이천산(梨川山) 지역에 매복하고 있다가 왜적 200여 명이 뜻밖에 돌진해 와 저를 붙잡아서 임랑포(林郞浦)의 적 진영으로 데려갔습니다. 머문 지 3일이 지나자 비로소 놓아주었습니다. 제가 왜적의 형세를 정탐하고자 또다시 서생포(西生浦) 등처로 가서 보니 연해 일대에 주둔하는 왜적의 무리가 2만여 명이었습니다. 그 나라에서부터 운반해 놓은 군량은 동래에 3만여 석, 부산에 5만여 석, 좌수영(左水營)에 3백여 석이 있었는데 각각 창고를 설치하여 산더미처럼 쌓아 두고 지키고 있었습니다.
[조선국왕] 갖춘 바가 모두 진실된 첩보로 특별히 믿지 못할 내용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작년 6월 이후 각각의 적정(賊情)을 이미 차례대로 경략(經略)‧제독(提督)에게 갖추어 보고했습니다. 그때는 구원을 바라는 마음이 날로 급해졌으나 도로가 막혀서 어떤 경우는 보고가 차례대로 도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군사의 기밀은 진퇴의 여부를 비밀리에 함을 숭상하니, 당직이 더욱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부총병 유정의 경우에는 바야흐로 경상도 지역에 주둔하고 있으므로 무릇 보고 들은 것에 대한 것이라면 이치상 응당 베껴서 보고했을 것이며 어찌 소홀하거나 빠뜨림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그 왜적들을 살펴보면, 오직 물러나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악행이 날로 심해져서 한편으로는 봉공을 청하면서 우리의 준비를 이완시키려 하고, 한편으로는 배를 지킨다고 핑계하며 전라도로 가고자 합니다. 전라도는 실로 남쪽 끝의 거방(巨防)주 003
각주 003)
전국시대(戰國時代) 제(齊)나라의 성으로 만리장성의 일부가 되었다. 중요한 관방, 특히 해안을 따라 설치된 관방을 의미한다.
닫기
으로 홀로 흉적의 예봉을 면하여 그들이 늘 침 흘리며 탐내던 곳으로서 연달아 청무인(聽撫人)들이 말한 바에서도 나왔으니 과연 침범하려는 계책이 드러난 것입니다. 전라도까지 함락시켜 군량과 기계를 모두 얻게 된다면 미치는 바에 이르지 못할 곳이 하나도 없다고 성언(聲言)하니 실로 걱정스럽고 절박합니다. 번거롭더라도 귀사에 바라건대, 이러한 사의(事意)를 속히 정(呈)으로 보고하여 급히 아침저녁을 장담할 수
없는 목숨을 구하고 이로써 번리(藩籬)가 의지할 곳을 존속시켜 준다면 더 없는 다행일 것입니다. 이에 마땅히 회자하니, 청컨대 살펴 주십시오. 자문이 잘 도착하기를 바랍니다.
이 자문을 요동도지휘사사에 보냅니다.
 
만력 22년 2월 20일.

  • 각주 001)
    앞 21번 문서의 사안인 ‘增載海防勅諭以專責成事’를 가리킨다. 바로가기
  • 각주 002)
    원문은 ‘대합(大閤)’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들 히데쓰구(秀次)에게 관백의 직함을 넘겨준 뒤 스스로 이와 같은 호칭을 사용하면서 나고야성에 머물렀다. 바로가기
  • 각주 003)
    전국시대(戰國時代) 제(齊)나라의 성으로 만리장성의 일부가 되었다. 중요한 관방, 특히 해안을 따라 설치된 관방을 의미한다. 바로가기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왜적의 공격 사실과 천조(天朝)의 군대를 살해하고 약탈한 사실 등을 조사한 내용에 관한 조선국왕의 회자(回咨) 자료번호 : sdmg.k_0002_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