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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문궤

왕사(王師)가 평양을 회복하였으니 선왕의 기업을 유지하라며 명나라 송응창(宋應昌)이 조선국왕에게 보내는 자문(咨文)

27. 經略請國王進駐平壤
  • 발신자
    흠차경략계료산동등처방해어왜군무병부우시랑 송(宋)
  • 발송일
    1593년 1월 24일(음)(만력 21년 1월 24일)
발신: 흠차경략계료산동등처방해어왜군무병부우시랑 송(宋)
사유: 천토(天討)를 시행하여 평양이 회복되었음을 마땅히 국왕에게 알리니, 마음을 가다듬고 지킴으로써 구업(舊業)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왜노가 난리를 일으킨 뒤 본국의 삼한, 팔도를 탈취하고 점거하였는데 왜인들에게 들어가지 않은 것은 숙녕(肅寧)주 001
각주 001)
조선시대 평안도 숙천(肅川)에 위치했다. 평안도 관할 13관(館)의 하나인 숙녕관(肅寧館)이 숙천에 설치되었으며 숙녕역(肅寧驛)도 주요 역도의 일부였다. 선조 26년(1593) 초부터 명군의 여러 주둔지 가운데 하나였으며, 그해 2~6월에는 의주까지 파천했던 선조가 영유에 행궁(行宮)을 두고 숙천과 안주 등지를 행행했으며, 6월 말에 이르러 강서현의 행궁으로 이동했다. 그 사이에 선조는 종종 숙녕관에서 명의 장수와 관원들을 접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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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터 의주(義州)에 이르는 수백 리뿐이었습니다. 천조(天朝)에서는 국왕이 대대로 충정(忠貞)을 돈독히 해온 점과 애처로운 간청이 심히 간절함을 생각하여 특별히 대군을 내어 구원하였습니다. 왕사(王師)를 한 번 움직여 수많은 참획을 얻고 하루 만에 평양을 회복하였으니, 이는 실로 우리 성천자(聖天子)의 신묘한 무공이 널리 퍼지고 천위가 빛났기에 가능했습니다. 돌아보건대, 평양은 본국의 중진(重鎭)으로 번성한 지역이니 마땅히 수비 태세를 정돈하여 구업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에 제(題)를 갖추어 성지(聖旨)를 청하여 선유하게 하는 것 외에도, 마땅히 먼저 자문으로 국왕께 청하오니 곧바로 군민(軍民)을 독려하여 이끌고 평양에 가서 좌진(坐鎭)하며 지키십시오. 왕께서는 오늘날 강산을 잃었다가 다시 찾으셨으니 선왕의 기업이 다행히 유지되었음을 생각하여 국운의 어려움에 조심히 삼가고 새로이 고치는 다스림에 마음을 다하여, 여러 신하들을 적소에 배치하고 호걸들을 불러모으며 장수를 뽑아 군사를 훈련시키고, 양곡과 무기를 저축하며 성지를 수리하고 험한 곳을 파수하며 질고를 어루만져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안심시키십시오. 동시에 시급히 인부․수레․말을 보내어 의주에서부터 왕경까지 중국과 왕의 나라의 군량(粮料)을 운반함으로써 왕경으로 진공하는 대군이 쓰기 편하도록 하십시오. 이는 매우 긴요한 것이니 한시 한때라도 늦출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어서 팔도의 군병들을 불러와 협조하게 하면 왜노에게 승승장구하여 모두 제거하고, 한 번의 진격으로 왕경을 수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께서는 힘쓰기를 게을리하지 마십시오. 자문이 잘 도착하기를 바랍니다.
이 자문을 조선국왕에게 보냅니다.
 
만력 21년 1월 24일.

  • 각주 001)
    조선시대 평안도 숙천(肅川)에 위치했다. 평안도 관할 13관(館)의 하나인 숙녕관(肅寧館)이 숙천에 설치되었으며 숙녕역(肅寧驛)도 주요 역도의 일부였다. 선조 26년(1593) 초부터 명군의 여러 주둔지 가운데 하나였으며, 그해 2~6월에는 의주까지 파천했던 선조가 영유에 행궁(行宮)을 두고 숙천과 안주 등지를 행행했으며, 6월 말에 이르러 강서현의 행궁으로 이동했다. 그 사이에 선조는 종종 숙녕관에서 명의 장수와 관원들을 접견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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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사(王師)가 평양을 회복하였으니 선왕의 기업을 유지하라며 명나라 송응창(宋應昌)이 조선국왕에게 보내는 자문(咨文) 자료번호 : sdmg.k_0001_02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