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에서 군군(軍君:곤지)을 보냄
여름 4월주 001에 백제의 가수리군(加須利君)
주 002[개로왕(蓋鹵王)이다.]은 지진원(池津媛)
주 003을 불태워 죽였다는 소문을 듣고[적계녀랑(適稽女郞)이다.] “과거에 여인을 바쳐 채녀로 삼았다. 그런데 이미 예의를 잃어서 우리나라의 이름을 실추시켰다. 앞으로는 여인을 바치지 말라.”고 의논하였다. 이에 그 아우 군군(軍君)
주 004[곤지(昆支)
주 005
번역주 005)
이다.]에게 “너는 마땅히 일본으로 가서 천황을 섬기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군군은 “왕주 006의 명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원컨대 왕의 부인주 007을 내려주신다면 명을 받들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가수리군은 임신한 부인을 군군에게 주면서 “나의 임신한 부인은 이미 산달이 되었다. 만일 가는 길에 출산하면, 바라건대 어디에 있든지 배 한 척에 실어 속히 본국으로 돌려보내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이윽고 작별하여 왜의 조정으로 갔다. 『宋書』 夷蠻傳 百濟條에 보이는 征虜將軍 餘昆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文周王 3년조와 동성왕 즉위조에서 문주왕의 동생이자 개로왕의 아들로 나오고 있어, 개로왕의 동생으로 나오는 『日本書紀』와 다르다. 『新撰姓氏錄』에서도 河內諸蕃의 飛鳥部造가 百濟比有王의 아들 琨伎王의 후손이라고 적고 있어 『日本書紀』의 설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수 있다. 『日本書紀』에서는 곤지가 백제로 돌아간 것은 기록하지 않았으나 『삼국사기』 백제본기 文周王 3년(477) 4월조에서 왕의 아우 昆支를 내좌평으로 삼은 사실과 동 7월조에 곤지가 죽은 사실이 보이므로 477년 이전에 귀국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곤지가 왜국에 살면서 낳은 자식은 그가 귀국한 후에도 계속 왜국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중에서 동성왕은 479년에 삼근왕(재위:477~479)의 사망 후에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다. 『三代實錄』 貞觀 4년 7월조와 동 5년 8월조에 곤지는 飛鳥戶造 등의 조상이라고 되어 있다. 이처럼 일본에는 곤지왕을 시조로 하는 飛鳥戶造라는 씨족이 있었고, 현재까지 곤지를 모시는 飛鳥戶造신사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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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書』 夷蠻傳 百濟條에 보이는 征虜將軍 餘昆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文周王 3년조와 동성왕 즉위조에서 문주왕의 동생이자 개로왕의 아들로 나오고 있어, 개로왕의 동생으로 나오는 『日本書紀』와 다르다. 『新撰姓氏錄』에서도 河內諸蕃의 飛鳥部造가 百濟比有王의 아들 琨伎王의 후손이라고 적고 있어 『日本書紀』의 설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수 있다. 『日本書紀』에서는 곤지가 백제로 돌아간 것은 기록하지 않았으나 『삼국사기』 백제본기 文周王 3년(477) 4월조에서 왕의 아우 昆支를 내좌평으로 삼은 사실과 동 7월조에 곤지가 죽은 사실이 보이므로 477년 이전에 귀국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곤지가 왜국에 살면서 낳은 자식은 그가 귀국한 후에도 계속 왜국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중에서 동성왕은 479년에 삼근왕(재위:477~479)의 사망 후에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다. 『三代實錄』 貞觀 4년 7월조와 동 5년 8월조에 곤지는 飛鳥戶造 등의 조상이라고 되어 있다. 이처럼 일본에는 곤지왕을 시조로 하는 飛鳥戶造라는 씨족이 있었고, 현재까지 곤지를 모시는 飛鳥戶造신사가 남아 있다.
- 번역주 006)
- 번역주 007)
색인어
- 이름
- 가수리군(加須利君), 개로왕(蓋鹵王), 지진원(池津媛), 적계녀랑(適稽女郞), 군군(軍君), 곤지(昆支), 군군, 가수리군, 군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