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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백제의 직지왕이 죽고 구이신이 왕위에 오름

25년에 백제의 직지왕이 죽었다(薨)주 001
번역주 001)
백제 直支王(腆支王)의 사망 시기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腆支王 16년(420)이다. 『日本書紀』 응신천황 25년은 『日本書紀』 기년으로 294년이며, 수정연대로 계산하면 414년이 된다. 『삼국사기』와는 6년의 차이가 난다. 한편 『宋書』 卷97 列傳 百濟國條에 의하면 景平 2年(424)에 餘映이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되어 있어 424년에도 전지왕은 생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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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아들 구이신(久爾辛)주 002
번역주 002)
腆支王의 아들로 백제 제19대 왕인 久爾辛王(재위:420~427)이다. 『三國史記』에서는 420년에 전지왕이 사망하고 구이신왕이 즉위하였다고 하는데, 『日本書紀』에서는 414년에 전지왕이 사망하고 구이신왕이 즉위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宋書』 列傳 百濟國條에는 구이신왕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고, 餘映(腆支王)이 416년(義熙 12)에 동진으로부터 백제왕으로 책봉받았고, 또 424년(景平 2)에 동진에 사신을 파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 측 사서에서 전지왕이 424년까지 조공하였다는 기록에 주목하여 구이신왕의 재위 기간을 424년에서 427년까지로 보는 견해와 중국 측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하여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420~427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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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이 어려 대왜(大倭)의 목만치(木滿致)주 003
번역주 003)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개로왕 21년조(475)에 한성이 멸망할 때 문주왕과 함께 웅진으로 남하한 인물인 木刕滿致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日本書紀』 신공황후 섭정 49년(369) 3월조에 인용된 『백제기』에 의하면 木羅斤資가 신라를 공격할 때 신라의 여인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목만치를 낳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목만치의 출생은 신공황후 섭정 49년(369) 3월 이후의 어느 시기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두 기록을 결합하여 목만치의 생존연대를 헤아려보면 木滿致는 100세 이상이 되어 버린다. 『삼국사기』에서 목협만치가 5세기 후반에도 왕성하게 활동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하면 『日本書紀』 신공기의 목라근자와 응신기의 목만치의 활동 연대가 부자연스럽게 된다. 그래서 『日本書紀』 신공기 및 응신기의 목씨 부자 관련 기사를 일반적인 간지 조정법인 2간지가 아닌 3간지를 내려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日本書紀』의 목씨 부자 관련기사를 3간지 내리면 『日本書紀』의 목만치 기사와 『삼국사기』의 목협만치 관련 기사 사이에 생기는 모순을 해결할 수 있지만, 목만치는 구이신왕대의 사람이 될 수 없다. 한편 목만치와 목협만치는 동명이인으로 활동한 시기가 다르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는 비류왕대의 병관좌평인 解仇와 문주왕대의 병관좌평 解仇 등 백제사에서 동명이인의 경우가 종종 나온다는 것을 근거로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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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국정을 잡았다. 아울러 왕모(王母)와 밀통하여 무례한 행위를 많이 저질렀다. 천황은 이를 듣고 소환하였다[『백제기』에서는 “木滿致목라근자가 신라를 정벌할 때 그 나라 부인을얻어서 낳은 자식이다. 아버지의 공적으로 임나주 004
번역주 004)
『日本書紀』에 나오는 ‘任那’는 가야지역 전체 경우와 특정지역을 가리키는 경우가 있다. 한국 사료에서는 任那加羅, 任那加良이 보이는데, 가야지역 전체를 ‘任那’로 적은 경우는 없다. 『日本書紀』 숭신천황 65년 7월조 任那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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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전횡을 하다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귀국(貴國)주 005
번역주 005)
『日本書紀』 신공황후 섭정 46년 춘3월조 貴國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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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왕래하였다. 천조(天朝)주 006
번역주 006)
大和정권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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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명령을 받아서 우리나라의 정사를 장악하고 권세를 세상에 떨쳤다. 그러나 천조가 그 포악함을 듣고서 소환하였다.”고 한다.].

  • 번역주 001)
    백제 直支王(腆支王)의 사망 시기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腆支王 16년(420)이다. 『日本書紀』 응신천황 25년은 『日本書紀』 기년으로 294년이며, 수정연대로 계산하면 414년이 된다. 『삼국사기』와는 6년의 차이가 난다. 한편 『宋書』 卷97 列傳 百濟國條에 의하면 景平 2年(424)에 餘映이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되어 있어 424년에도 전지왕은 생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2)
    腆支王의 아들로 백제 제19대 왕인 久爾辛王(재위:420~427)이다. 『三國史記』에서는 420년에 전지왕이 사망하고 구이신왕이 즉위하였다고 하는데, 『日本書紀』에서는 414년에 전지왕이 사망하고 구이신왕이 즉위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宋書』 列傳 百濟國條에는 구이신왕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고, 餘映(腆支王)이 416년(義熙 12)에 동진으로부터 백제왕으로 책봉받았고, 또 424년(景平 2)에 동진에 사신을 파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 측 사서에서 전지왕이 424년까지 조공하였다는 기록에 주목하여 구이신왕의 재위 기간을 424년에서 427년까지로 보는 견해와 중국 측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하여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420~427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3)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개로왕 21년조(475)에 한성이 멸망할 때 문주왕과 함께 웅진으로 남하한 인물인 木刕滿致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日本書紀』 신공황후 섭정 49년(369) 3월조에 인용된 『백제기』에 의하면 木羅斤資가 신라를 공격할 때 신라의 여인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목만치를 낳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목만치의 출생은 신공황후 섭정 49년(369) 3월 이후의 어느 시기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두 기록을 결합하여 목만치의 생존연대를 헤아려보면 木滿致는 100세 이상이 되어 버린다. 『삼국사기』에서 목협만치가 5세기 후반에도 왕성하게 활동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하면 『日本書紀』 신공기의 목라근자와 응신기의 목만치의 활동 연대가 부자연스럽게 된다. 그래서 『日本書紀』 신공기 및 응신기의 목씨 부자 관련 기사를 일반적인 간지 조정법인 2간지가 아닌 3간지를 내려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日本書紀』의 목씨 부자 관련기사를 3간지 내리면 『日本書紀』의 목만치 기사와 『삼국사기』의 목협만치 관련 기사 사이에 생기는 모순을 해결할 수 있지만, 목만치는 구이신왕대의 사람이 될 수 없다. 한편 목만치와 목협만치는 동명이인으로 활동한 시기가 다르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는 비류왕대의 병관좌평인 解仇와 문주왕대의 병관좌평 解仇 등 백제사에서 동명이인의 경우가 종종 나온다는 것을 근거로 들고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4)
    『日本書紀』에 나오는 ‘任那’는 가야지역 전체 경우와 특정지역을 가리키는 경우가 있다. 한국 사료에서는 任那加羅, 任那加良이 보이는데, 가야지역 전체를 ‘任那’로 적은 경우는 없다. 『日本書紀』 숭신천황 65년 7월조 任那 참조.바로가기
  • 번역주 005)
    『日本書紀』 신공황후 섭정 46년 춘3월조 貴國 참조.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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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직지왕, 구이신, 목만치, 木滿致, 목라근자
서명
백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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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직지왕이 죽고 구이신이 왕위에 오름 자료번호 : ns.k_0018_0180_001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