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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한일관계 사료집

에도 동행을 명령한 번주의 의도와 상황 변화

一. 저의 동행을 명하신 [前 번주님의] 의도는 이번 사건을 막부에 보고한 뒤 새로운 사자를 도해시키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시어, 저를 데려가 막부에 보고할 때 출석할 가로(家老)주 001
각주 001)
"본문의 표기는 ‘도시요리(年寄)’이나, 이하 ‘가로’로 해석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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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과 동행시키기 위해서라고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에도의 정황이 어떻게 바뀔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4월 9일 저를 처음으로 부르셨을 때 요자에몬(與左衛門)주 002
각주 002)
"요자에몬(與左衛門) : 쓰시마번 가로 다다 요자에몬(多田與左衛門, ?~1697)으로 「覺書」에 따르면 본명은 사네마사(眞昌)이나, 조선의 사료에서는 다치바나 사네시게(橘眞重)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안용복의 피랍 이후 막부가 죽도에 조선인의 도해를 금해 줄 것을 조선에 통보하라는 지시를 쓰시마에 내리자 이를 전하기 위해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회답 서계에 ‘우리나라의 경계인 울릉도(弊境之鬱陵島)’라는 내용이 적혀 있어 이를 부적절한 내용이라 하며 수정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일시 귀국했다.
이후 서계의 내용 수정을 위해 재차 도일해 수정한 회답 서계를 수령했지만, 그 내용은 ‘죽도와 울릉도는 하나의 섬이자 조선 땅이므로 조선인의 도해 금지를 요구하는 것은 양국의 성신에 어긋난다’는 내용이었다. 더욱이 먼저 서계의 초본을 확인한 뒤 내용의 조정을 거치던 전례와는 달리, 구두로만 전달된 채 사전 개봉하지 말고 그대로 서계를 수령해 가라는 대답을 들었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다다는 요시자네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았으며 회답 서계의 초본을 수령해 오기 전에는 귀국을 금지한다는 지시를 받았다.
이후 다다는 새로운 회답 서계의 내용에 관하여 요시자네가 의문스럽게 생각하는 점에 관해 대답을 들은 뒤 귀국하도록 지시 받았으며, 요시자네가 보낸 의문사항을 바탕으로 일명 ‘4개조의 항의문’을 작성해 조선 측에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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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을 불러 일 처리에 대해 의논하고,주 003
각주 003)
"본 사료, 즉 스야마와 가시마가 편지를 주고받은 시기는 1695년이나, 동년 4월에 다다는 이미 회답 서계 수정을 요청하기 위해 재차 조선에 도해해 있었다. 따라서 이하 등장하는 4월의 시점은 다다가 일시 귀국한 뒤 쓰시마에 체류 중인 시기, 즉 가시마와 스야마가 서한을 주고받기 1년 전인 1694년으로 보인다.(池內敏, 「竹島一件の再檢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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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두세 차례 참석해 요자에몬님도 함께한 의논이 어느 정도 끝나자 이 사건에 대한 의견을 거리낌 없이 아뢰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4월 15일에 “이 일의 전말을 막부에 아뢰어 조선의 일을 마무리 짓도록 하는 것이 첫 번째 방책입니다. 일의 전체를 아뢰는 것을 꺼리셔서 사전에 보고해야 했음에도 두 번이나 빠뜨린 것은 우려할 만하지만, 이러한 조치가 잘못이 아니라고 막부가 판단하게 할 수 있는 생각이 여러모로 있어서 이를 적어 올리겠습니다.
보시고 해답을 얻으셨다 생각되시면 우선 막부와의 사안을 마무리 지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두 번째 방책은 저를 조선으로 보내어 요자에몬님을 귀국시키지 않고 요자에몬님을 통해 이 사건을 마무리 지었으면 합니다. 조선에서 일본과 절교하겠다는 생각만 하지 않으면 우리가 문제를 제기해 막부에 올릴 수 있을 정도의 회답 서계로 필시 고쳐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만약 조선 측이 분별없이 고쳐주지 않으면, 요자에몬님은 숙배소(肅拜所)주 004
각주 004)
"숙배소(肅拜所) : 왜관 바깥에 세워진 연향대청(宴享大廳)에 속한 건물로, 외대청(外大廳)이라고도 불렀다. 숙배소에는 조선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가 세워져 있었다. 조선 후기, 왜관에 도착한 쓰시마의 사신들은 한양에 상경할 수 없었으므로 숙배소에 안치된 전패를 향해 절하는 것으로 조선국왕에 대한 진하를 대신했다. 이 의례를 봉진연(封進宴)이라고 한다.(田代和生, 『新・倭館–鎖國時代の日本人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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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근에서 할복해야 하며, 저도 요자에몬님에게 자문하기 위해 도해한 이상 요자에몬님과 함께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한 뒤에 현재의 회답 서계를 막부에 올려 막부의 신임을 잃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주 005
각주 005)
"스야마의 두 번째 방책은 ‘사신인 다다 요자에몬이 조선에게 답서를 수정해 달라고 청원하여도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다다가 자신의 억울함을 증명하고자 할복한 뒤 이러한 상황을 전면에 내세워 사건의 책임은 조선 측에 있으며 쓰시마번은 무고하다’는 점을 막부에 탄원하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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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자세한 내용을 하나하나 아뢰었으며, 다음 날인 16일에도 앞서 언급한 첫 번째 방책으로 부디 결단하시게끔
적극 말씀드렸지만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글로는 설명하기 어렵고 복잡한 사정이 많습니다. 대체적인 내용만 말씀드려서는 이해하지 못하시리라 여겨지지만, 적어도 이 정도라도 말씀드리는 것이 옳다고 여겨 이렇게 적습니다. 일전에 조선에서 돌아온 이후주 006
각주 006)
"이 시점은 앞의 내용과는 달리, 재차 조선에 건너간 다다의 교섭을 지원하기 위해 스야마가 도해한 뒤, 함께 귀국한 1695년 6월 17일 이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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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첫 번째 방책을 말씀드렸더니, 아뢰고자 하는 취지를 적어서 올리라고 분부하시고 가와치 마스에몬(河內益右衛門)님을 서기로 붙여주셔서, 수일간 저희 집에 와 글의 초고를 어제 완성했습니다. 우네메님의 도해가 연기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저의 에도행이 결정되었다는 사실 등이 그간의 경위입니다.

  • 각주 001)
    "본문의 표기는 ‘도시요리(年寄)’이나, 이하 ‘가로’로 해석하겠다. 바로가기
  • 각주 002)
    "요자에몬(與左衛門) : 쓰시마번 가로 다다 요자에몬(多田與左衛門, ?~1697)으로 「覺書」에 따르면 본명은 사네마사(眞昌)이나, 조선의 사료에서는 다치바나 사네시게(橘眞重)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안용복의 피랍 이후 막부가 죽도에 조선인의 도해를 금해 줄 것을 조선에 통보하라는 지시를 쓰시마에 내리자 이를 전하기 위해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회답 서계에 ‘우리나라의 경계인 울릉도(弊境之鬱陵島)’라는 내용이 적혀 있어 이를 부적절한 내용이라 하며 수정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일시 귀국했다.
    이후 서계의 내용 수정을 위해 재차 도일해 수정한 회답 서계를 수령했지만, 그 내용은 ‘죽도와 울릉도는 하나의 섬이자 조선 땅이므로 조선인의 도해 금지를 요구하는 것은 양국의 성신에 어긋난다’는 내용이었다. 더욱이 먼저 서계의 초본을 확인한 뒤 내용의 조정을 거치던 전례와는 달리, 구두로만 전달된 채 사전 개봉하지 말고 그대로 서계를 수령해 가라는 대답을 들었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다다는 요시자네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았으며 회답 서계의 초본을 수령해 오기 전에는 귀국을 금지한다는 지시를 받았다.
    이후 다다는 새로운 회답 서계의 내용에 관하여 요시자네가 의문스럽게 생각하는 점에 관해 대답을 들은 뒤 귀국하도록 지시 받았으며, 요시자네가 보낸 의문사항을 바탕으로 일명 ‘4개조의 항의문’을 작성해 조선 측에 제출했다. 바로가기
  • 각주 003)
    "본 사료, 즉 스야마와 가시마가 편지를 주고받은 시기는 1695년이나, 동년 4월에 다다는 이미 회답 서계 수정을 요청하기 위해 재차 조선에 도해해 있었다. 따라서 이하 등장하는 4월의 시점은 다다가 일시 귀국한 뒤 쓰시마에 체류 중인 시기, 즉 가시마와 스야마가 서한을 주고받기 1년 전인 1694년으로 보인다.(池內敏, 「竹島一件の再檢討」) 바로가기
  • 각주 004)
    "숙배소(肅拜所) : 왜관 바깥에 세워진 연향대청(宴享大廳)에 속한 건물로, 외대청(外大廳)이라고도 불렀다. 숙배소에는 조선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가 세워져 있었다. 조선 후기, 왜관에 도착한 쓰시마의 사신들은 한양에 상경할 수 없었으므로 숙배소에 안치된 전패를 향해 절하는 것으로 조선국왕에 대한 진하를 대신했다. 이 의례를 봉진연(封進宴)이라고 한다.(田代和生, 『新・倭館–鎖國時代の日本人町–』) 바로가기
  • 각주 005)
    "스야마의 두 번째 방책은 ‘사신인 다다 요자에몬이 조선에게 답서를 수정해 달라고 청원하여도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다다가 자신의 억울함을 증명하고자 할복한 뒤 이러한 상황을 전면에 내세워 사건의 책임은 조선 측에 있으며 쓰시마번은 무고하다’는 점을 막부에 탄원하자는 것이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6)
    "이 시점은 앞의 내용과는 달리, 재차 조선에 건너간 다다의 교섭을 지원하기 위해 스야마가 도해한 뒤, 함께 귀국한 1695년 6월 17일 이후이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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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동행을 명령한 번주의 의도와 상황 변화 자료번호 : kn.k_0003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