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중국정사외국전

달단(達靼)의 유래·풍속 및 방훈(龐勛)·황소(黃巢)를 토벌한 공에 대한 설명

  • 국가
    달단(達靼)
달단(達靼) 주 001
각주 001)
達靼: 韃靼·達怛·達旦·達達·塔塔爾·塔坦 등으로 지칭된다. 族源은 靺鞨이며, 唐代부터 기록이 보이는데 “三十姓達靼”, “九姓達靼”으로 되어 있다. 突厥의 동쪽, 契丹의 북쪽에 분포하였고, 돌궐의 통치를 받았다. 돌궐이 쇠약해지자 回鶻·黠戛斯 등에게 나누어 복속되었다. 唐末五代 시기 음산지역에 거주하던 무리들이 後唐·後漢·後周에 조공하여 중원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닫기
말갈(靺鞨) 주 002
각주 002)
靺鞨: 隋唐時代 滿州와 韓半島 북부에 거주했던 퉁구스계 주민들을 통칭하는 명칭이다. 지역에 따라 수렵, 목축, 반농반목, 농경 등 다양한 생활양식을 보여주었다. 周代에 肅愼, 漢代에 挹婁라 불리는 집단과 연계된 것으로 보인다. 松花江 유역의 勿吉이 지배하였으나 6세기 중엽 勿吉의 세력이 약화되자 각 부족들이 자립하였는데, 이들을 총칭하여 靺鞨이라고 중국에서 기록하였다. 이후 高句麗, 渤海 등에 복속 했었으며, 그 이후 遼代에는 女眞이라 불렸다가 청나라 때에는 滿州라 불린 집단과 연결된다.
닫기
의 유종(遺種)으로 본래 해(奚)거란(契丹)의 동북쪽에 [살고] 있었는데, 후에 거란의 공격을 받아 부족이 뿔뿔이 흩어져 혹은 거란에 복속하고, 혹은 발해(渤海)에 복속하였으며, 또 다른 부족으로 음산(陰山) 주 003
각주 003)
陰山: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중부에 위치한 산맥으로 大靑山이라 불리며 고비사막 남부에 있는 일련의 산지를 부르는 명칭이다.
닫기
에 흩어 살던 자들이 [있어] 스스로 달단이라 불렀다. 당말이 되어 [그] 이름이 중국[의 기록]에 보인다. 매상온(每相溫)우월상온(于越相溫)이 있었는데, 함통(咸通)(860~874) 중에 주야적심(朱邪赤心) 주 004
각주 004)
朱邪赤心(?~883): 沙陀部 首領. 朱耶赤心이라고도 한다. 字는 德興이고 李克用의 부친이다. 唐末 朔州刺史에 임명되어 龐勛起義를 진압하고 金吾上將軍에 임명되었으며 李國昌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후에 振武節度使에 임명되었다. 李克用이 太原에서 진수할 때 代北軍節度使가 되었고, 李存勗이 즉위하자 諡號는 文皇, 廟號는 獻祖로 추증되었다.
닫기
을 따라 방훈(龐勛)을 토벌하였다. 그 후 이국창(李國昌) 주 005
각주 005)
李國昌: 위의 朱邪赤心 참조.
닫기
·극용(克用) 주 006
각주 006)
李克用: 唐末 沙陀族 將領. 李鴉爾라고도 하며, 한쪽 눈을 실명하여 獨眼龍이라고도 불린다. 일찍이 부친 朱邪赤心을 따라 龐勛의 봉기 진압에 참여하였다. 僖宗 乾符 5년(878) 雲中兵變이 일어났을 때 이 기회를 이용하여 雲州防御使 段文楚를 살해하였다. 唐朝가 정벌에 나서자 부친과 함께 북쪽의 韃靼으로 도주하였다. 6년 黃巢軍이 장안을 공격하자 唐朝는 河東節度使 陳景思를 代北起軍使로 임명하고, 沙陀族 등 소수민족군대를 초모하였는데, 이때 李克用이 雁門節度使로 추천되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關中에 들어와 黃巢軍을 몰아내는데 공을 세워 河東節度使를 제수받고 隴西郡王에 책봉되었으며 檢校太師兼中書令의 직함도 받았다. 中和 4년(884) 군대를 이끌고 渡河하여 黃巢軍을 中牟(지금의 河南省 中牟)에서 대패시켰다. 唐 昭宗 乾寧 2년(895) 鳳翔 李茂貞, 邠州 王行瑜의 반란을 진압하고, 그 공으로 忠正平難功臣이 되었으며 晉王에 책봉되었다. 후에 河東에서 할거하며 汴州(지금의 河南省 開封)를 점거하던 朱溫과 오랫동안 대치하였다. 後梁 開平 2년(908) 병사하였다. 그의 아들 李存勗이 後梁을 멸하고 後唐을 세운 후 武帝로 追諡되었고, 廟號는 太祖이다.
닫기
부자가 [토혼의] 혁련탁(赫連鐸) 등에게 패배당하여 일찍이 달단으로 도망쳐 들어간 적이 있었다. 후에 [이]극용을 따라 입관하여 황소(黃巢) 주 007
각주 007)
黃巢(?~884): 唐末 농민봉기의 지도자. 曹州 冤句(지금의 山東省 菏澤 東南)人으로 소금밀매업에 종사했다. 唐 僖宗 乾符 2년(875) 王仙芝의 봉기에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5년 왕선지가 전사하자 그 잔당을 흡수하고, 沖天大將軍·王에 추대되었다. 군대를 이끌고 南征하여 江淮를 넘어 지금의 江西·浙江을 거쳐 福建으로 진입하여 廣州를 점령하였다. 廣明 원년(880) 북상하여 洛陽을 점령하고, 이어 長安에 들어와 즉위하여 국호를 大齊라 하였다. 唐朝는 中和 3년(883) 沙陀族의 도움을 받아 그를 장안에서 몰아냈고, 이듬해 황소는 泰山 狼虎谷에서 자살하였다.
닫기
를 격파하고 이로 인해 운주(雲州) 주 008
각주 008)
雲州: 唐 貞觀 14년(640)에 설치되었으며, 治所는 定襄縣(지금 山西省 大同市에 해당)에 있었다. 관할 구역은 지금의 山西省 長城 이남과 桑乾河 이북의 땅이었다. 永淳 元年(682) 廢置되었다가, 開元 18년(730) 다시 설치되었다. 治所는 雲中縣(지금 山西省 大同市)에 있었다. 天寶 元年(742) 雲中郡으로 바뀌었으며, 肅宗 乾元初 다시 雲州로 되었다.
닫기
대주(代州)의 사이에 살게 되었다. 그 풍속은 말 타면서 활쏘기를 잘하며 가축으로는 낙타와 말이 많다. 그 군장과 부족의 이름은 다 알아낼 수 없으나, 다만 일찍이 중국에 통교했던 자들로부터 [군장과 부족의 이름 일부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 각주 001)
    達靼: 韃靼·達怛·達旦·達達·塔塔爾·塔坦 등으로 지칭된다. 族源은 靺鞨이며, 唐代부터 기록이 보이는데 “三十姓達靼”, “九姓達靼”으로 되어 있다. 突厥의 동쪽, 契丹의 북쪽에 분포하였고, 돌궐의 통치를 받았다. 돌궐이 쇠약해지자 回鶻·黠戛斯 등에게 나누어 복속되었다. 唐末五代 시기 음산지역에 거주하던 무리들이 後唐·後漢·後周에 조공하여 중원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靺鞨: 隋唐時代 滿州와 韓半島 북부에 거주했던 퉁구스계 주민들을 통칭하는 명칭이다. 지역에 따라 수렵, 목축, 반농반목, 농경 등 다양한 생활양식을 보여주었다. 周代에 肅愼, 漢代에 挹婁라 불리는 집단과 연계된 것으로 보인다. 松花江 유역의 勿吉이 지배하였으나 6세기 중엽 勿吉의 세력이 약화되자 각 부족들이 자립하였는데, 이들을 총칭하여 靺鞨이라고 중국에서 기록하였다. 이후 高句麗, 渤海 등에 복속 했었으며, 그 이후 遼代에는 女眞이라 불렸다가 청나라 때에는 滿州라 불린 집단과 연결된다.  바로가기
  • 각주 003)
    陰山: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중부에 위치한 산맥으로 大靑山이라 불리며 고비사막 남부에 있는 일련의 산지를 부르는 명칭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4)
    朱邪赤心(?~883): 沙陀部 首領. 朱耶赤心이라고도 한다. 字는 德興이고 李克用의 부친이다. 唐末 朔州刺史에 임명되어 龐勛起義를 진압하고 金吾上將軍에 임명되었으며 李國昌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후에 振武節度使에 임명되었다. 李克用이 太原에서 진수할 때 代北軍節度使가 되었고, 李存勗이 즉위하자 諡號는 文皇, 廟號는 獻祖로 추증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5)
    李國昌: 위의 朱邪赤心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6)
    李克用: 唐末 沙陀族 將領. 李鴉爾라고도 하며, 한쪽 눈을 실명하여 獨眼龍이라고도 불린다. 일찍이 부친 朱邪赤心을 따라 龐勛의 봉기 진압에 참여하였다. 僖宗 乾符 5년(878) 雲中兵變이 일어났을 때 이 기회를 이용하여 雲州防御使 段文楚를 살해하였다. 唐朝가 정벌에 나서자 부친과 함께 북쪽의 韃靼으로 도주하였다. 6년 黃巢軍이 장안을 공격하자 唐朝는 河東節度使 陳景思를 代北起軍使로 임명하고, 沙陀族 등 소수민족군대를 초모하였는데, 이때 李克用이 雁門節度使로 추천되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關中에 들어와 黃巢軍을 몰아내는데 공을 세워 河東節度使를 제수받고 隴西郡王에 책봉되었으며 檢校太師兼中書令의 직함도 받았다. 中和 4년(884) 군대를 이끌고 渡河하여 黃巢軍을 中牟(지금의 河南省 中牟)에서 대패시켰다. 唐 昭宗 乾寧 2년(895) 鳳翔 李茂貞, 邠州 王行瑜의 반란을 진압하고, 그 공으로 忠正平難功臣이 되었으며 晉王에 책봉되었다. 후에 河東에서 할거하며 汴州(지금의 河南省 開封)를 점거하던 朱溫과 오랫동안 대치하였다. 後梁 開平 2년(908) 병사하였다. 그의 아들 李存勗이 後梁을 멸하고 後唐을 세운 후 武帝로 追諡되었고, 廟號는 太祖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7)
    黃巢(?~884): 唐末 농민봉기의 지도자. 曹州 冤句(지금의 山東省 菏澤 東南)人으로 소금밀매업에 종사했다. 唐 僖宗 乾符 2년(875) 王仙芝의 봉기에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5년 왕선지가 전사하자 그 잔당을 흡수하고, 沖天大將軍·王에 추대되었다. 군대를 이끌고 南征하여 江淮를 넘어 지금의 江西·浙江을 거쳐 福建으로 진입하여 廣州를 점령하였다. 廣明 원년(880) 북상하여 洛陽을 점령하고, 이어 長安에 들어와 즉위하여 국호를 大齊라 하였다. 唐朝는 中和 3년(883) 沙陀族의 도움을 받아 그를 장안에서 몰아냈고, 이듬해 황소는 泰山 狼虎谷에서 자살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8)
    雲州: 唐 貞觀 14년(640)에 설치되었으며, 治所는 定襄縣(지금 山西省 大同市에 해당)에 있었다. 관할 구역은 지금의 山西省 長城 이남과 桑乾河 이북의 땅이었다. 永淳 元年(682) 廢置되었다가, 開元 18년(730) 다시 설치되었다. 治所는 雲中縣(지금 山西省 大同市)에 있었다. 天寶 元年(742) 雲中郡으로 바뀌었으며, 肅宗 乾元初 다시 雲州로 되었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매상온(每相溫), 우월상온(于越相溫), 주야적심(朱邪赤心), 방훈(龐勛), 이국창(李國昌), 극용(克用), 혁련탁(赫連鐸), [이]극용, 황소(黃巢)
지명
달단(達靼), 말갈(靺鞨), 해(奚), 거란(契丹), 거란, 거란, 발해(渤海), 음산(陰山), 달단, 중국, 토혼, 달단, 운주(雲州), 대주(代州), 중국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달단(達靼)의 유래·풍속 및 방훈(龐勛)·황소(黃巢)를 토벌한 공에 대한 설명 자료번호 : jo.k_0019_0074_00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