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단(達靼)의 유래·풍속 및 방훈(龐勛)·황소(黃巢)를 토벌한 공에 대한 설명
달단(達靼)
주 001은 말갈(靺鞨)
주 002의 유종(遺種)으로 본래 해(奚)와 거란(契丹)의 동북쪽에 [살고] 있었는데, 후에 거란의 공격을 받아 부족이 뿔뿔이 흩어져 혹은 거란에 복속하고, 혹은 발해(渤海)에 복속하였으며, 또 다른 부족으로 음산(陰山)
주 003에 흩어 살던 자들이 [있어] 스스로 달단이라 불렀다. 당말이 되어 [그] 이름이 중국[의 기록]에 보인다. 매상온(每相溫)과 우월상온(于越相溫)이 있었는데, 함통(咸通)(860~874) 중에 주야적심(朱邪赤心)
주 004을 따라 방훈(龐勛)을 토벌하였다. 그 후 이국창(李國昌)
주 005·극용(克用)
주 006
각주 006)
부자가 [토혼의] 혁련탁(赫連鐸) 등에게 패배당하여 일찍이 달단으로 도망쳐 들어간 적이 있었다. 후에 [이]극용을 따라 입관하여 황소(黃巢)
주 007李克用: 唐末 沙陀族 將領. 李鴉爾라고도 하며, 한쪽 눈을 실명하여 獨眼龍이라고도 불린다. 일찍이 부친 朱邪赤心을 따라 龐勛의 봉기 진압에 참여하였다. 僖宗 乾符 5년(878) 雲中兵變이 일어났을 때 이 기회를 이용하여 雲州防御使 段文楚를 살해하였다. 唐朝가 정벌에 나서자 부친과 함께 북쪽의 韃靼으로 도주하였다. 6년 黃巢軍이 장안을 공격하자 唐朝는 河東節度使 陳景思를 代北起軍使로 임명하고, 沙陀族 등 소수민족군대를 초모하였는데, 이때 李克用이 雁門節度使로 추천되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關中에 들어와 黃巢軍을 몰아내는데 공을 세워 河東節度使를 제수받고 隴西郡王에 책봉되었으며 檢校太師兼中書令의 직함도 받았다. 中和 4년(884) 군대를 이끌고 渡河하여 黃巢軍을 中牟(지금의 河南省 中牟)에서 대패시켰다. 唐 昭宗 乾寧 2년(895) 鳳翔 李茂貞, 邠州 王行瑜의 반란을 진압하고, 그 공으로 忠正平難功臣이 되었으며 晉王에 책봉되었다. 후에 河東에서 할거하며 汴州(지금의 河南省 開封)를 점거하던 朱溫과 오랫동안 대치하였다. 後梁 開平 2년(908) 병사하였다. 그의 아들 李存勗이 後梁을 멸하고 後唐을 세운 후 武帝로 追諡되었고, 廟號는 太祖이다.
각주 007)
를 격파하고 이로 인해 운주(雲州)
주 008와 대주(代州)의 사이에 살게 되었다. 그 풍속은 말 타면서 활쏘기를 잘하며 가축으로는 낙타와 말이 많다. 그 군장과 부족의 이름은 다 알아낼 수 없으나, 다만 일찍이 중국에 통교했던 자들로부터 [군장과 부족의 이름 일부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黃巢(?~884): 唐末 농민봉기의 지도자. 曹州 冤句(지금의 山東省 菏澤 東南)人으로 소금밀매업에 종사했다. 唐 僖宗 乾符 2년(875) 王仙芝의 봉기에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5년 왕선지가 전사하자 그 잔당을 흡수하고, 沖天大將軍·王에 추대되었다. 군대를 이끌고 南征하여 江淮를 넘어 지금의 江西·浙江을 거쳐 福建으로 진입하여 廣州를 점령하였다. 廣明 원년(880) 북상하여 洛陽을 점령하고, 이어 長安에 들어와 즉위하여 국호를 大齊라 하였다. 唐朝는 中和 3년(883) 沙陀族의 도움을 받아 그를 장안에서 몰아냈고, 이듬해 황소는 泰山 狼虎谷에서 자살하였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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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6)
李克用: 唐末 沙陀族 將領. 李鴉爾라고도 하며, 한쪽 눈을 실명하여 獨眼龍이라고도 불린다. 일찍이 부친 朱邪赤心을 따라 龐勛의 봉기 진압에 참여하였다. 僖宗 乾符 5년(878) 雲中兵變이 일어났을 때 이 기회를 이용하여 雲州防御使 段文楚를 살해하였다. 唐朝가 정벌에 나서자 부친과 함께 북쪽의 韃靼으로 도주하였다. 6년 黃巢軍이 장안을 공격하자 唐朝는 河東節度使 陳景思를 代北起軍使로 임명하고, 沙陀族 등 소수민족군대를 초모하였는데, 이때 李克用이 雁門節度使로 추천되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關中에 들어와 黃巢軍을 몰아내는데 공을 세워 河東節度使를 제수받고 隴西郡王에 책봉되었으며 檢校太師兼中書令의 직함도 받았다. 中和 4년(884) 군대를 이끌고 渡河하여 黃巢軍을 中牟(지금의 河南省 中牟)에서 대패시켰다. 唐 昭宗 乾寧 2년(895) 鳳翔 李茂貞, 邠州 王行瑜의 반란을 진압하고, 그 공으로 忠正平難功臣이 되었으며 晉王에 책봉되었다. 후에 河東에서 할거하며 汴州(지금의 河南省 開封)를 점거하던 朱溫과 오랫동안 대치하였다. 後梁 開平 2년(908) 병사하였다. 그의 아들 李存勗이 後梁을 멸하고 後唐을 세운 후 武帝로 追諡되었고, 廟號는 太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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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7)
黃巢(?~884): 唐末 농민봉기의 지도자. 曹州 冤句(지금의 山東省 菏澤 東南)人으로 소금밀매업에 종사했다. 唐 僖宗 乾符 2년(875) 王仙芝의 봉기에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5년 왕선지가 전사하자 그 잔당을 흡수하고, 沖天大將軍·王에 추대되었다. 군대를 이끌고 南征하여 江淮를 넘어 지금의 江西·浙江을 거쳐 福建으로 진입하여 廣州를 점령하였다. 廣明 원년(880) 북상하여 洛陽을 점령하고, 이어 長安에 들어와 즉위하여 국호를 大齊라 하였다. 唐朝는 中和 3년(883) 沙陀族의 도움을 받아 그를 장안에서 몰아냈고, 이듬해 황소는 泰山 狼虎谷에서 자살하였다.
- 각주 008)
색인어
- 이름
- 매상온(每相溫), 우월상온(于越相溫), 주야적심(朱邪赤心), 방훈(龐勛), 이국창(李國昌), 극용(克用), 혁련탁(赫連鐸), [이]극용, 황소(黃巢)
- 지명
- 달단(達靼), 말갈(靺鞨), 해(奚), 거란(契丹), 거란, 거란, 발해(渤海), 음산(陰山), 달단, 중국, 토혼, 달단, 운주(雲州), 대주(代州), 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