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광개토대왕비
는 고구려 제19대 임금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가리기 위해 414년에 국내성에 아들인 장수왕이 세운 비석으로, 묘호(廟號)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마지막 세 글자를 본떠서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도 부른다. 조선 후기까지 확인되지 않다가 청의 만주에 대한 봉금제도(封禁制度)가 해제된 뒤에야 비로소 발견되었다. 비석이 발견된 후 수많은 탁본들이 제작되었으나 먹을 칠하거나, 비석 표면을 손상시키거나, 석회를 발라 탁본 글자를 선명하게 하거나 하는 등의 문제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비는 높이가 6.39m로, 자연석을 직사각형으로 조금 다듬어 만들었다. 본디 비석을 받치는 대석과 몸통으로 되어 있는데, 현재 대석은 흙바닥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비석의 네 면에는 모두 44줄, 1,775자가 새겨져 있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서언(序言) 격으로 고구려의 건국 내력을 기록하였고, 이어서 본문 격으로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뒤의 대외 정복사업의 구체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담았으며, 끝에는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를 서술하여 묘의 관리 문제를 적었다. 특히 고구려 건국신화의 내용을 담은 서언 부분에서는 고구려인들의 천하관을 엿볼 수 있고, 광개토왕의 업적 부분에서는 당시 고구려의 영역 확장 상태와 고구려와 주변국가 간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어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크다.
비문의 내용 가운데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논쟁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킨 것은 둘째 부분의 ‘백제와 신라는 이제 우리의 속민이 되었다’는 신묘년 기사(辛卯年記事)이다. 주 005
현재 신묘년 기사의 문자 판독이나 기사 성격에 대한 논의는 결론이 나 있지 않은 상태이나, 이는 신묘년(391)에 일어난 구체적 사건을 적은 기사라기보다는 대체로 영락 6년의 백제 정벌 및 8년의 신라 정토의 명분을 나타내는 전제문인 동시에 영락 6년에서 17년에 걸쳐 진행된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집약 기술한 집약문일 것으로 추정되며, ‘해(海)’자를 비롯한 일부 문자가 변조 내지 오독(誤讀)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비는 높이가 6.39m로, 자연석을 직사각형으로 조금 다듬어 만들었다. 본디 비석을 받치는 대석과 몸통으로 되어 있는데, 현재 대석은 흙바닥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비석의 네 면에는 모두 44줄, 1,775자가 새겨져 있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서언(序言) 격으로 고구려의 건국 내력을 기록하였고, 이어서 본문 격으로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뒤의 대외 정복사업의 구체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담았으며, 끝에는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를 서술하여 묘의 관리 문제를 적었다. 특히 고구려 건국신화의 내용을 담은 서언 부분에서는 고구려인들의 천하관을 엿볼 수 있고, 광개토왕의 업적 부분에서는 당시 고구려의 영역 확장 상태와 고구려와 주변국가 간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어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크다.
비문의 내용 가운데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논쟁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킨 것은 둘째 부분의 ‘백제와 신라는 이제 우리의 속민이 되었다’는 신묘년 기사(辛卯年記事)이다. 주 005
현재 신묘년 기사의 문자 판독이나 기사 성격에 대한 논의는 결론이 나 있지 않은 상태이나, 이는 신묘년(391)에 일어난 구체적 사건을 적은 기사라기보다는 대체로 영락 6년의 백제 정벌 및 8년의 신라 정토의 명분을 나타내는 전제문인 동시에 영락 6년에서 17년에 걸쳐 진행된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집약 기술한 집약문일 것으로 추정되며, ‘해(海)’자를 비롯한 일부 문자가 변조 내지 오독(誤讀)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