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가 한나라에 조하하였는데 이 때 온 이사막연(伊邪莫演)이 항복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한나라가 거절함
[성제] 하평(河平) 원년(전28) 선우는 우고림왕(右皋林王) 이사막연(伊邪莫演)
주 001등을 보내 공물을 바치고 정월에 조하(朝賀)하였다. [조회를] 파한 뒤, [한은] 사신을 보내 [흉노 사신들을] 배웅하여 포반(蒲反)[현]
주 002에 이르렀다. [이때] 이사막연이 “[한에] 항복하려 합니다. 만일 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살할 것입니다. 끝내 [흉노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한의] 사신은 이 사실을 보고하였으며 [황제는] 공경들의 회의에 붙였다.
의논자들 가운데 혹자는 응당 ‘고사(故事)’에 따라 항복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광록대부 곡영(谷永) 주 003
중랑장(中郞將)주 006 왕순(王舜) 주 007으로 하여금 [이사막연에게] 가서 투항하고자 하는 정황에 대하여 묻게 하였다. 이사막연은 말했다. “제가 정신병이 들어 망언을 했습니다.” [그를] 돌려보내니, [흉노정에] 도착한 뒤 관위(官位)는 과거와 같이 유지하였고 한의 사자를 만나지는 못하게 하였다.
이듬해주 008선우가 상서하여 하평 4년(전25) 정월 입조를 원하였고 실제로 입조하였다. 수놓은 비단[錦繡]·무늬 없는 비단[繒帛] 2만 필과 명주 솜 2만 근을 더 주었다. 나머지는 경녕 연간(전33)과 같았다.주 009
의논자들 가운데 혹자는 응당 ‘고사(故事)’에 따라 항복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광록대부 곡영(谷永) 주 003
각주 003)
, 의랑(議郞)주 004
두흠(杜欽)
주 005谷永(?∼전8) : 원래 이름이 並이었지만 나중에 永으로 바꾸었다. 字는 子云이다. 長安 사람이며 衛司馬 谷吉의 아들이다. 어려서 長安의 小史였으며 經書를 널리 공부하였다. 御史大夫 繁延壽가 그의 才名을 듣고 太常丞으로 천거하였으며, 成帝代에는 大將軍 王鳳에 의하여 光祿大夫로 발탁되었다. 수년 뒤, 安定太守로 出任하였으며 그 후 涼州刺史, 太中大夫, 光祿大夫給事中 등의 자리를 歷任하였다. 成帝代 황제 측근의 小臣들이 몰래 궁 밖으로 외유하기를 좋아하자, 谷永은 天變을 들어 시정을 요구하였다. 元延 1년(전12)에는 北地太守로 出任하였다. 몇 년 뒤, 驃騎將軍 王根의 추천을 받아 大司農으로 중앙에 돌아왔다. 병으로 면관되었다가 사망하였다. 그의 經學은 폭이 넓었고, 특히 『天官』 『京氏易』에 정통하여 災異에 대하여 잘 말하였다. 관직에 있으면서 대략 40여 건의 사안을 上奏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가운데 20여 건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각주 005)
은 말하였다. “한이 흥기한 후 흉노는 여러 차례 변방에 피해를 입혔습니다. 그래서 황금과 작위(爵位)를 상으로 내걸어 투항을 유도했습니다. 지금은 선우가 몸을 굽혀 신을 칭하고 늘어서서 북방의 울타리가 되었으며, 사신을 파견하여 조하하며 두 마음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에 대한] 한가(漢家)의 대우는 마땅히 과거와 달라야 합니다. 지금 이미 선우의 진실한 빙문(聘問)과 공물을 받았습니다. 그런 다음에 다시 [흉노에서] 도망친 신하를 받아들인다면 이는 한 사람을 얻으려는 욕심에 한 나라의 마음을 잃는 일이며, 죄지은 신하를 예우하여 의(義)를 사모하는 군주와 절교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가령 선우가 처음 즉위하여 중국에 몸을 맡기려 하지만 이익과 해로움을 알지 못하여, 사사로이 이사막연에게 거짓 항복을 하게 하여 길흉을 점쳐 보게 하였을 수 있습니다. 만일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덕을 훼손하고 선의를 무너뜨려 선우로 하여금 스스로 [중국을] 멀리하고 [한의] 국경 관리들을 가까이 하지 않게 할 것입니다. [그 경우가 아니라면] 어떤 사람이 이간책을 세워 그것으로 [한과 흉노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할 수도 있는데, [흉노의 투항자를] 받아들이면 바로 그 계책에 말려드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한 측이] 허물을 지게 되고 [흉노는] 직접 책임을 묻게 될 것입니다. 이는 진실로 변경이 안정되거나 위기에 빠지는 원인이며 군대가 움직일지 말지를 [결정하는] 분수령이어서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투항자를] 받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해와 달 같은 신의를 밝히고, 거짓 음모를 누르고, [한에] 기대고 가까이하려는 마음을 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황제의 질문에] 대하여 상주하자 천자가 그것을 따랐다.杜欽 : 字가 子夏이다. 南陽 杜衍 사람이며 杜延年의 次子이다. 어려서 經書를 좋아했다. 집안은 부유했으나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아 仕官을 바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뛰어난 재능으로 京師에서 그 명성이 높아 士人들이 ‘盲杜子夏’라고 불렀다. 평소에 작은 冠을 쓰길 좋아하여 ‘小冠杜子夏’라고도 불렸다. 成帝 때 大將軍 王鳳의 추천을 받아 大將軍 軍武庫令이 되었다. 후에 자신의 조카와 皇太后의 누이동생인 司馬君力이 私通한 일이 발생하자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 자진하여 사임하고 집안에 기거했다. 그 뒤 다시 大將軍의 징소를 받아 출사하여 國家의 주요 정책을 王鳳과 함께 논의하였다. 賢士 韋安世․王駿 등을 천거하고, 馮野王․王尊․胡常 등을 구제하였다. 王鳳 輔政기의 善政은 대부분 杜欽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하며 王鳳에게도 적절한 처신을 권유하여 그가 천수를 누리게 하였다.
중랑장(中郞將)주 006 왕순(王舜) 주 007으로 하여금 [이사막연에게] 가서 투항하고자 하는 정황에 대하여 묻게 하였다. 이사막연은 말했다. “제가 정신병이 들어 망언을 했습니다.” [그를] 돌려보내니, [흉노정에] 도착한 뒤 관위(官位)는 과거와 같이 유지하였고 한의 사자를 만나지는 못하게 하였다.
이듬해주 008선우가 상서하여 하평 4년(전25) 정월 입조를 원하였고 실제로 입조하였다. 수놓은 비단[錦繡]·무늬 없는 비단[繒帛] 2만 필과 명주 솜 2만 근을 더 주었다. 나머지는 경녕 연간(전33)과 같았다.주 009
- 각주 001)
- 각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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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3)
谷永(?∼전8) : 원래 이름이 並이었지만 나중에 永으로 바꾸었다. 字는 子云이다. 長安 사람이며 衛司馬 谷吉의 아들이다. 어려서 長安의 小史였으며 經書를 널리 공부하였다. 御史大夫 繁延壽가 그의 才名을 듣고 太常丞으로 천거하였으며, 成帝代에는 大將軍 王鳳에 의하여 光祿大夫로 발탁되었다. 수년 뒤, 安定太守로 出任하였으며 그 후 涼州刺史, 太中大夫, 光祿大夫給事中 등의 자리를 歷任하였다. 成帝代 황제 측근의 小臣들이 몰래 궁 밖으로 외유하기를 좋아하자, 谷永은 天變을 들어 시정을 요구하였다. 元延 1년(전12)에는 北地太守로 出任하였다. 몇 년 뒤, 驃騎將軍 王根의 추천을 받아 大司農으로 중앙에 돌아왔다. 병으로 면관되었다가 사망하였다. 그의 經學은 폭이 넓었고, 특히 『天官』 『京氏易』에 정통하여 災異에 대하여 잘 말하였다. 관직에 있으면서 대략 40여 건의 사안을 上奏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가운데 20여 건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 각주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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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5)
杜欽 : 字가 子夏이다. 南陽 杜衍 사람이며 杜延年의 次子이다. 어려서 經書를 좋아했다. 집안은 부유했으나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아 仕官을 바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뛰어난 재능으로 京師에서 그 명성이 높아 士人들이 ‘盲杜子夏’라고 불렀다. 평소에 작은 冠을 쓰길 좋아하여 ‘小冠杜子夏’라고도 불렸다. 成帝 때 大將軍 王鳳의 추천을 받아 大將軍 軍武庫令이 되었다. 후에 자신의 조카와 皇太后의 누이동생인 司馬君力이 私通한 일이 발생하자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 자진하여 사임하고 집안에 기거했다. 그 뒤 다시 大將軍의 징소를 받아 출사하여 國家의 주요 정책을 王鳳과 함께 논의하였다. 賢士 韋安世․王駿 등을 천거하고, 馮野王․王尊․胡常 등을 구제하였다. 王鳳 輔政기의 善政은 대부분 杜欽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하며 王鳳에게도 적절한 처신을 권유하여 그가 천수를 누리게 하였다.
- 각주 006)
- 각주 007)
- 각주 008)
- 각주 009)
색인어
- 이름
- 이사막연(伊邪莫演), 이사막연, 곡영(谷永), 두흠(杜欽), 이사막연, 왕순(王舜), 이사막연, 이사막연
- 지명
- 한, 포반(蒲反)[현], 한, 한, 한, 한, 한, 한, 한,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