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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고대문화유산

포항 옥성리 유적

  • 저필자
    최재도(한성백제박물관 백제학연구소)
  • 날짜
    1994·1995·2001·2010
  • 시대
    원삼국~삼국
  • 위치
  • 원소장처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옥성리 일대
  • 시대
    상고사
  • 유형
    무덤
입지
1994, 1995, 2001, 2010년 각각 국립경주박물관, 영남문화재연구원,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성림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조사 시행.
유적개관
원삼국~현대까지 다양한 유구가 조사되었으나 원삼국시대 후기와질토기단계의 목곽묘가 중심이며, 목관묘는 6기가 확인됨. 현재까지 확인된 유구의 내용으로 볼 때 목곽묘에 비해 목관묘의 수가 적은 것이 특징이며, 중심연대는 기원후 2~3세기로 보고 있음. 4차 발굴에서 확인된 3호 목관묘의 경우 칠기가 출토되었는데, 창원 다호리 유적, 성주 예산리 유적 등에서 출토된 칠기와 좋은 비교자료가 될 것으로 보임.
출토유물
* 조합식우각형파수부장경호, 주머니호, 연질단경소호, 철겸, 단조철부, 은제심금구, 철촉, 칠기 등
참고문헌
「포항 옥성리 고분군Ⅰ·Ⅱ -나지구-」
「옥성리 고분군 Ⅰ·Ⅱ·Ⅲ -가지구 발굴조사보고」
「포항 옥성리 산 12-1번지 공동주택건립부지내 유적 문화재 발굴조사 지도위원회 자료」
해설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옥성리 일대에 있는 원삼국~삼국시대의 고분군이다. 흥해읍의 서쪽에는 해발 50m 정도의 여러 구릉으로 이루어진 봉안산이 있는데, 옥성리 고분군은 동~서로 길게 뻗은 구릉의 정선부(頂線部)와 동편 능선상에 위치한다.
1994년 국립경주박물관이 조사를 실시하여 원삼국~삼국시대 무덤 140기를, 1995년에는 영남문화재연구원이 131기의 무덤을 확인하였다. 유적은 국립경주박물관이 조사한 ‘가’지구와 영남문화재연구원이 조사한 ‘나’지구로 나누어지는데, ‘나’지구에서부터 ‘가’지구로 가면서 축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나’지구에서 주로 독무덤[옹관묘(甕棺墓)]과 널무덤[목관묘(木棺墓)], 덧널무덤[목곽묘(木槨墓)]이, 가지구에서는 널무덤, 덧널무덤 및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積石木槨墓)], 돌덧널무덤[석곽묘(石槨墓)]이 주로 조사되었다.
널무덤은 가지구에서 1기(67호), 나지구에서 2기(35, 80호) 총 3기가 조사되었다. 비교적 잔존상태가 양호한 가-67호의 경우 무덤구덩이를 깊게 파고 내부에 널을 설치한 후 널과 구덩이 사이에 흙을 채워 넣었다. 유물은 쇠뿔모양손잡이항아리[우각형파수부호(牛角形把手附壺)]와 주머니항아리, 쇠낫[철겸(鐵鎌)], 쇠도끼[철부(鐵斧)] 등이 출토되었다.
덧널무덤은 나-78호묘가 대표적인데, 이 무덤은 대형의 덧널무덤으로 구릉의 정선부에 위치한다. 암반을 거의 수직으로 판 무덤구덩이[묘광(墓壙)]의 규모는 길이, 너비, 깊이가 5.72×3.3×0.4m이고, 덧널의 크기는 길이 3.8m, 폭 1.5m 정도이다. 덧널은 숯[목탄(木炭]과 유물의 배치상 2중(二重)덧널일 가능성이 높다. 유물은 안덧널[내곽(內槨)]에는 주로 철기류가, 안덧널과 바깥덧널[외곽((外槨)] 사이에는 주로 토기류가 확인되었다. 특히 쇠투겁창[철모(鐵矛)]이 여러 다발로 104점이나 출토되었는데 시신의 머리 위에 넣은 것으로 보인다.
돌무지덧널무덤은 5세기경부터 축조되기 시작하는데, 무덤구덩이를 파고 내부에 덧널을 설치한 후 덧널과 무덤구덩이 사이에 돌을 쌓은 구조이다. 대부분이 상부에는 돌을 쌓지 않은[사방적석식(四方積石式)] 돌무지덧널무덤이다. 돌덧널무덤은 ‘가’지구에서만 총 16기가 조사되었고 대체로 5세기 말부터 6세기 중엽에 축조되었다. 그 구조는 무덤구덩이를 파고 깬돌[할석(割石)] 또는 강돌[천석(川石)]로 쌓아서 축조한 것으로 대부분 바닥에 주검받침돌[시상석(屍床石)]이 깔리며 유물은 머리측과 발치측에 넣는 것이 일반적이다.
옥성리 고분군은 2세기 말부터 6세기 대까지 만들어진 것으로 덧널무덤과 돌무지덧널무덤이 주류를 이룬다. 가장 큰 특징으로는 3세기경에는 나-78호와 같이 대형급의 무덤이 축조되다가, 4세기에 들어서면 더 이상 대형무덤은 축조되지 않으며 고총(高塚)으로도 발전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3세기까지는 옥성리집단이 큰 세력으로 발전하였으나, 4세기 대 부터는 경주세력에 의해 정치·경제적으로 이전과 다른 변화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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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항 옥성리 유적 자료번호 : isea.d_0001_0030_0040_001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