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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가 조칙을 내려 신하들의 말을 거절하고 군대를 파견하지 않았으며 백성들의 안위를 걱정함

  • 국가
    구자국(龜玆國)
이에 주상께서 조칙을 내려서 과거의 후회스런 일에 대해서 깊이 토로하며 이렇게 말했다. “과거에 관리들이 상주해서 백성들의 부세[民賦]주 001
각주 001)
賦 : 여기서 ‘賦’는 ‘算賦’와 동일한 말이다. 즉 漢왕조는 田賦 이외에 ‘算賦’, ‘口錢’, ‘更賦’라는 것을 거두었으니, 이는 人頭稅라고 할 수 있다. 漢 高祖 4년에 시작된 算賦는 “民年十五以上至五十六出賦錢, 人百二十爲算”이라고 하였듯이, 1인당 120錢을 납부해야 했다. 또한 賈人과 奴婢는 加倍하여 二算을 납부하였다. 文帝(전180~전147)는 算賦를 3분의 1로 輕減하여 40전만 내도록 했다. 未成年者에게 물리는 人頭稅인 ‘口錢’은 武帝(전140~전87) 때에 군비의 확보를 위해 도입된 것으로 “民三歲以至十四歲, 出口錢人二十三”하도록 규정하였다. 元帝(전49~전33)는 口錢을 7세 이상에게 물리고, 20세 이상이 되면 算賦를 내도록 하였으며, 이외에 力役으로 ‘更賦’라는 것이 부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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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1인당] 30전씩 증액하여 변방의 비용을 보조하자고 했으나, 이는 노인과 병약한 사람, 또 고아와 독신자들을 더욱 힘들게 할 뿐이다. 그런데 지금 다시 사졸들을 파견하여 윤대에 둔전시키자고 청하고 있다. 윤대는 거사에서 서쪽으로 천여리 떨어져 있어, 과거에 개릉후(開陵侯) 주 002
각주 002)
開陵侯 : 한 무제 天漢 3년(전99), 匈奴의 降將인 介和王 成娩을 開陵侯로 봉하고, 그에게 樓蘭國 군대를 이끌고 車師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匈奴의 右賢王이 수만 기를 이끌고 구원하러 와서 한의 군대는 패배하고 돌아갔다. 본문 아래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征和 4년(전89) 한이 다시 開陵侯를 파견하여 樓蘭을 위시한 六國의 군대를 이끌고 車師를 포위함으로써 車師의 왕이 한나라에 투항했던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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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사를 공격할 때 위수·위리·누란 등 6국의 자제로서 경사에 있던 자들이 모두 먼저 귀국하여, 비축된 식량을 내어서 한나라 군대를 맞이하였다. 또한 그들 스스로 무릇 수만 명의 군대를 내어서, 왕은 각자 스스로 군대를 지휘하여 함께 거사를 포위해서 그 왕을 항복시켰다. 여러 나라의 군대는 곧 해산되었고, [그들이] 다시 대로에 이르러서 한나라 군대에게 식량을 공급해 줄 힘이 없었다. 한나라 군대가 성을 공파했을 당시 식량은 매우 많았다. 그러나 병사들 스스로 싣고 가는 것으로는 원정이 끝날 때까지 버티기에 부족했다. 그래서 강한 자는 가축을 모두 먹어치웠지만 약한 자는 길에서 죽은 것이 수천 명이었다. 짐은 주천에서 나귀와 낙타에 식량을 싣고 옥문을 나가서 군대를 영접하도록 하였다. 군관과 병졸들은 장액을 출발하여 그리 멀리 가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낙오자들이 많았다.주 003
각주 003)
廝留 : 顔注 : “(대열의) 앞뒤에서 떨어지고 뒤쳐져서 미치지 못한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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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짐이 불민했고, 또 군후(軍候) 홍(弘) 주 004
각주 004)
軍候 : 『史記』 卷109 「李將軍列傳」의 기사에 대하여 『後漢書』 卷24 「百官一」에 따르면 軍候는 將軍, 校尉, 司馬 이하의 軍官이었다. 그러나 본문에서 언급된 ‘弘’이라는 인물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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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흉노인들이 말의 앞뒤 발을 묶어서 성주 005
각주 005)
萬里長城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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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 놓아두고, 달려와서 말하기를 「진나라 사람(秦人)주 006
각주 006)
秦人 : 前註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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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여! 우리가 그대들에게 말을 주겠다.」고 말했다.’는 내용의 상서를 올렸다. 또한 한나라 사신이 오랫동안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를 일으키고 이사장군을 파견하여 [우리] 사신들을 위하여 그 위세를 높일려고 했다. 옛날에 경과 대부들이 미리주 007
각주 007)
顔注에 따라 본문의 與를 豫의 의미로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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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의할 때 점대나 구갑주 008
각주 008)
蓍龜 : 점칠 때 사용하는 나뭇가지와 거북이 등뼈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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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참고하여 길하지 않으면 가지 않았었다. 그때 짐도 말을 묶어 놓았다는 [내용의] 글을 승상, 어사, 이천석(二千石), 여러 대부들(諸大夫)주 009
각주 009)
諸大夫 : ‘大夫’는 先秦시대 諸國에서 國君 아래에 있던 卿․大夫․士의 三級 가운데 하나였으나, 후대로 내려와 大夫는 일반적인 官稱號로 바뀌었다. 秦漢 이후에 中央의 요직에는 御史大夫가 있고, 顧問에 응하는 諫大夫, 中大夫, 光祿大夫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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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익힌 낭(郞)들주 010
각주 010)
郎爲文學者 : 顔注 : “文學은 經書를 공부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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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지어 군과 속국의 도위인 성충(成忠) 주 011
각주 011)
여기에 언급된 成忠은 다른 자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인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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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파노(趙破奴)에게도 보여주었는데, 모두 ‘오랑캐[虜]가 스스로 그 말을 묶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극히 불길한 징조입니다.’라고 하였고, 혹자는 ‘[그들이 짐짓]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는 것이고, 대저 여유가 없는 자들이 남에게 여유있음을 보이려고 하는 짓’이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역(易)으로 [점을] 쳐 보니 대과(大過)주 012
각주 012)
大過 : 『周易』의 第二十八卦로서 ‘澤風大過’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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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괘(卦)가 나왔고 효(爻)는 구오(九五)주 013
각주 013)
九五 : 九五는 64卦 중에서 제1卦인 乾卦 가운데에서도 가장 좋은 爻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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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서, 흉노가 곤경에 처해 패배할 점이었다.주 014
각주 014)
이 두 개의 점괘에 대해서 孟康은 “마른 버드나무에서 꽃이 피는 모양(枯楊生華)”이기 때문에 오래 지속되지 않을 象이고 따라서 “匈奴가 머지않아 패배할 징조”라고 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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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거(公車)의 방사(方士)주 015
각주 015)
公車 : 漢代에 徵擧를 받은 讀書人이 京師에 가서 考核을 받을 때에는 官에서 준비한 馬車를 타고 갔다. 예를 들어 『後漢書』 「光武帝紀·下」에는 “擧賢良方正各一人, 遣詣公車”라는 구절이 보인다. 후대에 가서 公車는 擧人이 入京하여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方士’는 方術士 혹은 有方之士라고도 칭해졌다. 戰國時代에 燕․齊 등 해안지방에서 기원했으며 長生不死의 방법을 탐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각종 煉丹․采藥의 神仙術을 표방하였다. 따라서 본문에서 “公車方士”는 황제가 縛馬書와 관련하여 公車로서 召喚되어 대기하고 있는 方士들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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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사(太史)주 016
각주 016)
太史 : 太史令이라고도 칭해지며, 西周․春秋시대에 문서를 起草하고 諸侯․卿大夫에게 주는 策命을 작성하였으며, 史事를 기재하고 史書를 編寫하였고, 아울러 典籍․天文曆法․祭祀 등을 관장하였다. 秦漢代에도 太史令을 두었으나 지위는 상당히 낮아졌으며, 漢代에는 특히 太常에 소속되어 天文曆法을 관장했으며 秩六百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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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소속되어 별을 관찰하고 기운을 살피는 사람들과 태복(太卜)주 017
각주 017)
太卜 : 西周에서 처음 설치되었고 지위는 三公 다음이고 六卿의 하나였다. 자연현상의 변화와 점괘를 통해서 국가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직능을 수행했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차츰 그 지위가 낮아져 前漢代에 太卜은 太常에 속한 여러 官署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게 되었다. 秩六百石의 令이 두어졌고, 그 아래 丞은 秩四百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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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소속되어 구갑과 점대로 점치는 사람들이 모두 길조로 여기며 흉노가 반드시 격파될 것이고, [이와 같은] 때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들이] 말하기를 “북벌을 하러 원정을 떠날 때 부산(鬴山) 주 018
각주 018)
顔注에 따르면 鬴山은 山名이고, 鬴는 釜의 古字이다. 五原 塞外의 匈奴 境內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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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한다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하였다. 여러 장군들에 대해서 점을 쳐 보니 이사[장군]이 가장 길조였다. 그래서 짐은 친히 이사를 부산으로 내려보냈고,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말라는 조칙을 내렸다. 그런데 이제 보니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과 징조를 점치는 사람들이 모두 [사실과는] 상반되고 오류를 범했다. 중합후(重合侯) 주 019
각주 019)
重合侯 : 『漢書』 卷6 「武帝紀」에는 征和 3년(전90)에 “貳師將軍 李廣利가 七萬人을 이끌고 五原을 나섰고, 御史大夫 商丘成이 二萬人을 이끌고 西河를 나섰으며, 重合侯 馬通이 四萬騎를 이끌고 酒泉을 나섰다. 商丘成이 浚稽山에 이르러 오랑캐와 전투를 벌여 다수를 斬首했다. 馬通이 天山에 이르자 오랑캐는 후퇴했고 그래서 車師를 항복시켰다. 모두 군사를 이끌고 귀환했는데, 李廣利는 敗하여 匈奴에게 투항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 馬通의 字는 達이고 黄門郎, 侍中을 역임하다가 重合侯에 봉해졌는데, 重合은 縣名으로 勃海郡에 속했으며, 현재 滄州 樂陵縣 동쪽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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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오랑캐의 척후를 붙잡았는데, 그가 말하기를 ‘한나라 군대가 곧 온다는 소식을 듣고 흉노는 무당으로 하여금 [한나라 군대가] 나오는 여러 길과 물이 있는 곳에 양과 소를 묻어서 군대를 저주하도록 하였다. 선우가 천자에게 말과 털외투를 보낼 때에도 항상 무당에게 시켜서 주술을 걸도록 하였다. 말을 묶은 것도 군대를 저주하기 위함이었다.’라고 하였다. 또한 [흉노가] 점을 쳤더니 ‘한나라 군대에서 한 명의 장군이 불길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흉노는 항상 말하기를 ‘한나라는 아주 강대하지만 기갈은 견디지 못하니, 한 마리의 늑대가 없어지면 천마리의 양이 도망친다.’고 한다. 최근 이사가 패배하고 군대가 노략되고 흩어져 버렸으니, 그 비통함이 항상 짐의 마음에 남아 있다. 그런데 이제 저 멀리 윤대에 둔전을 청하며 정(亭)과 수(隧)주 020
각주 020)
隧 : 顔注에 따르면 隧는 험난한 곳에 통행을 위하여 뚫은 길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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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세우자고 하니, 이는 천하를 소란케 하고 피곤하게 하는 바이며 백성을 우휼하는 바가 아니다. 이제 짐은 [그런 제안을] 차마 듣지 못하겠노라. 대홍로(大鴻臚)주 021
각주 021)
征和 9년(전89) 大鴻臚에 임명된 淮陽太守 田廣明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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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 또한 논의하여 죄수와 형도를 모집하여 흉노로 가는 사신을 호송케 하자고 하는데, [이러한 일은] 후(侯)로 봉하는 상급을 분명히 내려서 원한을 갚는 것이니,주 022
각주 022)
文意가 잘 통하지 않는데, Hulsew(1979 : 172)는 이것이 錯簡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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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의] 오패(五伯)도 차마 하지 않던 일이다.주 023
각주 023)
이에 대해서 顔師古는 “伯은 霸로 읽는다. 五霸도 부끄러워하지 않던 일을 어찌 오늘날 大漢이 하겠는가?”라고 풀이하였다. ‘五伯’는 ‘五霸’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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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흉노가 한나라에서 투항한 사람들을 얻으면 항상 겨드랑이를 들어올리고 수색을 하며 [투항한 사람들이] 들어서 아는 것들을 심문한다. 현재 변방의 관문이 올바르지 못한 상태여서 함부로 나가는 것을 금하지 못한다. 장후(障候)를 지휘하는 군관들이 사졸들을 시켜 금수를 사냥케 하고 [포획한 동물들의] 껍질과 고기로써 이익을 취한다. 사졸들은 힘들고 봉화는 제대로 운영되지 않으니, [이러한] 손실이 있어도 위로 [올라가는 문서에는] 모여서 보고되지 않는다. 후에 투항자가 오거나 오랑캐를 생포해야 비로서 [그 같은] 사정을 알게 된다. [그러니] 지금은 마땅히 가혹함을 금지하고, 함부로 부세를 걷는 것을 중지하며, 근본이 되는 농사에 힘쓰고, 마복령(馬復令)주 024
각주 024)
‘馬復令’에 대해서 顔師古는 “馬復은 養馬를 하면 徭賦를 免除해 주는 것을 말한다.”고 설명하였다. 馬復令은 漢 文帝․景帝 이래 軍馬를 확보하기 위해 민간에서 養馬를 할 경우 賦稅를 면제해 주던 제도를 칭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武帝 때가 되면 40여만 필에 달하는 마필이 확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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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고쳐서 그 부족함을 보충하고, 무비(武備)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군국의 이천 석들은 각각 말과 가축을 올리고 변방을 보강할 계획을 적은 보고서를 올리게 하여, 함께 대책을 논의토록 하라. 이에 다시 군대를 파견하지 않았다. 그리고 승상 차천추(車千秋) 주 025
각주 025)
車千秋 : 그의 조상은 원래 齊나라 사람이었고, 본래의 姓도 田이었다. 車千秋가 高寢郎이었을 때, 衛太子가 江充에게 모함을 당하는 사건이 터지자, 그는 太子를 위하여 극력 변호하였고, 이에 武帝가 감동하여 그를 大鴻盧로 임명하였고 몇 달 뒤에 丞相이 되었으며 富民侯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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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민후(富民侯)로 삼아서 [천자가 백성들에게] 휴식을 주고 백성을 부요하게 기르려는 생각을 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리도록 하였다.

  • 각주 001)
    賦 : 여기서 ‘賦’는 ‘算賦’와 동일한 말이다. 즉 漢왕조는 田賦 이외에 ‘算賦’, ‘口錢’, ‘更賦’라는 것을 거두었으니, 이는 人頭稅라고 할 수 있다. 漢 高祖 4년에 시작된 算賦는 “民年十五以上至五十六出賦錢, 人百二十爲算”이라고 하였듯이, 1인당 120錢을 납부해야 했다. 또한 賈人과 奴婢는 加倍하여 二算을 납부하였다. 文帝(전180~전147)는 算賦를 3분의 1로 輕減하여 40전만 내도록 했다. 未成年者에게 물리는 人頭稅인 ‘口錢’은 武帝(전140~전87) 때에 군비의 확보를 위해 도입된 것으로 “民三歲以至十四歲, 出口錢人二十三”하도록 규정하였다. 元帝(전49~전33)는 口錢을 7세 이상에게 물리고, 20세 이상이 되면 算賦를 내도록 하였으며, 이외에 力役으로 ‘更賦’라는 것이 부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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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開陵侯 : 한 무제 天漢 3년(전99), 匈奴의 降將인 介和王 成娩을 開陵侯로 봉하고, 그에게 樓蘭國 군대를 이끌고 車師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匈奴의 右賢王이 수만 기를 이끌고 구원하러 와서 한의 군대는 패배하고 돌아갔다. 본문 아래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征和 4년(전89) 한이 다시 開陵侯를 파견하여 樓蘭을 위시한 六國의 군대를 이끌고 車師를 포위함으로써 車師의 왕이 한나라에 투항했던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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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廝留 : 顔注 : “(대열의) 앞뒤에서 떨어지고 뒤쳐져서 미치지 못한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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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軍候 : 『史記』 卷109 「李將軍列傳」의 기사에 대하여 『後漢書』 卷24 「百官一」에 따르면 軍候는 將軍, 校尉, 司馬 이하의 軍官이었다. 그러나 본문에서 언급된 ‘弘’이라는 인물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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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萬里長城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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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秦人 : 前註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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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顔注에 따라 본문의 與를 豫의 의미로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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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蓍龜 : 점칠 때 사용하는 나뭇가지와 거북이 등뼈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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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諸大夫 : ‘大夫’는 先秦시대 諸國에서 國君 아래에 있던 卿․大夫․士의 三級 가운데 하나였으나, 후대로 내려와 大夫는 일반적인 官稱號로 바뀌었다. 秦漢 이후에 中央의 요직에는 御史大夫가 있고, 顧問에 응하는 諫大夫, 中大夫, 光祿大夫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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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郎爲文學者 : 顔注 : “文學은 經書를 공부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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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여기에 언급된 成忠은 다른 자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인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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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大過 : 『周易』의 第二十八卦로서 ‘澤風大過’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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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九五 : 九五는 64卦 중에서 제1卦인 乾卦 가운데에서도 가장 좋은 爻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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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이 두 개의 점괘에 대해서 孟康은 “마른 버드나무에서 꽃이 피는 모양(枯楊生華)”이기 때문에 오래 지속되지 않을 象이고 따라서 “匈奴가 머지않아 패배할 징조”라고 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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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公車 : 漢代에 徵擧를 받은 讀書人이 京師에 가서 考核을 받을 때에는 官에서 준비한 馬車를 타고 갔다. 예를 들어 『後漢書』 「光武帝紀·下」에는 “擧賢良方正各一人, 遣詣公車”라는 구절이 보인다. 후대에 가서 公車는 擧人이 入京하여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方士’는 方術士 혹은 有方之士라고도 칭해졌다. 戰國時代에 燕․齊 등 해안지방에서 기원했으며 長生不死의 방법을 탐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각종 煉丹․采藥의 神仙術을 표방하였다. 따라서 본문에서 “公車方士”는 황제가 縛馬書와 관련하여 公車로서 召喚되어 대기하고 있는 方士들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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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太史 : 太史令이라고도 칭해지며, 西周․春秋시대에 문서를 起草하고 諸侯․卿大夫에게 주는 策命을 작성하였으며, 史事를 기재하고 史書를 編寫하였고, 아울러 典籍․天文曆法․祭祀 등을 관장하였다. 秦漢代에도 太史令을 두었으나 지위는 상당히 낮아졌으며, 漢代에는 특히 太常에 소속되어 天文曆法을 관장했으며 秩六百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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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7)
    太卜 : 西周에서 처음 설치되었고 지위는 三公 다음이고 六卿의 하나였다. 자연현상의 변화와 점괘를 통해서 국가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직능을 수행했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차츰 그 지위가 낮아져 前漢代에 太卜은 太常에 속한 여러 官署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게 되었다. 秩六百石의 令이 두어졌고, 그 아래 丞은 秩四百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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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8)
    顔注에 따르면 鬴山은 山名이고, 鬴는 釜의 古字이다. 五原 塞外의 匈奴 境內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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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9)
    重合侯 : 『漢書』 卷6 「武帝紀」에는 征和 3년(전90)에 “貳師將軍 李廣利가 七萬人을 이끌고 五原을 나섰고, 御史大夫 商丘成이 二萬人을 이끌고 西河를 나섰으며, 重合侯 馬通이 四萬騎를 이끌고 酒泉을 나섰다. 商丘成이 浚稽山에 이르러 오랑캐와 전투를 벌여 다수를 斬首했다. 馬通이 天山에 이르자 오랑캐는 후퇴했고 그래서 車師를 항복시켰다. 모두 군사를 이끌고 귀환했는데, 李廣利는 敗하여 匈奴에게 투항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 馬通의 字는 達이고 黄門郎, 侍中을 역임하다가 重合侯에 봉해졌는데, 重合은 縣名으로 勃海郡에 속했으며, 현재 滄州 樂陵縣 동쪽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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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0)
    隧 : 顔注에 따르면 隧는 험난한 곳에 통행을 위하여 뚫은 길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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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1)
    征和 9년(전89) 大鴻臚에 임명된 淮陽太守 田廣明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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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2)
    文意가 잘 통하지 않는데, Hulsew(1979 : 172)는 이것이 錯簡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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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3)
    이에 대해서 顔師古는 “伯은 霸로 읽는다. 五霸도 부끄러워하지 않던 일을 어찌 오늘날 大漢이 하겠는가?”라고 풀이하였다. ‘五伯’는 ‘五霸’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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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4)
    ‘馬復令’에 대해서 顔師古는 “馬復은 養馬를 하면 徭賦를 免除해 주는 것을 말한다.”고 설명하였다. 馬復令은 漢 文帝․景帝 이래 軍馬를 확보하기 위해 민간에서 養馬를 할 경우 賦稅를 면제해 주던 제도를 칭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武帝 때가 되면 40여만 필에 달하는 마필이 확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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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5)
    車千秋 : 그의 조상은 원래 齊나라 사람이었고, 본래의 姓도 田이었다. 車千秋가 高寢郎이었을 때, 衛太子가 江充에게 모함을 당하는 사건이 터지자, 그는 太子를 위하여 극력 변호하였고, 이에 武帝가 감동하여 그를 大鴻盧로 임명하였고 몇 달 뒤에 丞相이 되었으며 富民侯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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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개릉후(開陵侯), 홍(弘), 성충(成忠), 조파노(趙破奴), 중합후(重合侯), 차천추(車千秋), 부민후(富民侯)
지명
거사, 거사, 위수, 위리, 누란, 한나라, 거사, 한나라, 한나라, 주천, 장액, 진나라, 한나라, 부산(鬴山), 부산,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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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가 조칙을 내려 신하들의 말을 거절하고 군대를 파견하지 않았으며 백성들의 안위를 걱정함 자료번호 : jo.k_0002_0096_0340_0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