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손이 한나라와 교통한 뒤 한나라의 공주를 받아들이고자 함
흉노가 그 [오손]이 한나라와 교통한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그를 공격하려 하였다. 또한 한나라는 오손에 사신들을 보냈으며, [나아가] 그 남쪽을 나서서 대완과 월지에도 도달한 것이 끊이지 않았다.주 001
각주 001)
이에 오손은 두려워하게 되어 사신을 보내어 말을 바치고 한나라의 공주를 맞아들이고 형제가 되기를 희망하였다. 천자가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보니 그들이 논의한 결과 “반드시 먼저 빙물[聘]을 들이게 한 뒤에 여자를 보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오손이 말 천 필을 빙물로 보냈다. 한 원봉(元封) 연간(전110~전에 강도왕(江都王) 건(建)
주 002의 딸 세군(細君)을 공주라고 하여 [오손왕의] 부인으로 삼게 하였다.주 003수레와 의복과 황실의 물품을 하사하고, 관속과 환관, 시중들 사람 수백 명을 갖추어 주니, 보내는 것들이 정말 성대하였다. 오손의 곤막은 그녀를 우부인(右夫人)주 004으로 삼았다. 흉노도 역시 [선우의] 딸을 곤막의 부인으로 보내니 곤막은 그녀를 좌부인(左夫人)주 005前漢 조정이 西域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그 숫자도 많았고 규모도 컸다. “대저 外國에 사신을 보낼 때 1개 團(一輩)이 큰 것은 數百人, 작은 것은 百餘人인데…… 漢나라가 한 해 평균 보내는 사신단이 많으면 10團, 적으면 5~6團이었다.” (『史記』 卷123 「大宛列傳」)는 기록이 이를 말해 준다. 현재 전한대에 사신으로 파견된 사람들 가운데 이름이 확인되는 것만해도 27명에 달하고 있다. 전한 시대에 서역에 사신을 파견한 목적과 임무에 따라 구분해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이 3시기로 나뉘어진다. 第1期 : 張騫의 出使부터 太初元年(전104) 李廣利의 大宛遠征에 이르기까지로서, 대체로 서역에서 同盟勢力을 구하려는 목적에서 진행되었다. 第2期 : 太初元年에서 西域都護가 설치되는 전60년 경까지로, 흉노의 세력을 구축하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第3期 : 도호의 설치에서 前漢 붕괴 시점까지로, 서역제국에 대한 한의 적극적인 정치적 개입과 管理가 이루어진 시기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李大龍(1990) 참조.
각주 005)
으로 삼았다.右夫人, 左夫人 : 匈奴人들은 左를 右보다 더 우선시하였으며 이는 左賢王이 單于 다음의 제2위로 여겨졌던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烏孫의 경우 左右 어느 쪽이 더 중시되었는지 분명히 말해 주는 자료는 없으나, 본문 뒤에서 오손의 왕 翁歸靡가 三男인 大樂을 ‘左大將’으로 삼았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匈奴와 마찬가지로 尙左의 習俗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흉노 선우의 딸이 ‘左夫人’이고 細君이 ‘右夫人’이었다는 기록은 당시 烏孫이 漢과 匈奴에 대한 외교적 비중을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자료라고 할 수 있다. Hulsewe(1979 : 148)도 烏孫은 匈奴의 영향을 받아 左를 더 중시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
각주 001)
前漢 조정이 西域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그 숫자도 많았고 규모도 컸다. “대저 外國에 사신을 보낼 때 1개 團(一輩)이 큰 것은 數百人, 작은 것은 百餘人인데…… 漢나라가 한 해 평균 보내는 사신단이 많으면 10團, 적으면 5~6團이었다.” (『史記』 卷123 「大宛列傳」)는 기록이 이를 말해 준다. 현재 전한대에 사신으로 파견된 사람들 가운데 이름이 확인되는 것만해도 27명에 달하고 있다. 전한 시대에 서역에 사신을 파견한 목적과 임무에 따라 구분해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이 3시기로 나뉘어진다. 第1期 : 張騫의 出使부터 太初元年(전104) 李廣利의 大宛遠征에 이르기까지로서, 대체로 서역에서 同盟勢力을 구하려는 목적에서 진행되었다. 第2期 : 太初元年에서 西域都護가 설치되는 전60년 경까지로, 흉노의 세력을 구축하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第3期 : 도호의 설치에서 前漢 붕괴 시점까지로, 서역제국에 대한 한의 적극적인 정치적 개입과 管理가 이루어진 시기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李大龍(1990) 참조.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右夫人, 左夫人 : 匈奴人들은 左를 右보다 더 우선시하였으며 이는 左賢王이 單于 다음의 제2위로 여겨졌던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烏孫의 경우 左右 어느 쪽이 더 중시되었는지 분명히 말해 주는 자료는 없으나, 본문 뒤에서 오손의 왕 翁歸靡가 三男인 大樂을 ‘左大將’으로 삼았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匈奴와 마찬가지로 尙左의 習俗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흉노 선우의 딸이 ‘左夫人’이고 細君이 ‘右夫人’이었다는 기록은 당시 烏孫이 漢과 匈奴에 대한 외교적 비중을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자료라고 할 수 있다. Hulsewe(1979 : 148)도 烏孫은 匈奴의 영향을 받아 左를 더 중시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색인어
- 이름
- 건(建), 세군(細君)
- 지명
- 한나라, 한나라, 오손, 대완, 월지, 오손, 한나라, 오손, 오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