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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연은분리술[회취법]의 탄생

1. 연은분리술[회취법]의 탄생

은은 금이나 연(鉛)·아연(亞鉛) 등 광석과 함께 광상(鑛床)을 이루고 있다. 은은 단독으로 광상을 이루고 있지 않으므로,주 432
각주 432)
정성일(2004), 「조선의 동전과 일본의 은화-화폐의 유통을 통해 본 15~18세기 한일관계」, 한일관계사학회·한일문화교류기금, 『『조선왕조실록』 속의 한국과 일본』, 서울 : 경인문화사, 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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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광석에서 은을 분리해 내는 기술이 필요하다. 연은분리술(鉛銀分離術)은 조선 초기에 은광을 채굴할 때 이미 적용되었지만, 세종 말기에 은광 개발이 중지되고, 또 국가가 은기(銀器) 제조에 힘쓰지 않아, 그 기술이 은공(銀工)에게 제대로 전습되지 못하였다. 이 기술은 15세기 초 양인 김감불(金甘佛)과 장예원 노(掌隷院奴) 김검동(金儉同)에 의해 빛을 보게 되었다.주 433
각주 433)
유승주(1993), 『조선시대광업사연구』, 서울 : 고려대출판부, 1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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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양인 김감불과 장예원 종 김검동이, 납[鉛鐵]으로 은을 불리어 바치며 말하기를, “납 한 근으로 은 두 돈을 불릴 수 있는데, 납은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니, 은을 넉넉히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리는 법은 무쇠 화로나 남비 안에 매운재[猛灰]를 둘러놓고, 납을 조각조각 끊어서 그 속에 채운 다음, 깨어진 질그릇으로 사방을 덮고, 숯을 위아래로 피워 녹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시험해 보라 하였다.”주 434
각주 434)
『연산군일기』, 연산군 9년(1503) 5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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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3년 경에 김감불과 김검동이 연광석에서 은을 분리·제련하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한 것이다. 재를 이용한 이 신기술을 ‘회취법(灰吹法)’이라고 부른다. 회취법은 ① 은광석과 아연 등을 녹여서 합금을 만든 후, ② 이 합금에 재를 넣어 노(爐)에서 녹인 다음, ③ 재에 배어있는 아연을 제거하여 은을 추출하는 기술이다.주 435
각주 435)
水本邦彦(2008), 『德川のデザイン』(日本の歷史), 東京 : 小學館, 2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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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아연은 산화하여 재에 흡수되고, 은만 남는 방법이다. 이 기술은 은광개발에 큰 도움이 되어, 단천·강계·풍천 등지에서 광산이 개발되었다. 함경도 단천은 보잘 것 없는 아연 산지였으나, 이로 인해 조선 제일의 은광으로 개발되었다.주 436
각주 436)
유승주(1993), 461~1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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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새로운 기술인 회취법은 개발되자 바로 일본으로 전래되었다. “유서종(柳緖宗)이 산산(蒜山)에 지은 정자에 서울 상인 홍업동(洪業同) 등이 물품과 재화를 쌓아두었다가 경차관(敬差官)에게 발각 되어 잡혔다. 유서종이 범한 죄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왜노(倭奴)와 사사로이 통해서 연철을 많이 사다가 자기 집에서 불려 은으로 만드는가 하면, 왜노에게 그 방법을 전습하였으니, 그 죄가 막중합니다. 철저히 조사하여 법대로 죄를 정하소서.”주 437
각주 437)
『중종실록』, 중종 34년(1539) 8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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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였다. 즉 유서종이 은을 만드는 방법을 왜노에게 전습했다는 것이다.“은을 만드는 기술을 우리나라에서 배웠다.”주 438
각주 438)
『중종실록』, 중종 34년 8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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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나, “왜인들은 꾀가 교묘하여 은을 불리는 것을 보고 바로 그 기술을 배워갔다.”주 439
각주 439)
『중종실록』, 중종 34년 8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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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한 것처럼, 당시 국법으로 유출을 엄금하고 있던 신기술이 유서종을 통해서 1530년대에 일본으로 전래된 것이다.주 440
각주 440)
박평식(2009), 『조선전기 교환경제와 상인 연구』, 서울 : 지식산업사, 1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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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인과 서로 통하여 연철을 많이 사다가 불려서 은을 만들고 왜인에게 그 방법을 전습한 일은 대간이 아뢴 대로 국문하라. 불려서 은을 만드는 일은 사람마다 하는 일이 아니요, 반드시 장인이 있은 후에라야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시골집에서 쇠를 불려 은을 만들고 심지어 왜노에게 그 방법을 전습시켰다면, 이웃집에서 모르지 않았을 것이니, 유서종의 집에서 가까운 사람을 잡아다가 조사하여 실증을 얻도록 힘쓰라.”주 441
각주 441)
『중종실록』, 중종 37년(1542) 5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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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한 것처럼, 조선 조정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하도록 하였다.
불법으로 쇠를 불려서 은을 만드는 일은 당시 사형에 해당하는 형벌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증거나 증인이 확보되지 않아, 유서종은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 1539년의 유서종 사건은 조선의 회취법에 의한 연은분리술이 잠상(潛商, 밀무역 상인) 등을 통해 일본으로 전래된 중대한 사건이었다.주 442
각주 442)
정성일(2004), 236~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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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정련기술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연은분리술, 즉 회취법은 16세기 초에 조선에서 싹이 텄지만, 그 꽃을 피운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회취법의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 각주 432)
    정성일(2004), 「조선의 동전과 일본의 은화-화폐의 유통을 통해 본 15~18세기 한일관계」, 한일관계사학회·한일문화교류기금, 『『조선왕조실록』 속의 한국과 일본』, 서울 : 경인문화사, 235쪽. 바로가기
  • 각주 433)
    유승주(1993), 『조선시대광업사연구』, 서울 : 고려대출판부, 129쪽. 바로가기
  • 각주 434)
    『연산군일기』, 연산군 9년(1503) 5월 18일. 바로가기
  • 각주 435)
    水本邦彦(2008), 『德川のデザイン』(日本の歷史), 東京 : 小學館, 284쪽. 바로가기
  • 각주 436)
    유승주(1993), 461~171쪽. 바로가기
  • 각주 437)
    『중종실록』, 중종 34년(1539) 8월 10일. 바로가기
  • 각주 438)
    『중종실록』, 중종 34년 8월 10일. 바로가기
  • 각주 439)
    『중종실록』, 중종 34년 8월 13일. 바로가기
  • 각주 440)
    박평식(2009), 『조선전기 교환경제와 상인 연구』, 서울 : 지식산업사, 181쪽. 바로가기
  • 각주 441)
    『중종실록』, 중종 37년(1542) 5월 16일. 바로가기
  • 각주 442)
    정성일(2004), 236~237쪽.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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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은분리술[회취법]의 탄생 자료번호 : edeah.d_0004_0020_001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