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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2.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1930년대 중반 일본은 만주에서 자원을 획득하고 항일운동에 대한 중국 본토로부터의 지원을 끊기 위해 화북 분리공작에 착수하였다. 이를 계기로 만주의 관동군은 화북분리 공작을 더욱 강화시켜 중일 전면전쟁을 전개하고자 그 계획을 준비하고 기회를 엿보았다.
1937년 7월 7일밤, 일본은 베이징 근교 루고우차오[蘆溝橋]에서 누군가 쏜 몇 발의 총성을 구실로 삼아 군사행동을 일으켰다. 일본 측에게 전쟁 확대의 의도가 없었다면, 국지적 충돌로 머물러 전면전쟁으로 발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일본 내부에 전쟁의 확대 및 불확대를 놓고 대립이 벌어지기는 했으나, 결론적으로 일본은 7월 11일 화북에 대한 문제해결의 절호의 기회로 판단하고 대규모의 군부대 파견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계기로 일본이 중국에 대한 군사침략을 전면적으로 실시하게 됨에 따라 중일전쟁이 시작되었다.주 838
각주 838)
김명섭 (2006), 「아시아·태평양전쟁」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서울: 연세대 출판부, 201~203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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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선전포고도 없이 북경방면, 상해방면, 그리고 남방 쪽에서 중국 내륙으로 침략해 들어갔다.
그러나 이에 대한 중국의 항전체제는 급속히 통일되어 갔으며, 1937년 9월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제2차 국공합작이 이뤄졌다.주 839
각주 839)
백영서 (1989), 「제2차 국공합작의 성립과정과 그 의의」 『강좌 중국사Ⅶ』, 서울: 지식산업사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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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항일을 나선 군대와 민중들에게 큰 힘이 되었고, 각지에서 격렬한 저항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예상 밖의 저항을 받으면서도 일본은 압도적 군사력을 바탕으로 중국 측을 압박하였다. 드디어 1937년 12월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 수도 난징을 점령하였다. 난징 국민당정부는 미국과 영국이 개입하기를 바라며 이미 수도를 우한으로 옮긴 상태였으며, 중경으로 이전하여 항일전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중국이 일본의 침략확대를 국제연맹에 제소한 것이 1937년 8월에 일이었다. 그러나 서구 열강은 좀처럼 구체적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미국과 영국은 화북과 화중에서 자국의 권익을 지키려고 했던 것처럼, 대일유화정책 태도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F.D Roosvelt]는 ‘전쟁은 선전포고의 유무에 관계없이 격리되어야 한다’ 고 연설했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일본에 대한 도덕적 수준에 머물고 말았으며, 중립법이 적용되지 않아 일본에 대한 군수물자 수출이 금지되지 않았다. 이 때 소련만이 일본의 힘을 약화시켜 자국의 안전을 도모하려고 서둘러 중소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중국을 지원하였다.주 840
각주 840)
우에하라 카즈요시 외, 163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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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중일전쟁이 다소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대치단계에 들어갈 무렵, 유럽에서는 독일의 침략전쟁이 본격화되었다.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략함으로써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독일군은 두달만에 유럽대륙을 제패하였다. 이에 동남아시아에 식민지를 갖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의 지위는 약화될 수밖에 없었고, 이곳에 신경 쓸 처지가 못 되었다.
일본으로서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즉 일본은 서구열강의 동남아시아 식민지 및 그 자원을 식민지 본국의 패배로 쉽게 획득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1940년 일본은 동남아시아의 침략을 위한 ‘남진정책’ (南進政策)을 결정하였다.주 841
각주 841)
박진우 외 공저 (1999), 『일본 근현대사』, 서울: 좋은 날, 275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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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독일, 이탈리아와의 제휴를 통해 미국과 영국에게 아시아로부터 손을 떼게 만들고, 중일전쟁을 해결함과 동시에 동남아시아를 제압하여 일본을 맹주로 하는 ‘동아신질서’ 의 수립을 주장하였다.주 842
각주 842)
성황용 (1993), 『근대 동양외교사』, 서울: 명지사, 469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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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침략은 곧 미국과 영국의 대일 경제제재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는 미영 제국주의의 경제권에 대한 재분할 전쟁의 시작을 의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영은 중국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제공 하는 한편, 동시에 미국 내 일본 자산 동결, 대일 석유수출금지 등의 경제 제재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미국·영국·중국·네덜란드에 의해 포위당하고 있다며 국민을 선동하고, 동남아시아 침략을 서구제국주의 침탈로부터 여러 민족을 해방하는 ‘성전’ (聖戰)이란 이름으로 합리화하고자 하였다. 또 동남아 침략을 저지할 가능성이 있는 미군이나 영국군 기지 등을 목표로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1941년 12월 8일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 침략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다. 이어 웨이크·괌·미드웨이·필리핀·홍콩 등에 대한 공습도 동시에 이루어졌고, 11일에는 독일·이탈리아도 역시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유럽과 아시아의 전쟁이 하나로 뭉쳐지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문자 그대로 세계 최대 규모의 전쟁이 되고 말았다.주 843
각주 843)
피터 두으스 (1983), 247~248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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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이 일어난 지 반년 만에 일본은 홍콩,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대부분을 점령하고, 1942년 11월에는 점령지 행정을 총괄하기 위해 ‘대동아성’을 신설하였다. 일본은 서구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아시아를 해방하여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는 것이 전쟁의 목적이라고 주장하였다.주 844
각주 844)
임성모 (2006), 「동아협동체제에서 대동아공영권으로」 『전쟁과 동북아의 국제질서』, 서울: 일조각을 참조할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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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전쟁의 현실은 달랐다. 일본이 점령지에서 석유 고무 등 중요한 군수자원을 대량 수탈함에 따라 현지 경제는 혼란에 빠졌다. 현지 주민에게 토목공사장에 대한 강제동원 착취로, 민족역사를 무시한 신사참배, 일본어 강제 학습 등이 강요되면서 점차 각 지역에서는 반일기운이 고조되었고 항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을 받은 미국은 아시아태평양에서 일본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해 참전을 결정하였다. 초기에 일본의 기습공격을 받고 태평양에서 후퇴를 반복함에 따라 미국의 전세가 매우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전쟁을 거듭할수록 전술적 교리와 무기체제가 급속도로 발전된 미국이 반격을 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되던 전쟁 국면은 1942년 5월 미드웨이 해전과 8월 과달카날 전역 등의 승리를 계기로 일본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미국은 초반의 불리한 상황을 역전하며 전쟁 상황을 유리하게 전개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모색하였다.
1944년 사이판 상륙, 1945년 2월 이오지마 점령 등으로 태평양에 항공 기지를 확보한 미국은 B-29 등의 폭격기를 동원한 일본 내 대도시에 대한 전략 폭격을 개시하게 되었다. 7월 일본의 중요한 군사적 거점이었던 사이판섬을 점령함으로써 미국은 전쟁의 정세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주 845
각주 845)
김명섭 (2006), 215~228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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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3월 일본은 수도 도쿄에 대한 대공습을 당하여 군과 민간인의 인명과 재산에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일본 정부는 전시긴급조치법, 국민의용병역법 등을 제정하여 본토결전에 대비한 체제정비에 매진하였다. 한편으로는 소련의 중재를 통한 화평공작을 기대했으나 실패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1945년 7월 연합군인 미국·영국·중국·소련은 포츠담선언을 발표하여 일본의 항복을 권유하게 되었고, 일본정부는 이를 거부하였다. 급기야 1945년 8월 6일 및 8월 9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투하하였다.주 846
각주 846)
김영흠 (1988), 『미국의 아시아 외교 100 년사』, 서울: 신구문화사, 184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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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8일에는 소련까지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일본의 ‘천황 은’ 더 이상 전쟁 지속이 전 국토의 황폐화는 물론, 자신의 입지까지 위태로울 수 있다고 판단하고, 연합국의 포츠담선언을 수락하였다. 1945년 8월 14일에는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 의사가 전달되었다. 드디어 8월 15일에 일본의 ‘천황’ 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태평양 전쟁이 종결되었다.

  • 각주 838)
    김명섭 (2006), 「아시아·태평양전쟁」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서울: 연세대 출판부, 201~203 쪽. 바로가기
  • 각주 839)
    백영서 (1989), 「제2차 국공합작의 성립과정과 그 의의」 『강좌 중국사Ⅶ』, 서울: 지식산업사 참조 . 바로가기
  • 각주 840)
    우에하라 카즈요시 외, 163 쪽. 바로가기
  • 각주 841)
    박진우 외 공저 (1999), 『일본 근현대사』, 서울: 좋은 날, 275 쪽. 바로가기
  • 각주 842)
    성황용 (1993), 『근대 동양외교사』, 서울: 명지사, 469 쪽. 바로가기
  • 각주 843)
    피터 두으스 (1983), 247~248 쪽. 바로가기
  • 각주 844)
    임성모 (2006), 「동아협동체제에서 대동아공영권으로」 『전쟁과 동북아의 국제질서』, 서울: 일조각을 참조할 것 . 바로가기
  • 각주 845)
    김명섭 (2006), 215~228 쪽. 바로가기
  • 각주 846)
    김영흠 (1988), 『미국의 아시아 외교 100 년사』, 서울: 신구문화사, 184 쪽.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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