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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계사등록

감계사 이중하의 국경지역 조사 경과를 나열한 장계

  • 발송일
    1885년 (음)(乙酉)
□ 계초(啓草)주 635
편자주 635)
이 계초(啓草)는 『통감부문서(統監府文書)』2권(국사편찬위원회, 1998)에도 실려 있다. 그러나 원문에 실린 이두를 삭제하였으며 문서제목은 ‘여청국파원덕옥감계사사이중하 장계(與淸國派員德玉等勘界事實勘界使李重夏狀啓)’(이하 이중하 장계로 약칭함)로 바꾸어서 수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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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臣 : 이중하)은 종사관(從事官) 조창식(趙昌植)과 토문(土門)땅의 경계를 자세히 살피기 위해서 9월 2일 안변(安邊) 임소(任所)로부터 떠나 출발하고 연유(緣由)를 이미 치계(馳啓)하였거니와 9월 20일에 경성부에 도착하여 9월 21일에 도부(到付)하고 9월 19일에 성첩(成貼)하였습니다. 회령부사(會寧府使) 서형순(徐珩淳)주 636
편자주 636)
본문에는 ‘徐○ ○ ’로 되어 있으나 『통감부문서』2권에 실린 ‘이중하 장계’에 의거하여 서형순(徐珩淳)으로 보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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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보낸 첩정에 의하면, 혼춘부도통아문파원(琿春副都統衙門派員) 변무교섭승판처사무(邊務交涉承辦處事務) 덕옥(德玉), 호리초간변황사무(護理招墾邊荒事務) 가원계(賈元桂)와 길림파원(吉林派員) 독리상무위원(督理商務委員) 진영(秦煐) 등이 조회(照會)를 올려 보내라고 하였고, 또 그 조회(照會)를 보니 경계를 조사하여 판별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달 16일(26일의 오기로 생각됨)에 회령부(會寧府)에 모두 모이기로 했습니다. 회령 건너편 화룡골[和龍峪]에 상무국(商務局) 중수후(中守候)를 새로 설치하였다고 하는 조회(照會)에 답하여 즉시 수정하여 보냈습니다. 그리고 신은 종사관(從事官) 조창식(趙昌植), 수원 전령주 637
편자주 637)
원문에는 ‘전령(前令)’이 없으나 ‘이중하 장계’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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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隨員 前令) 김우성(金友性), 군관 사과주 638
편자주 638)
원문에는 ‘사과(司果)’가 없으나 ‘이중하 장계’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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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官 司果) 신석현(申錫炫)이 당일 출발해서 9월 26일 회령부에 도착하였습니다. 덕옥(德玉)과 가원계(賈元桂) 일행 또한 당일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진영(秦煐) 일행은 28일에 비로소 왔습니다.
 그러므로 9월 30일과 10월 1일에 회령(會寧) 공당(公堂)에서 두 차례 감계에 대해 담판(談辦)을 하였습니다. 중국파원은 총리아문(總理衙門)이 군기대신(軍機大臣)의 봉지(奉旨 : 황제의 명령)를 주의(奏議)한다고 하며 원래 도문강(圖們江)의 옛 경계를 조사하는 것으로 허가를 받았으니, 즉 단지 강의 원류를 답사하여 조사할 수 있으나 정계비는 강을 조사하는 하나의 증거에 불과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에 그윽히 생각해보건대[竊念주 639
편자주 639)
원문에는 없으나 ‘이중하 장계’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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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계를 정하여 비석을 세운 것은 바로 경계를 표시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곧 우선 가서 살펴보지 않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날을 서로 옥신각신 다투다가 10월 3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국파원이 회령으로부터 연강(沿江) 이상 수 백리를 가면서 상세하게 지도를 그리며 헛되이 날짜를 소비하다가 무산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지역 안에 서두수(西頭水)주 640
편자주 640)
함경북도 무산군 삼사면에서 시작하여 두만강으로 흐르는 개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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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단수(紅湍水), 홍토산수(紅土山水)가 합쳐서 흘러가 두만강이 됩니다. 중국파원은 또한 전에 말한 것을 거듭하며 오로지 두만강의 정류(正流)를 헤아려 조사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먼저 비석의 경계를 조사한 후 두만강의 원류(源流)를 살피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며 여러 번 변론하였습니다. 곧 중국파원은 또 조선 사람이 강의 원류를 조사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매우 의심스러운 일이라고 말하면서 한결같이 서로 의견을 고집하고 양보하지 않다가 각각 인원을 내어 세 길로 나누어 나가는 뜻을 내었습니다. 서로 생각을 주고받아 결정한 뒤에 10월 15일 종사관(從事官) 조창식(趙昌植), 수원(隨員) 회령에 사는 절충장군(折衝將軍)주 641
편자주 641)
조선시대 때 무관(武官)의 정삼품 당상관(正三品堂上官)의 품계(品階). 절충장군의 처(妻)는 숙부인(淑夫人)이라 하며. 당하관(堂下官)은 어모장군(禦侮將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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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섭(李垕燮), 종성(鍾城)에 사는 유학(幼學)주 642
편자주 642)
벼슬하지 않은 유생(儒生)을 이르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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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식(金禹軾), 혼춘파원(琿春派員) 덕옥(德玉)과 함께 가서 홍단수 원류(源流)를 조사하고 수원(隨員) 종성에 사는 출신(出身) 오원정(吳元貞)과 중국 회도관(繪圖官) 염영(廉榮)이 함께 서두수에 가서 조사하고 신과 안무중군(按撫中軍) 최두형(崔斗衡), 수원(隨員) 온성(穩城)에 사는 전 오위장(五衛將) 최오길(崔五吉), 무산부(茂山府) 통사(通詞) 출신(出身) 권흥조(權興祚)와 중국파원 진영(秦煐), 가원계(賈元桂)와 함께 홍토산수의 원류를 따라 바로 백두산으로 향하였습니다.
 거친 언덕 험한 벼랑과 어지러운 나무와 수풀 속에 힘겹게 전진하여 겨우 200리 정도를 나갔습니다. 그런데 산천은 높고 가파르며 험하고 막혀있고 바람과 눈은 서로 더하니 부득이 중간에서 노숙을 하였습니다. 가원계(賈元桂)가 한밤중에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뜻의 의견을 졸지에 내었습니다. 대개 그의 애초 의도는 비석을 조사하겠다는 뜻에 있지 않고 함께 돌아오는 데에 힘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궁벽한 산 깊은 밤에 [신을 재촉하여 가게 하면서 신으로 하여금 스스로 물러가도록 할 계획이었습니다. 신은 그 뜻을 헤아리고 중간에 멈추지 않고 날씨를 참아내며 앞으로 향하였습니다. 이날 밤]주 643
편자주 643)
원문에는 “催臣作行, 使臣自退之計也, 臣揣知其意, 不可中止, 忍氣向前, 而是夜”가 빠져있으나 ‘이중하 장계’에 따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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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쌓여 정강이까지 빠지고 천지는 어두워 많은 사람과 말이 위태로움에 처할 기미였으나 홀연히 동남쪽 하늘이 개이면서 아침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하여 비로소 비석이 있는 곳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밤에 간 거리를 계산해보니 약 60리 정도가 됩니다. 비문(碑文)을 2장[二本] 탁본하여 신과 중국파원이 각각 한 장씩 지닌 후에 동쪽과 서쪽의 수원(水源)의 흙과 돌의 쌓인 모양을 하나 하나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증험하고 이어서 산을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종사관(從事官) 조창식(趙昌植)은 홍단수로부터 답사하며 조사하고 허항령(虛項嶺)의 착산(鑿山)에 이르러서 눈을 만나 싸우다가 겨우 돌아왔습니다. 서두수를 답사한 인원 또한 차례대로 와서 27일에 이르러서 모두 무산부(茂山府)에 도착하였습니다. 몇 백리 가량 이어진 위험한 곳에서 7~8일동안 길에서 잠을 잤던 세 길의 인원들은 모두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왕령(王靈)이 미치지 않은 바가 없었습니다.
 다만 엎드려 생각하건대 경계를 조사하는 한 가지 일은, 정계비(定界碑)를 가지고 말씀드린다면 곧 비석은 대천(大澤, 천지)의 남쪽 산기슭 10리쯤에 있습니다. 비석의 서쪽 부근 몇 걸음 떨어진 땅에 도랑이 있어 압록강의 원류가 됩니다. 비석의 동쪽 부근 몇 걸음 떨어진 땅에 도랑이 있어 토문강(土門江)에 원류가 됩니다. 잇달아 석퇴(石堆)과 토퇴(土堆)를 만든 것이 90리가 되었습니다. 언덕의 높이는 수척이 되고, 언덕 위에 수목(樹木)이 자생하였는데 이미 늙어서 한아름 정도 되는 나무는 그해에 마땅히 한계를 표시한 것이 명백합니다. 그리고 대각봉(大角峯)의 후미 중간에 이르러서 도랑 모양[溝形]이 갑자기 좁아져서 흙 언덕[土岸]이 문처럼 마주보고 서있습니다. 옛날부터 토문이라고 부른 것은 이것을 가리킨 것이며 두만강 상류의 여러 물들의 발원처 가운데 봉퇴(封堆)에서 가장 가까운 것이 이 홍토산수(紅土山水)의 발원처입니다. 가로로 질펀한 긴 둑과의 거리가 이미 40~50리 정도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토문의 위아래의 형편을 말씀드리자면, 비석의 동쪽 건천(乾川)으로부터 동쪽으로 백 여리를 비스듬이 가서 비로소 물이 나와 동북쪽으로 북쪽주 644
편자주 644)
원문에는 ‘此’로 되어 있으나 ‘이중하 장계’에 의거하여 ‘北’으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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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강으로 들어갑니다. 송화강은 곧 흑룡강(黑龍江) 상원(上源)주 645
편자주 645)
원문에는 ‘상류(上流)’로 되어 있으나 ‘‘이중하 장계’에 의거하여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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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의 한 물줄기입니다. 길림(吉林)과 영고(甯古) 등의 땅이 모두 그 가운데에 있습니다. 중국파원은 중국과 조선의 강역 경계[交界]는 도문강으로 경계를 삼아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총서(總署) 예부(禮部)의 주의(奏議)도 도문강의 옛 터를 조사하자고 하였는데 지금 이 비석의 동쪽 도랑이 이 송화강의 상류입니다. ‘동쪽이 토문이 된다’는 뜻과 부합하지 않고 의심스러운 설이 많았습니다. 신은 하류가 비록 송화강으로 들어간다 하더라도 경계를 표시한 비퇴(碑堆)는 이미 저 토문의 형편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또 이처럼 멀어서 두만강 상류와 서로 이어지지 않으니 곧 우리나라 사람은 다만 토문으로 경계를 인정했을 뿐입니다. 처음부터 하나의 털끝만치도 속이거나 숨기는 것이 없었고 입이 닳도록 힘을 다해 변론하였던 것입니다.
 저들의 말은 곧 오로지 도문강의 정원(正源)으로 경계를 정하자고 하는 것이고 신의 말은 곧 오직 비퇴의 경계로 증거를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였기에 양쪽이 서로 갈등하였고 피차 모순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따로 회본(繪本)을 작성하여 각각 조정에게 보고하자는 뜻을 정하였습니다. 10여 일 동안 상의하여 비로소 초본(草本)을 완성하여 조회(照會)하고 함께 검열한 후에 다시 정본을 필사하였습니다. 회도관(繪圖官)의 그림을 그리는 방법이 정밀하고 상세하였는데 정간(井間)을 그어 리수(里數)를 표시하고 윤도(輪圖)주 646
편자주 646)
가운데에 지남침을 장치하고 가장자리에 원을 그려 24방위로 나누어 놓아, 방위를 헤아리는 데 쓰는 기구로서 흔히 나침반·지남반·지남철(指南鐵) 혹은 패철(佩鐵) 등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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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꺼내서 방위를 분별하였습니다. 많은 날 공력을 써서 이에 완본을 완성하였으니 산수(山水)의 형지(形址)가 매우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홍단수의 형편은 곧 서쪽 압록강 지류와의 거리가 75리가 되며, 비석을 세운 곳과 남북 거리는 130리가 됩니다. 서두수 정류(正流)는 곧 길주 지방에 이르는데, 비석을 세운 곳과 남북 거리는 400~500리가 되니 곧 비문의 ‘동쪽이 토문이 된다’라고 한 것과 애초부터 서로 관계가 없습니다. 곳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증험하고 하나 하나 변론하여 충분히 그 의심을 쪼개고 깨뜨렸으나 중국파원은 또한 비계(碑界)의 강원(江源)과 중국의 도지(圖誌)가 부합하지 않는다고 하여 끝내 의혹을 풀지 않았습니다. 여러 달 동안 서로 주장을 견지하며 마침내 손가락으로 정할 수 있는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각각 비문 한 본과 지도 그림 한 본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회본(繪本)은 곧 서로 함께 검인(鈐印)을 찍고 따로 조회를 실행하였습니다. 이에 11월 13일에 회령부로부터 피차 되돌아갔습니다. 변계(邊界)의 형편과 듣고 본 사실을 간략히 몇 조항으로 엮고 신의 어리석은 생각을 첨부하여 별도로 한 건을 만들었습니다. 아울러 비문 1본, 도회(圖繪) 1본과 조회등초(照會謄抄) 1권, 담초(談草) 1권을 승정원에 올려 보내어 열람할 수 있게 하였으며 신과 종사관(從事官) 조창식(趙昌植)이 그대로 즉시 돌아가는 길에 과정을 우선 치계(馳啓)합니다.

  • 편자주 635)
    이 계초(啓草)는 『통감부문서(統監府文書)』2권(국사편찬위원회, 1998)에도 실려 있다. 그러나 원문에 실린 이두를 삭제하였으며 문서제목은 ‘여청국파원덕옥감계사사이중하 장계(與淸國派員德玉等勘界事實勘界使李重夏狀啓)’(이하 이중하 장계로 약칭함)로 바꾸어서 수록하였다.바로가기
  • 편자주 636)
    본문에는 ‘徐○ ○ ’로 되어 있으나 『통감부문서』2권에 실린 ‘이중하 장계’에 의거하여 서형순(徐珩淳)으로 보충하였다.바로가기
  • 편자주 637)
    원문에는 ‘전령(前令)’이 없으나 ‘이중하 장계’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바로가기
  • 편자주 638)
    원문에는 ‘사과(司果)’가 없으나 ‘이중하 장계’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바로가기
  • 편자주 639)
    원문에는 없으나 ‘이중하 장계’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바로가기
  • 편자주 640)
    함경북도 무산군 삼사면에서 시작하여 두만강으로 흐르는 개천이다.바로가기
  • 편자주 641)
    조선시대 때 무관(武官)의 정삼품 당상관(正三品堂上官)의 품계(品階). 절충장군의 처(妻)는 숙부인(淑夫人)이라 하며. 당하관(堂下官)은 어모장군(禦侮將軍)이었다.바로가기
  • 편자주 642)
    벼슬하지 않은 유생(儒生)을 이르던 말이다.바로가기
  • 편자주 643)
    원문에는 “催臣作行, 使臣自退之計也, 臣揣知其意, 不可中止, 忍氣向前, 而是夜”가 빠져있으나 ‘이중하 장계’에 따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바로가기
  • 편자주 644)
    원문에는 ‘此’로 되어 있으나 ‘이중하 장계’에 의거하여 ‘北’으로 고쳐서 번역하였다.바로가기
  • 편자주 645)
    원문에는 ‘상류(上流)’로 되어 있으나 ‘‘이중하 장계’에 의거하여 고쳤다.바로가기
  • 편자주 646)
    가운데에 지남침을 장치하고 가장자리에 원을 그려 24방위로 나누어 놓아, 방위를 헤아리는 데 쓰는 기구로서 흔히 나침반·지남반·지남철(指南鐵) 혹은 패철(佩鐵) 등으로 불렸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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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계사 이중하의 국경지역 조사 경과를 나열한 장계 자료번호 : gd.k_0001_0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