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동(直洞)을 지나 장산령(長山嶺)을 넘어 절파총수(折把摠水)에 도달
○ 10월 16일 비로소 산 입구에 들어섰다. 한 마을의 부로(父老)가 모두 전송하러 수서(水西)에 이르렀다. 읍리(邑吏) 안창준(安昌俊)이 식량과 말먹이를 이끌고 왔는데 더러는 등에 짊어지거나 더러는 말에 실었다. 민정(民丁)주 552 수십 인을 뽑아 먼저 갔고 중국측과 우리는 한 길로 서로 잇달아 따랐다. 처음 떠날 적에는 간솔(簡率)하였으나 사람과 말이 오히려 70여구나 되었다. 산 입구에서부터 물이 흘러가고 지나간 곳은 모두 평평하여 심하게 높고 험한 곳이 없었다. 간간이 수전(水田)처럼 새로 경작한 땅들이 있었다.
나무는 모두 삼나무와 자작나무인데 자생하기도 하고 저절로 말라죽기도 하였다. 가장 많은 것은 백선차(白鮮茶)주 553인데 본초(本草) 가운데 이것이 어느 나무인지 모르겠다. 차 맛은 매우 좋았으나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하니, 또한 초목(草木)이 세상 사람들에게 잘 알려짐과 알려지지 못한 차이인 것이다.
40리를 가서 직동(直洞)주 554
막사는 몇 곳이 있는데 온돌은 하나만 있었고 서너 사람을 수용할 수 있었다. 내가 말하기를, “진영(秦煐), 가원계(賈元桂) 두 사람은 함께 묵으시오.”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노지(露地 : 노천)에서 불을 땠는데 더러는 앉고 더러는 졸았다. 마부와 역에 동원된 장정[役丁] 등도 바깥에서 노숙하면서 나무를 잘라 불을 때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들으니 이 백성들은 길을 트는[開路] 요역(徭役)으로 산에 들어왔는데, 이와 같이 지낸 지가 한 달여나 되었다고 한다. 그 굶주림, 추위 같은 갖은 고생이 사람으로 하여금 측은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오히려 피곤하고 게으른 기색이 없었다. 산골짜기 백성의 순박함과 윗사람을 섬기고 일에 종사하는 마음은 참으로 감탄할 만하였다. 이 날 밤 그들과 함께 거처하였는데 앉으나 누우나 불편하였다.
불편함을 견디어내고 날이 밝아지자 밥을 재촉하여 먹고 바로 출발하였다. 새벽달이 희미하게 비치고 잔설이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20리를 갔는데 눈은 더욱 세차게 내렸다. 장산령(長山嶺)을 넘는데 길은 좁고 눈이 덮여서 길이 미끄러우니 일이 걱정스러웠다. 또 20여 리를 가서 가척봉(加隲峯)의 엽막(獵幕)주 555에 도착하였다. 말에게 먹이를 주고 즉시 출발하여 개울을 따라 갔는데 개울의 이름은 월로수(越路水)였다. 10여 리를 가니 못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두만강 발원처라고 한다.
또 30리를 가서 절파총수(折把摠水)의 엽막에 도착하였는데 날이 저물었기 때문에 여기서 잤다. 이 막사는 지어진 것이 아주 열악하였으며 온돌도 없었다. 온종일 눈과 싸워 온 나머지 사람과 말이 모두 얼었다. 그런데도 노지(露地 : 노천)에서 새벽을 기다리면서 어렵게 하룻밤을 지냈다.
나무는 모두 삼나무와 자작나무인데 자생하기도 하고 저절로 말라죽기도 하였다. 가장 많은 것은 백선차(白鮮茶)주 553인데 본초(本草) 가운데 이것이 어느 나무인지 모르겠다. 차 맛은 매우 좋았으나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하니, 또한 초목(草木)이 세상 사람들에게 잘 알려짐과 알려지지 못한 차이인 것이다.
40리를 가서 직동(直洞)주 554
편자주 554)
에 이르렀다. 머물러 쉬는 막사[留憩幕]가 있는데 사냥꾼들이 잠을 자는 곳이다. 그 막사의 짜임새는 양 가장자리에 서까래를 걸고 지붕이 없어서 바로 바깥과 통한다. 그래서 앉아서도 하늘을 볼 수 있고 비와 이슬이 흘러 내렸다. 대체로 사냥꾼이 와서 유숙(留宿)하는데 불을 때서 추위를 막는다.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연기와 불꽃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평안북도 위원군(渭原郡)에 있는 지명이다. 위원군(渭原郡)은 본래 이산군(理山郡)의 도을한구자(都乙漢口子)이었다. 처음에 만호(萬戶)를 두어 방수(防戍)하다가, 세종(世宗) 25년(1443년)에 구자(口子)가 이산(理山)·강계(江界)의 양읍(兩邑) 사이에 있어서, 서로 거리가 매우 멀기 때문에 이산(理山) 의 독산(獨山)·응기(鷹岐)·초평(草平)·서동(西洞)·원공야지(元公也只)·상하도을한(上下都乙漢)·대소유흔(大小兪欣)·가을헌동(加乙獻洞) 및 강계(江界)의 봉화대(烽火臺)·가을파지(加乙波知)·직동(直洞) 등의 민호(民戶)와 토지를 갈라서 군(郡)을 설치하고, 위원군으로 이름을 고쳐서 강계부(江界府)의 관할[所領]로 삼았다. (『세종실록』, 「지리지」)
막사는 몇 곳이 있는데 온돌은 하나만 있었고 서너 사람을 수용할 수 있었다. 내가 말하기를, “진영(秦煐), 가원계(賈元桂) 두 사람은 함께 묵으시오.”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노지(露地 : 노천)에서 불을 땠는데 더러는 앉고 더러는 졸았다. 마부와 역에 동원된 장정[役丁] 등도 바깥에서 노숙하면서 나무를 잘라 불을 때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들으니 이 백성들은 길을 트는[開路] 요역(徭役)으로 산에 들어왔는데, 이와 같이 지낸 지가 한 달여나 되었다고 한다. 그 굶주림, 추위 같은 갖은 고생이 사람으로 하여금 측은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오히려 피곤하고 게으른 기색이 없었다. 산골짜기 백성의 순박함과 윗사람을 섬기고 일에 종사하는 마음은 참으로 감탄할 만하였다. 이 날 밤 그들과 함께 거처하였는데 앉으나 누우나 불편하였다.
불편함을 견디어내고 날이 밝아지자 밥을 재촉하여 먹고 바로 출발하였다. 새벽달이 희미하게 비치고 잔설이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20리를 갔는데 눈은 더욱 세차게 내렸다. 장산령(長山嶺)을 넘는데 길은 좁고 눈이 덮여서 길이 미끄러우니 일이 걱정스러웠다. 또 20여 리를 가서 가척봉(加隲峯)의 엽막(獵幕)주 555에 도착하였다. 말에게 먹이를 주고 즉시 출발하여 개울을 따라 갔는데 개울의 이름은 월로수(越路水)였다. 10여 리를 가니 못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두만강 발원처라고 한다.
또 30리를 가서 절파총수(折把摠水)의 엽막에 도착하였는데 날이 저물었기 때문에 여기서 잤다. 이 막사는 지어진 것이 아주 열악하였으며 온돌도 없었다. 온종일 눈과 싸워 온 나머지 사람과 말이 모두 얼었다. 그런데도 노지(露地 : 노천)에서 새벽을 기다리면서 어렵게 하룻밤을 지냈다.
- 편자주 552)
- 편자주 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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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자주 554)
평안북도 위원군(渭原郡)에 있는 지명이다. 위원군(渭原郡)은 본래 이산군(理山郡)의 도을한구자(都乙漢口子)이었다. 처음에 만호(萬戶)를 두어 방수(防戍)하다가, 세종(世宗) 25년(1443년)에 구자(口子)가 이산(理山)·강계(江界)의 양읍(兩邑) 사이에 있어서, 서로 거리가 매우 멀기 때문에 이산(理山) 의 독산(獨山)·응기(鷹岐)·초평(草平)·서동(西洞)·원공야지(元公也只)·상하도을한(上下都乙漢)·대소유흔(大小兪欣)·가을헌동(加乙獻洞) 및 강계(江界)의 봉화대(烽火臺)·가을파지(加乙波知)·직동(直洞) 등의 민호(民戶)와 토지를 갈라서 군(郡)을 설치하고, 위원군으로 이름을 고쳐서 강계부(江界府)의 관할[所領]로 삼았다. (『세종실록』, 「지리지」)
- 편자주 5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