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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야쓰이 세이치의 조사

야쓰이 세이치[谷井齊一]가 1917년에 총독부에 제출한 복명서를 보면 평안남도 만달면 오노다[小野田]시멘트 주식회사의 공장 예정지 부지와 철도부지에 존재하는 고분을 조사하라는 명을 받고 1917년 3월 15일에 경성을 출발하여 16일에 현장에 도착하였으며, 19일까지 3일간 조사한 사실이 확인된다. 그리고 20일에 현장을 마무리하고 21일에 경성으로 돌아온 것으로 확인된다. 이때의 보고서는 『평안남도 강동군 만달면 고분조사보고서』라는 이름으로 제출되었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당시에 제출된 복명서에는 아래와 같이 조사내용을 밝히고 있다.
평안남도 강동군 만달면 승호동에 있는 민가의 서북방 만달산의 서남산록의 임야 및 경지 일대에 약 200기의 고분군이 있다. 그들 고분 중에는 2기만이 석총(石塚)이고 나머지는 모두 토분(土墳)이다. 석곽은 횡광식으로 한 봉토 중에 2곽이 있는 것도 적지 않다. 현실은 고구려의 분묘와 통하는 모줄임 천장이다. 석곽의 재료로는 부근에서 풍부하게 나는 석회암을 이용하였고, 내면에는 석회를 발랐다. 그 외형은 거의 불명인데 석총은 방형의 기저를 가지고, 토분 또한 방대형인 것 같은데 그 봉토가 비교적 완전한 것에는 그 형적을 가진다.
만달면 승호동의 동방, 동면 파릉동에도 민가의 동북방 및 북방의 밭과 서방의 산 아래에 약 20여 기의 고분이 점재한다. 모두 석곽의 일부가 노출되어 있다.
만달면 승호동의 고분군에서 서북으로 반리 정도 떨어진 동면 방암동에도 약 60~70기의 고분이 산재한다.
이상 승호동, 파릉동 및 방암동에 있는 약 300기의 고분은 그 외형 및 석곽 내부의 형상을 관찰한 결과 모두 고구려 고분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다음에 이 지방에 있던 유력자의 무덤일 것인데 지금으로부터 1천 4백년 전후의 시대에 조영된 것이다. 이들 고분의 거의 전부는 이미 도굴의 화를 당한 것 같은 흔적을 남아 있고, 게다가 세월이 지나면서 고립되어 인위적인 훼손에 천연적인 파괴도 더하여 지금 완존하는 것은 거의 하나도 없는 지경에 도달했다.
1917년 3월 17일부터 19일까지 3일간에 걸쳐 그들 300기의 고분 중 겨우 2기의 석총과 토분의 대표적인 것을 골라 봉토가 비교적 완존하는 1기를 조사하여 아래에 그 대강을 기록한다.
 
圖 170_평안남도 강동군 만달면 고분 분포도, 『大正五年度朝鮮古蹟調査報告』에서 전재(부분 가필)

만달면 제1호분 (승호동 산림내 석총)

만달면 제1호는 다이쇼 6년도(1917) 조사보고를 통해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우선 보고문을 우리말로 옮겨 보자.
평안남도 강동군의 만달면 만달산의 서남록 승호동의 산림 중 경사지에 만들어진 석총이다. 지금 붕괴되어 이 고분만이 조영 당초의 형상을 알 수 있지만 고구려 국내성의 유허인 압록강 우안, 중국(지나) 집안현 통구 부근에는 이러한 석총이 적지 않게 존재한다. 그들도 파괴를 당한 것이 심하여 많은 것은 그 봉토와 같이 당초의 형상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다행인 것은 광개토왕의 릉, 현재 집안현 온화보 동강 장군총의 땅에 엄호하게 존재하여 지금도 충분히 당시의 규모를 엿볼 수 있다. 그들 집안현의 고구려 석총의 연구를 통해서 그 붕괴된 석총도 당초에는 석곽을 봉하는데 전혀 흙을 사용하지 않고 적당한 크기의 작은 할석을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부는 절석을 사방에서 계단형으로 쌓아 돌려 그 외형은 마치 피라미드의 정부를 잘라 놓은 것과 같은 모양의 봉토이다.
삼국지 위서에 고구려 후장의 풍속(俗)을 기록하는 것과 부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석총은 만달산 서남록 약 300기의 고분 중에서 겨우 삼림에 하나 경작지에 하나만이 남아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고구려시대 초기에는 활발하게 조영되었는데, 현재 집안현에 유존하는 고구려시대 분묘의 실재와 비추어도 의문이 없다.
고분은 파괴되어 지금 그 기부는 사방 약 10m 61cm, 높이는 약 152cm의 석축을 남길 뿐이다. 그 조영 연대는 아마도 장수왕의 평양 천도 후, 얼마 지나지 않은 때의 것으로 보이는데 고구려시대의 평양 장안기의 분묘 중 초기에 속하는 대표적인 것의 하나로 중요한 유적이다.
 
圖 171_평안남도 강동군 만달면 석총 제1호분(평면도), 『大正五年度朝鮮古蹟調査報告』에서 전재
圖 172_평안남도 강동군 만달면 제1호분(측면도, 단면도), 『大正五年度朝鮮古蹟調査報告』에서 전재
圖 173_평안남도 강동군 만달면 제1호분 전면 1, 『大正五年度朝鮮古蹟調査報告』에서 전재
圖 174_평안남도 강동군 만달면 제1호분 전면 2, 『大正五年度朝鮮古蹟調査報告』에서 전재
보고서에 게재된 사진을 보면 고분은 지표면에 2~3단 정도로 포개진 기단석 상부에 돌이 가득 채워진 형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부 적석 사이에도 석렬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원래는 집안의 기단식 석총과 동일한 형태였음이 분명하다. 평면 형태는 완전한 사각형이 아니라 사다리꼴에 가깝다. 적석 중앙부를 굴착한 흔적이 있지만 매장주체부는 드러나지 않는다. 이미 오래전에 완전히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고분은 서변의 길이가 12.3m이고 북변의 길이가 11.21m이다. 경사면 아래에서 남아 있는 기단까지의 거리가 2.27m로 기단도 제법 높이가 있다.

만달면 제2호분(승호동 산림내 토분)

만달리 제2호분에 대해서도 제법 상세한 보고가 이루어졌다.
만달면 제2호분은 만달면 1호 석총에서 동남방향으로 약간 떨어진 경작지에 접한 산림지역 내에 존재하는 고분이다. 부근에 있는 고분 중 최대의 것 중 하나로 봉토 및 석곽이 비교적 완존한다. 이미 도굴된 것으로 연도에서 포복을 하고 현실에 들어가서 현실 내부에 찬 토석을 제거하고 조사를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석회를 이용하여 매장주체부를 축조하였으며, 연도가 남쪽으로 달렸다. 봉분의 기저에 부분적으로 석렬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호남리 사신총과 마찬가지로 기저부에 낮은 기단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현실 바닥은 석회로 다짐했고 네 벽은 제법 큰 막돌을 이용하여 쌓은 다음 석회로 면을 화장했다. 현실 천장은 고구려 고분에서 일반적인 모줄임을 하고 그 위에 정석을 덮은 구조이다. 바닥의 오른쪽(서쪽)에 치우쳐 넓은 관대를 만들었는데 상면과 천장을 석회로 깨끗하게 미장하였다. 현실의 전방부는 조사시 약간 함몰된 상태였다.
圖 175_평안남도 강동군 만달면 제2호분(분구도), 『大正五年度朝鮮古蹟調査報告』에서 전재
圖 176_평안남도 강동군 만달면 제2호분(종횡 단면도), 『大正五年度朝鮮古蹟調査報告』에서 전재
圖 177_평안남도 강동군 만달면 제2호분(종단면도, 평면도), 『大正五年度朝鮮古蹟調査報告』에서 전재
圖 178_평안남도 강동군 만달면 제2호분 전면, 『大正五年度朝鮮古蹟調査報告』에서 전재
圖 179_평안남도 강동군 만달면 제2호분 연도, 『大正五年度朝鮮古蹟調査報告』에서 전재
圖 180_평안남도 강동군 만달면 제2호분 현실 천장, 『大正五年度朝鮮古蹟調査報告』에서 전재
圖 181_평안남도 강동군 만달면 제2호분 발견 철못, 『大正五年度朝鮮古蹟調査報告』에서 전재
현실은 길이 방향으로 약 273cm, 횡으로 약 203cm, 높이는 약 303cm이다. 연도는 길이가 약 358cm이고 넓이는 91cm 정도이다. 연도의 천장은 현실에서 멀어지면서 한 단씩 높이면서 처리했는데 현문에는 연도의 천장보다 한 단 낮은 문미석이 있다. 연도의 높이는 현실에 접한 부분이 139cm이고 입구는 182cm 정도이다. 현실에서 76cm 정도에 있는 현문 바깥의 연도 천장은 1단 높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두께 약 12cm의 판석을 가지고 연도를 폐쇄한 흔적이 남아 있다. 그 외측에는 할석에 석회를 먹여서 연도를 막은 흔적이 남아 있다. 할석 폐쇄부 바깥에 연도의 천장이 한 단 높아지는 부분에도 또 한 번 판석으로 연도를 폐쇄한 흔적이 남아 있다. 연도 좌우측 벽과 천장은 그 입구까지 석회를 발랐지만 부분적으로 떨어져나갔다. 이 부분을 통해 연도의 좌우 벽석도 막돌로 축조한 다음 석회로 미장했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도굴분이라 내부에서 출토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고 현실 내부에서 철정이 발견되었을 뿐이다. 야쓰이는 목관을 사용한 흔적이라고 판단했다. 조사 후에는 석실 내부로 한기가 들어가면 파괴될 것을 우려하여 복구작업을 한 다음 현장에서 철수하였다.

만달면 제3호분

제3호분은 제1호분의 남쪽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 위치하는 것으로 만달면 제2호분의 서남 약 20칸의 밭 안에 있는 석총이며, 파괴되었다.
기부의 둘레는 흙으로 덮여 있는데 지금 각 변이 약 13m 64cm이고, 높이는 약 152cm인 평면 방형의 고분이다. 만달면 제1호분과 동일한 구조로 기단식이며 상부가 잘린 피라미드 형태였다고 생각한다. 잔존상태는 제1호분보다 열악해서 적석 사이로 기단의 흔적만이 확인될 뿐 매장 주체부는 그 형태를 남기지 않았다. 보고자가 말하는 것처럼 이 역시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지 오래지 않아 축조한 것이다.
만달리 고분군은 그 후 1927년에 만달리에서 1기의 고분을 추가 발굴하였고, 1937년에는 또 다시 14기의 고분을 발굴하여 그 내용의 일부를 보고하였다. 1937년의 발굴도 1917년의 발굴과 마찬가지로 시멘트 공장의 부지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결국 1917년에 조사된 만달리 고분은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수많은 고구려 유적 중에서 구제발굴의 형태로 이루어진 최초의 발굴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圖 182_평안남도 강동군 만달면 제3호분 분구도와 단면도, 『大正五年度朝鮮古蹟調査報告』에서 전재
圖 183_평안남도 강동군 만달면 제3호분 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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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쓰이 세이치의 조사 자료번호 : ku.d_0003_0030_004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