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미즈 오니시유적
戶水大西遺跡
유적개관
보고서에 의하면 건물군을 8세기 중엽부터 후엽, 8세기 말부터 9세기 초, 9세기 전반, 9세기 후반의 4기로 나누어 정리하고 있지만, 고지마는 8세기 후반, 9세기 전반, 9세기 후반의 3기로 재정리했다. 이 유적의 평가에 대해서 살펴보면, '숙가(宿家)'나 '대시(大市)'라고 기록된 묵서 토기가 출토되고 있다는 것으로부터 숙박시설이나 시장에 관련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가하(加賀) 국부진(國府津)에 도래한 발해 사절이 체재하면서, 그들이 가지고 온 대륙의 물자와 교환하기 위한 시장이 열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가 생각된다. 발해계의 유물은 출토되고 있지 않지만, 사절을 거처하게 한 '변처(便處)'로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가진 유적이다.
참고문헌
윤재운, 일본소재 발해 유적유물의 종합적 검토, 한국사학보41, 2010년 11월
해설
토미즈 오니시[戶水大西] 유적은 일본 이시카와[石川]현 가나자와[金澤]시 토미즈[戶水]정(町)에 위치한다. 이 유적은 토미즈[戶水]C 유적의 남쪽으로 약 1.5㎞ 떨어져 있으며, 우네다[畝田]나베타 유적의 동쪽 약 400m에 있다.
토미즈[戶水]C 유적은 가가[加賀]에 국(國)이 설치되는 9세기 중엽에 조영된 항구 유적으로 가가[加賀]의 국부진(國府津)으로서 위상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되고, 우네다[畝田]나베타 유적은 가가[加賀]의 ‘편처(便處)’, 즉 발해 사신들을 머물게 했던 곳이었을 가능성이 있는 유적이다.
이 유적에서 발굴된 건물터는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8~9세기로 비정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묵서가 된 토기이다. 이 토기들에는 ‘백가(宿家)’나 ‘대시(大市)’ 등의 묵서가 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숙박시설이나 시장으로 추정하고 있다. 가가의 국부진, 즉 항구로 들어온 발해 사절단이 머무르면서 그들이 가지고 온 대륙의 물자를 서로 교환하는 시장이 열렸던 것으로 보인다.
발해계 유물들을 출토되지 않았지만, 사절단을 머무르게 했던 ‘편처(便處)’로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가진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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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미즈[戶水]C 유적은 가가[加賀]에 국(國)이 설치되는 9세기 중엽에 조영된 항구 유적으로 가가[加賀]의 국부진(國府津)으로서 위상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되고, 우네다[畝田]나베타 유적은 가가[加賀]의 ‘편처(便處)’, 즉 발해 사신들을 머물게 했던 곳이었을 가능성이 있는 유적이다.
이 유적에서 발굴된 건물터는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8~9세기로 비정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묵서가 된 토기이다. 이 토기들에는 ‘백가(宿家)’나 ‘대시(大市)’ 등의 묵서가 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숙박시설이나 시장으로 추정하고 있다. 가가의 국부진, 즉 항구로 들어온 발해 사절단이 머무르면서 그들이 가지고 온 대륙의 물자를 서로 교환하는 시장이 열렸던 것으로 보인다.
발해계 유물들을 출토되지 않았지만, 사절단을 머무르게 했던 ‘편처(便處)’로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가진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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